소설
박민규 朴玟奎
1968년 울산 출생. 2003년 『지구영웅전설』로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한겨레문학상, 2005년 『카스테라』로 신동엽창작상 수상. kazuyajun@hanmail.net
장편연재4(마지막회)
핑 퐁
수고하셨습니다, 그럼요 그럼요
그보다는 보르네오 돼지에 관한 이야기, 내지는 칠리쏘스를 얹은 〈아프리카〉의 오므라이스에 대해 우리는 얘기했다. 식사 메뉴를 개시한 건 잘한 일이라고 봐, 탁구를 치다보면 때로 배가 고팠거든. 무와 마늘즙을 끼얹은 세 조각의 브로콜리가, 늘 오므라이스의 찬으로 곁들여지곤 했다. 한번은 네 조각이었어. 찬에 대해서도 우리는 얘기했다. 세 조각이나 네 조각의 브로콜리처럼, 토막토막 그런 류의 기억들이 잔잔하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방송을 본 것은 지난 주말이었다. 신인 여자 탤런트 柳가 보르네오의 돼지에게 질문을 속삭였다. 뭐라고 했나요? 가르쳐줄 수 없어요. 쉿, 절대 비밀. 카메라를 향해 그녀가 눈을 찡긋했다. 이곳 원주민들은요, 예로부터 신에게 전달할 중요한 물음을 돼지에게 전했다고 해요. 그러면 신은 돼지의 간에 그 답변을 남겨둔다는군요. 그래서 제가, 지금 막 질문을 던졌습니다. 두근두근 결과가 궁금하시죠? 자 따라오시죠. 그리고 원주민들의 제례와 의식이 소개되었다. 돼지의 간을 꺼내 본 무당이 신의 답변을 읽어주었다. 뭐라고 한 거죠? 그것은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번창할 것이다. 그럼 돼지를 잡은 거군요? 남자 앵커가 물었다. 네, 저도 깜짝 놀랐어요. 그럴 줄 몰랐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정말 예쁜 돼지였는데… 스튜디오의 柳는 이내 울상이 되더니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그런 柳를, 함께 출연한 金이 다독여주었다. 진정하시고요, 그런데 어떤 질문을 했던 거죠? 시청자 여러분도 궁금해하실 텐데. 네, 우리 프로의 시청률이 올라갈까요?라고 물었어요. 감정을 추스른 柳가 큰 눈을 더 크게 껌벅이며 얘기했다. 오, 와, 하고 출연자들이 박수를 쳤다. 감사합니다, 이상 보르네오의 오지에서… 수고하셨습니다.
柳는 살이 많이 쪘더라. 모아이가 말했다. 그런가? 내가 물었다. 확실히,라고 모아이가 대답한 후 우리는 말이 없었다. 백색의 그 세계는 고요하고 편안했다. 고요하고 편안한 공간에 드러누워, 우리는 말없이 눈을 깜박였다.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모아이가 입을 열었다. 알 게 뭐야,라고 나는 생각했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대신 예쁜 돼지는 아니었다고 봐,라고 입을 열었다. 불쌍해 그 돼지… 모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은 눈이 부시도록 환하고 환했다.
달보다도, 거대한 크기였다. 그것은 수직으로 하강해왔고, 천천히 스며들듯 지면과 맞닥뜨렸다. 그때까지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으므로, 우리는 머리 위의 탁구공이 점점 커지는 그 광경을- 이윽고 하늘을 덮을 만큼 거대한 구체의 접근을 오래도록 관찰할 수 있었다. 와아, 주상복합단지 전체가 그런 탄성으로 술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명과 같은 것을, 그리고 싸이렌을 우리는 들었다. 도시가, 익히 우리가 살아온 그 세계가 충격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탁구계(卓球界)는 그렇게, 이 세계와 폐합(廢合)되었다.
부욱
그것이 지면과 맞닥뜨리는 순간, 그런 소리를 들었다. 부욱- 지면보다 먼저, 우리의 두피가, 두개골이, 쇄골이, 따라서 전신이 그 소리와 함께 탁구계에 스며들었다. 눈을 감았으나 눈꺼풀 너머가 환하게 보일 만큼 눈부신 세계였다. 부우욱. 그리고 깊게, 공이 스미는 소음을 들은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고요해졌다. 귀가 퇴화를 해도 좋을 만큼 완벽한 고요였다. 라켓을 움켜쥔 채, 더듬 왼손을 뻗어 나는 모아이의 손을 잡았다. 확인할 수 있는 건 라켓과 모아이뿐이었다. 라켓과 모아이는 아주아주 따뜻한 것이었다.
눈을 뜬 것은 귀가 퇴화라도 했을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니 꽉찬, 어마하게 부신 순백의 공간을 보았고, 그래서 그곳은 작은 우주 하나를 반전(反轉)시킨 느낌이었다. 그 우주의 복판에 우리는 앉아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외롭지 않은 것은 소파와, 탁구대와, 캐비닛이 여전히 같은 위치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천천히 그것들을 어루만졌다. 아주아주 따뜻했다.
그 외에는 미생물조차 존재하지 않을 듯한 무(無) 자체였다. 그 흰색이 나는 두렵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했다. 세끄라탱은 어떻게 된 거지? 글쎄, 하고 나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곁에 있다면 역시나 따뜻할 세끄라탱이 없어 실망했지만, 곧 마음이 편안해졌다. 순백의 그 공간엔 인간의 감정을 무마시키는 어떤 장치가 있는 듯했다. 몸과 마음이 무덤덤하고, 무위(無爲)로웠다. 보르네오의 돼지 말이야, 그래서 모아이가 돼지이야기를 꺼냈을 때 나도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송 나도 봤어. 웃겼지? 웃겼어.
굿모닝.
세끄라탱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돼지와 오므라이스와, 그밖의 토막토막 브로콜리 조각과도 같은 얘기들을 한참이나 나누고 난 후였다. 몸을 일으켜 고개를 돌려보니 벌판의 끝, 정도의 먼 거리에 거대한 생물이 서있었다.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괴상한 생김새였고, 그 크기가 주상복합단지 전체와 맞먹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아마도 머리,와 같은 부분이 우릴 쳐다보고 있었으므로 우리도 그 머리,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성큼성큼, 여러 개의 다리를 움직여 그것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또다시 라켓을 꼭 쥐었다.
이상하게도, 그것은 다가올수록 점점 크기가 줄어들었다. 작은 야산 정도의 크기로, 다시 작은 건물만하게, 다 자란 플라타너스 정도의 크기가 되더니 이윽고 곁에 다다른 순간 우리와 비슷한 키가 되었다. 아, 하고 모아이가 한숨을 쉬었다. 아, 하고 그것 역시 한숨 같은 것을 내뱉었다. 먼 거리를 걸었는지 여러 개의 다리가 잠시 후들거리는 느낌이었다.
나야, 세끄라탱.
그것이 나야, 세끄라탱이라고 말했으므로 우리도 잠시 다리가 후들거리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라켓을 꼭 쥔 채 내가 물었다. 놀라지 않아도 돼. 원래의… 내 모습 같은 거니까. 탁구인(卓球人)이란 대략 이런 것이야. 다시 멀리서 세끄라탱과 같은 생물들이 이곳을 향해 걸어왔다. 역시 거대했다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작아져 보르네오의 돼지만한 크기가 되었다. 두 마리는 세끄라탱과 같은 모습이었고, 하나는 몸체가 같을 뿐 유독 인간의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백색의 세계에서 더 돋보이는 분홍의 뺨, 전교학생회장이었다. 안녕? 아, 안녕. 우리의 인사에 그는 애써 시선을 피하는 눈치였다. 분홍의 국수 같은 것이 부푼 뺨 속에서 몇번을 꿈틀거렸다. 아, 마음에 안 들어. 뭐야… 뭐냐구. 그는 몹시 화가 난 얼굴이었다. 어떻게 된 거냐구요, 아빠. 네?
그저
핑퐁이 시작되었을 뿐이야. 무덤덤하고, 무감(無感)한 머리를 기울이며 세끄라탱이 얘기했다. 핑퐁은, 하고 세끄라탱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나로서도 설명이 곤란하구나. 하나하나 차근차근 궁금한 걸 물어주면 좋겠어. 너무 오랜만의 핑퐁이라 간섭자인 나 역시도 망각한 게 많으니까. 일단 앉자꾸나. 소파엔 못과 모아이가 앉도록 해. 어쨌거나 할 일이 많은 건 너희들이니까. 할 일이 많다는 말이 못내 마음에 거슬렸지만, 우리는 일단 소파에 몸을 묻었다. 눈높이에 걸쳐진 탁구대의 수평선이, 그래서 두 눈 가득 시야에 들어왔다. 처음 소파에 몸을 묻었을 때처럼, 탁구대는 세계의 집약(集約) 같은 느낌으로 눈앞에 놓여 있었다. 핑. 퐁. 핑. 퐁. 핑. 퐁. 핑. 퐁. 이상하리만치 상쾌했던 그 소리가 귓속에서 빠르게 공전(公轉)하는 느낌이었다. 자꾸만 나는 그 공을 주워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있다면- 거대하고 희고, 눈부신 이 공 속에서.
이것은 하나의 프로그램이란다. 세끄라탱이 입을 열었다. 프로그램이라뇨? 말하자면 생태계의 폼(form)에 관한 관리라고 할 수 있지. 지금의 폼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언인스톨할 것인가 그걸 결정짓는 거란다. 결정이라니, 어떻게요? 물론 탁구를 통해서지. 좋든 싫든 이제 너희 둘은 인류의 대표와 시합을 벌여야 해. 인류의 대표라… 그럼 인류와 관련된 건가요? 바로 인류, 때문이지. 인류라는 인스톨을 유지할 것인가, 언인스톨할 것인가. 결정은 승자의 몫이란다. 왜, 그래야만 하죠?
그럴 만하니까
그런 거란다. 이 공은 어디서 온 건가요? 어디선가,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구나. 우주는 너무나 광대하니까. 말하자면 어디엔가 있는- 연결된- 생명이 온 곳이란다. 공은 지구의 요청에 의해 온 것일 수도, 그곳의 뜻에 의해 온 것일 수도 있단다. 즉 리시브일 수도, 써브일 수도 있다는 뜻이지.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요? 숱하게, 숱하게 있는 일이란다. 기록을 보고 싶니? 덜컹덜컹 그리고 캐비닛을 연 세끄라탱이 백색의 커다란 모니터를 꺼내 탁구대에 올려놓았다. 지구의, 가장 가까운 핑퐁의 기록이란다. 우리는 곧 처절한 한 편의 탁구시합을 모니터를 통해 볼 수 있었다. 공룡(恐龍)들의 탁구시합이었다.
승자는 두 마리의 이구아노돈이었단다. 두 친구의 이름은… 이제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아무튼 이들이 언인스톨을 선택했고, 한번의 공백기를 거친 다음 지금의 인류가 인스톨된 것이란다. 빙하기… 때문이 아니었나요? 생명이란 건 말이다, 스스로의 의지로 스스로를 의지하는 거란다. 나는 잠자코 모니터 속의 이구아노돈을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몇배 크고 강한 상대들과 싸워 승리한- 쓰러질 듯 거친 숨을 몰아쉬는 복잡한 표정의 생명을 보았다. 묘하게도 라켓을 쥔 이구아노돈의 앞발은 발톱이 거의 빠져 있었다. 힘들었구나. 물끄러미 무릎에 얹은 두 손의 끝을, 나는 말없이 내려보았다. 그럴 만하니까
그랬던 거야.
나는 물었다. 세상은 어떻게 된 건가요. 내가 있던, 그곳. 근본적으로 아직은 어떤 변화도 없단다. 탁구계는 지구와 충돌한 게 아니라 착상(着床)된 것이니까. 다만 공포를 느끼고 있겠지. 지금쯤 외벽을 탐사하느라 다들 분주하지 않을까? 어쨌거나 소용은 없겠지만… 보고 싶니? 보고 싶어요. 세끄라탱이 다시 모니터를 작동시켰다.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의 모습이 모니터 가득 포착되었다. 동북아 어귀에 탁구공이 박힌 채로 지구는 여전히 공전하고 있었다. 궤도를 이탈한 건 아닌가요? 모아이가 물었다. 걱정 마렴. 탁구계는… 아주, 아주아주 가벼운 것이란다. 세끄라탱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우리죠? 모아이가 물었다. 그건 나도 알 수 없는 거란다. 우연이 아닐까? 벌판에서 너희가 탁구대를 발견한 것도, 너희가 탁구를 배우게 된 것도… 두 마리의 이구아노돈이 탁구를 배운 것도… 그런 건 내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라서. 나의 역할은 작동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룰에 따른 판정을 하고… 또 언인스톨이 일어난다면 새로운 생태계를 시작하는… 이를테면 그런 거란다. 그럼 결과에 따라 인류가 멸종할 수도 있는 거군요. 승자의 의지에 따라, 그럴 수도 있겠지. 인류가 유지된다면 모든 건 원점으로 돌아가는 거고. 그럼 탁구계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탁구공이란 건 말이다, 대답 대신 한숨을 쉬며 세끄라탱은 탁구공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잘 보렴. 촉수 끝에서 작은 불꽃이 일었다. 탁구공은 푸른 연기를 내며 이내 연소되기 시작했고 그 자리엔 어떤 물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런 거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모아이가 물었다. 탁구를 쳐야지. 고개를 숙이며 세끄라탱이 말했다.
몇가지 변화에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우선 원근감에 변화가 있다는 사실, 즉 멀어질수록 공이 커 보일 거란 얘기야. 물론 짧은 거리에선 큰 변화가 없겠지만 아무튼 그 점을 명심하기 바래. 또 눈으로 공을 캐치하기가 무척 곤란할 거야. 탁구계 전체가 탁구공의 보호색인 셈이니까. 이곳에서의 탁구는 그래서 좀더 너희들의 느낌을 필요로 할 거야. 그 외엔 너희가 배운 그대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