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편지

 

 

하성란 「별 모양의 얼룩」 외

 

 

하성란 「별 모양의 얼룩」

이 글은 딴지체를 좀 도둑질해서 써보려고 그런다. 왜냐하면 ××, 좋은 소설을 하나 보고 나서 기분이 더욱 엿같아졌기 때문이다. 지난 토요일 일이 있어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온 이후로 계속 삐돌이 써방 눈치를 실실 보다가 드디어는 나도 화가 나버려서 자발적인 안방 연금상태로 맥주를 찔찔 마셔가며 최근 『창비』 두어 호의 소설과 시를 훑었다. 이 몸 처지만 해도 지금 전반적으로 욕 나오는 상황인데, 소설도 시도 (우리 애 말로) ‘니끼니끼’했다. 젠장할, 신경숙은 우째 거기서 한 발도 더 안 달라지냐고……

시 중에서는 정양 선생 것이 좋았다. 그리고 그 물에 빠져 죽은 시체 얘기 쓴 거, 그거 좋더라. 나는 산문적이라 그런지 죽어 팅팅 불어 게새낀지 우렁이새낀지가 그 죽은 콧속으로 기어들어간다는 그 명확한 이미저리를 콱 집어주는 게 딱이었다. 왠지 거 시원한 거 있잖아. 인간이 버러지 밥 되는 거 생각하면 오히려 후련해지는 거. 그런데 술을 처먹어 그런지, 낫살 들어가는 티 내는 것인지, 요새는 시 제목과 시인 같은 것은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하성란의 「별 모양의 얼룩」이 짱이었다. ××, 첨엔 제목만 보고 무슨 무라까미 하루끼 흉내내는 건가 했다. 두어 장 읽으면서는 뭐야 이거, 이혼한 여편네 이야긴가, 하는 반응으로 바뀌었다. 우리 평범한 딸아이를 못 본 지 일년이 지났다는 정도의 감이 오는 내용이 이어졌으니까. 근데 이거, 나도 일주일에 한번쯤은 이혼을 생각하며 사는 처지지만, 그놈의 이혼한 뇬넘들 야그 정말 지겨운 거 좀 알아주면 좋겠다. 옛날 그 지겨운 사랑타령 하던 야그들의 아지매 버전이 너무 많이 판치는 요즈음이라 이거다. 사랑하다가 결혼해서 안 맞아서 이혼했다, 이제 다른 놈(들)하고 몸섞을 생각도 하고 있다,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나 주전부리삼아 하고 있고, 그런데 「별 모양의 얼룩」은 그게 아니더라고……

나도 여섯살 난 아이가 있다. 에미가 아이를 위해 온종일 노심초사하는 보통의 주부들과 다른 덕분에, 우리 아이는 방학중에도 만날 종일반이라는 이름 아래 탁아소 같은 유치원에서 지냈고, 더구나 개학을 하면서 아그는 여덟시도 되기 전에 눈을 부비며 유치원 문 안으로 쑤셔넣어진다. 어디나 그렇지만 그 유치원 원복 겸 운동복도 노란색이다. 어디서나 눈에 잘 띄라는 당국의 배려인가는 모르겠지만, 그 노란색만 보면 요즘은 반사적으로 유치원에서 애는 잘 노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아니면 E마트에서 뭐를 좀 사가야 되나 하는 생각이거나…… 빠블로프의 개라나 뭐라나……)

우리 새끼도 엄마 책 볼 때 자꾸 말 시킨다고, 글 써야 되는데 지 컴퓨터게임 하겠다고, 떼를 쓰다가 지청구를 실컷 듣고 나서야 눈물콧물을 주렁주렁 매달고 오지 않는 밤잠을 청하기 일쑤다. 갸도 여섯살답지 않게 얼뜨기라 아침에 유치원 갔다온다는 인사를 제 할머니에게 할 때 ‘안녕히 다녀오겠습니다’ 하는 대신 걸핏하면 ‘안녕히 계세요’라고 말해서 쯧쯧거리는 대상이 된다. 그러면서도 내 밑으로 나온 새끼라는 것이 이렇게 묘해서, 침 흘려가며 이불 걷어차고 자는 애 옆에서 새삼스레 냄새를 킁킁 맡아보면서, 젖비린내가 더이상 안 나는지 그리운 양 더듬어보기도 하고, 이러다가 언젠가 문득 내 손 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주책같은 목이 콱 잠길 때도 있지.

하성란의 소설은 바로 이런 일상의 기억에서부터 출발하는데,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그것을 바로 쏟아부어놓지 않고, 똥깨나 뀌고 사는 여편네가 마치 이혼하고 헤어진 딸내미 생각하는 것처럼 처음을 시작하는데 더욱 노련미가 돋보인다. 읽어가면서, 뭐야 이거, 지 새끼 모자라는 거 불만인 엄마 같더구만 사실은 이제 영영 잃어버린 아아를 이제는 그만 좀 그리워하고 싶어하는, 그래서 자꾸 모자라는 면을 생각해보는, 그런 모성이잖아, 하는 깨달음이 서서히 오도록 사기를 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뒤통수 때리기는 상당히 기분 좋은 종류라고 봐야지.

문제는 이런 뒤통수 까기에서 시작해서 핫바지 방귀 새듯이 끝나는 글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라는 점인데(윤영수의 「콩켸팥켸」가 한 예 되겠다. 이 아줌씨는 그나마 씩씩한 글을 쓰는 편이고, 「착한 사람 문성현」은 만만찮은 감동을 주는 작품이지만, 이 냥반 대체로 의도가 너무 강해 얘기 중반쯤 가면 일찌감치 훌러덩 치마를 벗어버린 꼴이 될 때가 많다고 보는 바이다), 하성란의 이 소설 또한 진상대책위원회 어쩌구 하는 부분으로 가면서는 으음 그렇지, 이제 창비한테 아부하는 노선으로 갈라구 하는구만, 하고 또 허방다리를 짚어보게 하는 지점까지 아슬아슬 나아간다. 그리고 사실 이까지쯤의 이야기야, 왠간하지만 그래도 허걱 소리난다고까지는 할 수 없다. 왜냐, 소재와 문체가 참신한 것 갖고 버티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 그렇다.

그런데 그 진상대책위원회가 맞닥뜨리는 것은 화재 직전에 야영장을 빠져나온 노란 옷 입은 아그가 하나 요 앞을 지나가고 있었노라는 구멍가게 아저씨의 증언이었던 것이야…… 물론 그 증인이라는 인간은 술주정뱅이고, 애 걸음으로 그 가게 앞을 지나기에는 야영장으로부터의 거리는 너무 멀고, 게다가 당시 야영장 204호에 있던 아이들 대가리 수는 분명히 맞았다고 하고, 더구나 그때는 한참 여러 유치원 아그들이 많이 와서 지내고 가는 때였다고 하니(모두 다 노랑색 원복으로 칠갑을 했겠지), 이것 참 유족으로서는 환장할 노릇이다. 나 닮아 짐짓 무심한 우리 주인공 엄마도 자기 새끼일 리는 애시당초 글렀다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놈 아그가 자박자박 걸어가는 그 소리가 죽은 아아 가진 모든 엄마들 마음을 후벼파는 것이다.

자박자박자박자박…… 이거 정말 모골이 송연해질 만큼 오싹한 얘기지만도, 또 그나마의 가느다란 희망줄을 어떻게 끊어버릴 수 있겠느냐고…… 우리 주인공 에미도 계속 그 생각을 씹고 또 씹고 있었기 땜에 자기 새끼가 그날 아침 가슴에 별 모양의 쪼꼬렛 얼룩을 묻힌 채 칭얼거리면서 유치원에 갔던 것을 생각해내는 것이다. 이제 서두에 자기 애가 별볼일 없이 특징없는 애고, 하나쯤 빠져도 전혀 즈이 담임이 관심을 기울일 법도 없다는 것이 중요한 가능성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 발걸음, 들릴 듯 말 듯, 그렇지만 어쩌면 아직도 엄마를 찾아가며 먼길을 오고 있기 땜에 ‘아직’ 자신에게 안 온 것 같은…… 괴기와 애정과 희망을 한꺼번에 꿰차고 절묘하게 컷! 한 결말을 여러분들도 인정해야 하시리라고 봐.

그래. 물론 나는 새끼 가진 어미라서 더 많이 울었다. 숨이 가빠질 정도로 헉헉거려가며 울었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 애가 거기 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 아침에 씨리얼에 우유(아니면 달걀 후라이에 토스트든지) 말아 앵겨주고, 어기적거리는 아아를 내 출근 늦어질까 닦달해가며 급하게 보냈는데 그것이 마지막이었다─는 생각을 한번쯤 안해본 에미가 어디 있겠냐고. 더구나 이태 전 씨월드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케이비에스 뉴스로 보면서, 저 속에서 내 새끼가 잠든 채로 죽을 수도 있었겠구나─라는 생각을 안해본 아지매가 이 땅에 어디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나 독자가 반드시 꼭 나와 같은 애 딸린 아지매가 아니어도, 화악 빨아들여서 상상력을 한껏 조리돌림시키는 그런 재조를 요 조고만 글이 피우고 있다는 것이다, 내 말인즉슨. 그것도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말이다. (이 글은 영미문학연구회 홈페이지sesk.superboard.com의 자유게시판에서 가져온 것임─편집자)

욕쟁이 azimai@lycos.co.kr

 

「다시 지혜의 시대를 위하여」를 읽고

『창작과비평』 111호에 게재된 백낙청 교수의 논문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우리 눈앞에 놓인 경제·사회의 동향이 세계자본의 전략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앞으로의 대체적인 조감도와 지식인으로서의 삶의 방식·과제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와 같이 힘겨운 시대에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일본인으로서, 또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누구와 어떤 식으로 연대해나갈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되는 한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 부산에서는 일본식민치하 강제연행과 관련한 미쯔비시중공업의 배상책임을 묻는 재판이 개인청구권에 기초해서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난번의 공판에서는 히로시마로 강제징용된 원폭피해자인 할아버지의 귀중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20세기에 일본이라는 국가가 저지른 과오를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부끄러움과 함께 일본인의 역사인식과 실천의 취약함을 새삼 통감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최근 문제되고 있는 역사교과서를 비롯해 이러한 일본인들의 결함을 해부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미 체결한 지 36년이 지난 한일조약을 재검토하는 작업과도 관련있을 것이다. 21세기의 동아시아를 생각할 때 한일관계는 핵심적인 문제의 하나이다. 오늘날 한일 시민·지식인의 교류는 지난날에 비해 꽤 늘어났지만 그 내용의 깊이가 중요하다. 앞으로는 『창비』의 지면에서도 한일관계에 관한 논문을 중점적으로 다루어주기를 기대한다.

부산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객원교수

아오야기 쥰이찌(靑柳純一)

 

진정한 교육개혁과 원활한 입시를 소망하며

대학입시를 담당하는 실무자로서 이정우 교수의 「교육개혁, 무엇이 잘못되었나」를 읽고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2002학년도 대학입시를 앞두고 언론매체에서 연일 교육개혁의 부적합성에 대하여 성토하고 있을 때여서 더욱 의미깊게 다가왔다. 학력사회의 틀이 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현행입시는 어떠한 선발방법을 적용하더라도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는 대학 서열화를 막을 수 없다는 주장에 적극 동의한다. 특히, 수능시험의 변별력 축소는 눈치작전의 부활을 초래하고 나아가 객관적인 선발잣대를 파기하기에 이르렀다는 지적은 누가 보아도 타당하다. 이는 결국 ‘선발권의 자율’이라는 이름 아래 그 잣대를 대학에 고스란히 떠넘긴 상태인데, 대학마다 입시정책을 고민하는 첫번째 이유도 다름아닌 객관적인 선발기준의 확정에 있다. 그러나 행정·재정 지원이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자율’은 이미 자율일 수 없으며 이는 대학 나름의 건실한 선발기준마저 방해한 채 오히려 획일화를 조장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선발기준의 타당성 여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지만 대부분의 대학은 공정한 선발기준을 마련할 수 있는 내부적 체제와 성숙함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강제된 자율권은 대학마다 더 나은 서열을 점하기 위하여 더욱 강화된 선발기준을 구축하게 하고, 급기야는 선발잣대로서의 능력을 상실한 수능시험과 맞물려 대학입시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현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몇가지 시급한 개혁안을 제시하였는데 모두가 긍정적이기는 하지만 최우선으로 개혁되어야 할 것은 학급당 인원수의 축소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몇가지 개혁안 역시 단기적으로 실현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설령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핵심’을 뒤로 미루어서는 결국 또다른 문제점을 야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급당 인원의 축소 역시 다른 사안들과 함께 추진되어야만 한다. 결국, 이러한 개혁안과 대학의 ‘자유로운’ 선발권이 보장될 때, 교육부의 본래 취지인 학생들의 적성과 인성을 살린 공교육의 정상화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교수의 논단은 대학의 입시업무를 맡고 있는 실무자가 입시정책을 수립함에 있어 수험생의 입장을 재삼재사 숙고하도록 일깨워주는 귀한 시간이 되었다. 앞으로도 『창비』가 올바른 교육개혁의 방향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해답을 제시해주기를 기대해본다.

인하대학교 입학관리과 허우범

 

21세기 벽두에 읽은 깊은 성찰의 글 두 편

백낙청 선생의 글은 자본주의가 고도화해질수록 불안정성을 지니는 시대에 우리가 분단극복의 사명과 동아시아적 연대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이뤄낼 수 있는가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지식과 정보가 자본이 되는 싯점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지혜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분단극복의 과정에 있는 한반도가 루가노 보고서의 섬뜩한 ‘인구감축전략’의 장이 되지 않기 위해서도 지혜는 절박하게 요구되는 화두이다. 또하나 흥미롭게 읽었던 것은 항심을 지키는 데 필요한 항산의 적정량을 지닌 노동자계급의 정체성과 그들에게 요구되는 수련에 관한 내용이다.

존재, 존재의 눈짓, 눈짓에 응답하는 시적인 언어, 은폐와 탈은폐성…… 참으로 어렵게 다가갔던 개념들에 대한 기억 때문에 김상환 선생의 글은 값지다. 이 글은 잘 읽히는 문장과, 맑스의 개념과 비교하는 전개방식으로 인해 하이데거를 쉽게 이해하게 만든다. 세계 내의 불안으로부터 야기된 배시(配視)적 실천을 가지고 개방성을 지향할 때 존재가 열린다는 하이데거의 철학은, 맑스가 자기증식하면서 거대해지는 기계(자본) 안에서 자본의 허점과 적을 읽어내는 사유와 통한다. 마찬가지로 기술 안에 내재한 틈과 유령을 발견해내는 안목이 있을 때 기술 극복의 길은 열릴 것이다. 유령에 대한 논의와 개념정리가 좀더 구체적으로 전개되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이 점이 필자의 다음 글을 기대하게 만들기도 한다. 텍스트를 잘 소화해서 논리를 전개하는 필자의 안목에 찬탄을 보낸다.

서울시 양천구 목2동 544-7 박정원

 

좀더 나은 교육정책을 위하여

이정우씨의 「교육개혁, 무엇이 잘못되었나」는 비전공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훌륭한 글이라 생각한다. 교육론은 이상적(理想的)일 수 있어도, 교육정책은 이상적이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시급한 몇가지 개혁’ 부분을 관심있게 읽었다. 거시적 개혁보다 크기는 작으면서도 매우 중요한 개혁들을 내놓고 있는데, 현실적인 개혁들이 많이 눈에 띄어서 공감이 많이 갔다. 다만, 국어교육의 중요성을 조금 간과한 측면이 있어 안타까웠다. 논리력·추리력·상상력·창의력·감수성 등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문학교육은 천편일률적인 현재의 교육을 보완해주는 것으로 필수적이다. “언제나 옳은” 답만을 배워온 대학 신입생들의 리포트들은 주장이 서로 대동소이하면서 논리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즉, 창의력과 논리력이 결여되어 있다. 그럼에도 지금 중·고등학교의 문학수업은 거의 잘못되어 있는 실정이다. “또 하나의 암기과목”으로서가 아닌, 제대로 된 문학교육이 시급하다. 최근 서울대에서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한 시험의 결과에서도 볼 수 있듯이 현재 고교졸업자의 국어능력은 심각한 정도다. 국어능력 없이는 무언가를 ‘배운다’거나 ‘토론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논술의 폐지’만 해도 그렇다. 현재 논술고사에 많은 문제점이 있고, 뚜렷한 개선방안이 없다면 폐지해야겠지만 그 긍정적인 측면도 생각해야 한다. 실제로 논술 모의고사를 통해, 정형화된 것이긴 하지만, 학생들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연습을 하게 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런 사정 때문에, 논술을 폐지할 때에는 국어 과목에 대한 더 큰 배려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정우 씨의 다른 제안들은 현실성과 실효성을 함께 가진, 중요한 주장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수행평가, 제2외국어, 논술 및 면접에 대한 부분들은 평소에 절실하게 느끼고 있던 터였다. 이정우씨의 글을 시작으로, 최근 더욱 관심이 고조된 교육개혁 문제에 대해 『창비』에서도 더 나은 대안을 찾는 과정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연세대학교 인문학부 권영전

 

최승호는 시각을 이용하여 대상을 집요하게 관찰한다. 그것은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고발을 관철하려는 의도이다. 욕망이 거대할수록 감정적 언어의 배제는 섬뜩한 느낌을 더한다. 「오후의 익사체」에서 시인은 관찰하는 대상이 지닌 욕망을 객관화하고, 마지막 부분의 갑작스러운 개입으로 실은 자신도 관찰당하는 세계의 일부임을 고백한다. 지난한 작업을 꾸준하게 하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 감동적이다. 손택수의 시는 「斷指」에서 보여주는 긴장을 조율하는 능력, 「송장뼈 이야기」에서 보여주는 이야기를 만들고, 흐름을 놓치지 않는 능력, 「대추나무 신랑」에서의 신화적 상상력 등이 돋보여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백석을 잘 소화했다는 느낌이며, 앞으로의 시를 기대해본다.

최건규 smpkr@hanmail.net

 

교생실습을 나와 있습니다. 교무실 한구석에 앉아서 빈 시간 내내 색연필로 줄을 그어가며 『창비』를 읽었습니다. 밖에서 보던 학교, 교육현장에 직접 들어와보니, 변하지 않은 것들과 새로운 것들이 함께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수업도 못 들어가고 교무실 한쪽에서 오전 내내 벌서고 반성문을 쓰는 학생은 여전히 있었고, 우리 때와는 다르게 학급회의 시간에 제각각인 낯선 풍경도 있었습니다. 자유스러워 보이면서도 개인주의적인 모습, 그러나 교과서에는 없는 내용을 교육해보려는 발전적인 수업도 지켜봤습니다. 처음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는 고민과 학생의 입장에서 보려는 노력. 교육과정에 대한 고민들. 건강한 고민도 그 현장 속에 함께 있구나, 하는 안도감도 느꼈습니다. 『창비』를 들고 다니는데 한 선생님께서 “아직도 『창비』가 있어요?”라고 물었습니다. 다른 어느 곳보다 교육현장이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좀더 건강한 문제의식과 교육과 사회문제에 대한 화두를 던져주는 『창비』가 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목포시 용해동 라이프 1차아파트

2동 801호 박혜영

 

학생들과 관련된 「3cm의 사회학」 「교육개혁, 무엇이 잘못되었나」를 특히 관심있게 읽었습니다. 나도 언젠가 겪었던 적이 있고 그 대상에서는 이제 벗어났지만 여전히 그들과 비슷한 ‘학생’이라는 이름을 함께 쓰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밖에 애니메이션에 관한 글도 관심이 갔습니다.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다룬 무거운 분위기의 논문들 끝에 비교적 기호품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에는 이와 비슷한 성격으로 음악에 관한 글이 실렸으면 합니다. 고전음악이든 대중음악이든 그 창작적인 일면은 평할 만한 것일 테니까요.

부산시 북구 만덕3동 럭키아파트

10동 103호 송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