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구병모1

구병모 具竝模

1976년 서울 출생. 제2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 장편소설 『위저드 베이커리』가 있음. nowheregirl@empal.com

 

 

 

학문의 힘

 

 

힘이 있어야 한다.

그 힘은 순도 높고 폭발력을 지닌 것으로서 한 개체의 구조와 그 유지 및 변형 사이에 존재하는 역학관계를 효율적으로 조정하며 각 관계를 잇는 긴장과 탄력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 힘을 가하여 작용이나 반작용을 일으키는 데 적절한 타이밍이 필수임은 말할 것도 없다.

여자는 차가운 플라스틱 시트에 앉아 출혈과 고통을 가능한 줄이고 볼일은 효과적으로 마칠 최적의 순간을 노리고 있다. 머릿속으로는 오늘 아침 남편이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힘이, 필요하다던.

여자도 지금 이 순간 힘이 필요하다. 통증을 견디고, 이 우중충한 건물 화장실 변기에서 아랫도리를 드러낸 채 물때로 미끈거리는 타일 바닥에 쓰러져 기절하지 않을 수 있는. 두 층 아래에 있는 ‘만인기획’의 작은 사무실까지 난간을 잡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는. 남편이 밖에서 얻기를 기대하는 힘과는 품위부터 현격한 차이가 난다.

그녀는 오늘 회원권의 파격 할인가를 강조하는 헬스클럽 전단지 시안만 넘기고 조퇴할 것이다. 남편이 일곱시에 손님 열여섯명을 모시고 올 예정이며, 그전에 마트에 들러 장을 보아야 한다.

 

여자가 처음 자기 몸에서 꼬리를 발견한 것은 닷새 전, 사거리 건너편에 새로 생긴 병원의 명함을 만들고 있을 때였다. 그전에도 화장실을 들락거릴 때 종종 휴지에 붉은 피가 찢긴 꽃잎처럼 묻어 나오는 등 몇몇 전조가 보이기는 했지만,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곤 했다. 실장님, 우리 휴지 좀 좋은 걸로 바꾸면 안되나요.

그러나 이날은 달랐다. 실장이 외출을 나가 그녀 혼자 있었고, 사무실 창은 열려 있었으며, 거대한 누브지(紙) 뭉치를 싣고 달리는 오토바이들이 피워올린 황사 먼지며 꽃가루가 폭풍처럼 밀려들어왔다. 그녀가 창을 닫다 만성 비염이 도져 재채기를 연거푸 하는 순간, 엉덩이 사이에 화약을 치고 불을 댕긴 것처럼 기습적인 폭발이 일어났다.

아찔하고 외설적인 통증을 간신히 수습하고 정신을 차리자 그 자리에 꼬리가 느껴졌다. 퇴화와 함께 사라진 태곳적 흔적기관의 갑작스러운 출현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살펴볼 만한 것을 찾아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으나 목 높이에 걸린 벽면거울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꼬리는 간헐적인 통증과 더불어 그 어떤 말로도 에두를 수 없는 아득한 냄새를 계속 몰고 왔다. 사무실을 환기시키기 위해 창을 다시 열자, 바로 아래로 오토바이가 지나가면서 그녀는 다시 한번 콧구멍으로 오장이 쏟아질 듯이 재채기를 연타로 해댔다. 허리 아래로는 자기 몸이 아닌 것 같은 총체적 이물감이 느껴졌고, 설상가상으로 그새 꼬리는 더욱 길어진 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 엉덩이를 양쪽으로 움직이며 자리를 좀 정돈해보았고, 여의치 않자 결국 옷 속에 손가락을 넣어 이 정체불명의 외계 생명체 같은 녀석을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얼마쯤 하자, 녀석은 곤충을 잡기 위해 날카롭게 촉수를 뻗은 식충식물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침 떼는 모양으로 천천히 제자리에 돌아가 몸속에 장착되었다.

여자는 그때 마침 통과된 시안을 출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병원 이름은 ‘21세기 학문외과’였다.

처음 시안을 작업하면서 그녀는 물었다. 실장님 이거 오타 아니에요? 실장은 마침 가래를 뱉으려던 참에 그녀의 말을 듣고는 도로 삼키고 제풀에 기침을 했다. 미스 유는 상식도 쎈스도 그렇게 부족해서야 어떻게 이 일을 하겠어. 그녀는 자신이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존감만 가지고 기계적으로 만들어온 수많은 나이트클럽 광고지와 학생회 리플릿 들이 쎈스가 필요한 일이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짐작건대 특정 신체부위의 이름이 주는 혐오감과 불쾌감을 완화하기 위해 이름을 바꾼 건가 싶었다. 그러나 실장의 설명은 뜻밖이었다. 의료법 43조에 따르면 병원 간판에 표기할 수 있는 진료과목이 가정의학과나 비뇨기과 재활의학과를 비롯한 총 25개 과목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간판에는 항문외과라고 쓰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 왜, 그래서 길거리 가다 보면 항외과나 항사랑닷컴 그런 거 많잖아. 그런 줄 알고 그대로 시안 보내줘.

여자는 출력한 명함 가운데 한장을 집어 점퍼 주머니에 넣었다.

 

뭐니뭐니 해도 아무 소리 말고 네가 잘해야 한다. 여자의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그저 안사람이 잘하면 가방끈 긴 서방의 교수자리는 떼놓은 당상이라고 했다.

여자는 한숨인지 코웃음인지 모를 신음소리를 내고는 대답했다. 엄마 때랑은 달라서 요즘은 위에 똥차가 빨리 안 빠지거든요. 마흔 되기 전에 ‘2년 계약직 강의전담 조교수’ 같은 귀걸이인지 코걸이인지 모를 해괴한 타이틀이라도 달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어. 티오는 없지, 줄은 줄대로 섰지, 만약 잘 풀리더라도 그 2년 뒤에는? 나는 저 사람 교수 되는 건 이미 기대 안해. 엄마는 여자의 어깨를 두어번 쥐어박았다. 그러니까 네가 관리를 잘하라는 거잖아. 좋은 교수한테 줄도 좀 잘 서게 도와주고.

여자는 엄마의 손을 뿌리쳤다. 나 학교 떠난 지가 언젠데 나더러 치맛바람 휘두르라고 그래요. 그런 짓 하는 사람 아무도 없을뿐더러 줄이라면 이미 석사 때 다들 알아서 섰어. 이제 와서 바꿀 수 있는 줄 알아. 줄 바꾸는 사람은 그걸로 학문 인생 끝이야. 그러나 여자의 엄마는 세상을 움직이는 남자와 그 남자를 움직이는 여자의 신화를 굳게 믿고 있었으며, 가끔 서방이 바쁘면 네가 가서 교수 책상도 좀 닦아놓고 화병 물도 갈아놓으라 했다. 여자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 회사 다녀요. 더구나 교수회관에 외부인이랑 잡상인 못 들어가거든! 엄마는 불가해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왜 외부인이냐, 엄연히 졸업생인데. 게다가 그 회사, 뭐? 그게 어디 회사 같기라도 해야 네가 바쁜 줄 알지. 대학 나와서 전공 살려 할 게 없어서 명함이나 찌라시 따위 파주는 데를.

엄마의 신념을 귀찮아하면서도 여자는 명절이나 무슨 날이 돌아올 때마다 대형마트에 들어가 남자보다 앞장서서 카트를 밀었으며, 가격 대비 품질이 뛰어난 와인이나 잡화를 골랐고, 그러면서도 반드시 쿠폰을 쓰는 쎈스나 덤 챙기기를 잊지 않았으며, 선물 포장을 요청하기 전에 학교에 상주하는 교수들의 머릿수를 세었다. 부부동반 신년회 따위가 있을 적마다 여자는 가급적 비싸 보이지도 구차해 보이지도 않는 적당히 세련된 옷을 골라 입었으며, 그 적당히라는 말이 주는 팽팽한 긴장감과 위태로운 균형감을 고민하는 한편, 자리에 가서는 모든 이들에게 다소곳하게 술을 따르고 내내 꽃 같은 웃음을 지었다. 거기 있는 교수와 강사와 기타 조교들은 얼마 가지 않아 여자의 얼굴과 함께 여자의 이름이 아닌 누구의 부인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정서적 한계에 도전하는 이 노동을 나름 참을성있게 수행하고 있다고 믿었으나, 여자의 엄마는 종종 이런 소리로 산통을 깨놓곤 했다. 네가 하는 게 뭐 있냐, 내 친구 딸은 교수네 집에 가서 거기 사모님하고 김장도 같이 한다더라. 많이 배운 네 눈에는 고리타분해 보이고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지. 사람이 말이다, 아무리 시시해 보여도 자기한테 사소한 거 신경 써주는 사람 한번 더 돌아보게 돼 있어. 특히 나이 먹은 사람들은 더 그래.

 

지옥에서 온 전기해파리처럼 생긴 당면 한무더기가 허공으로 솟구치다가 프라이팬에 떨어진다. 끓는 기름에 닿아 칙 하고 올올이 비명을 지르는 당면 다발은 투명하게 반들거린다. 곧 간이 밴 쇠고기, 버섯, 당근, 시금치와 뒤엉켜 숨이 죽어 들어간다. 올리브유에 진간장 1큰술과 참깨.

여자는 수첩을 펼치고 쌜러드와 구절판, 불고기, 모듬전, 후식으로 내놓을 식혜에 이르기까지 적어둔 음식 이름들에 붉은 줄을 두개씩 긋는다. 가스레인지 불을 1단으로 낮추고 장을 보아온 비닐봉지를 뒤적거린다. 식혜와 함께 내놓을 과일의 종류와 갯수를 확인한 다음, 횟집에 전화를 걸어 광어 한마리를 주문한다. 계산기를 두드려보고 재료비가 얼추 10만원이 들었음을 확인한다. 그때 기름 끓는 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가 여자는 흠칫 놀란다. 서둘러 불을 끄고 잡채 더미를 뒤적거린다. 2년 사이에 끝이 뭉툭하게 닳아버린 나무주걱을 씽크대로 던져넣는다.

남편은 6년 사이에 이름을 일일이 기억할 수도 없는 몇몇 학회에서 간사인지 총무인지를 도맡곤 했다. 어느 때는 동시에 2개 학회에 속했던 적도 있다. 그는 자기 또래에 학교에 남아 학문을 탐구하는

저자의 다른 글 더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