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변화하는 시민사회와 새로운 민중운동

 

한국농업과 동북아농업

새로운 시대의 의제와 전략

 

 

이일영 李日榮

한신대 교수, 경제학. 저서로 『중국의 농촌개혁과 경제발전』 『개방화 속의 동아시아: 산업과 정책』(공저)『WTO로 가는 중국: 변화와 지속』(공저)『동북아 시대의 한국경제 발전전략』 등이 있음. ilee@hanshin.ac.kr

 

 

1.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시간이 지나면 변하는 것이 많다. 한 학기 강의가 끝날 무렵이면,‘민주화 이후’의 대학생 농활풍경에서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 시절, 일찌감치 시작되었던 예비 쎄미나, 역에 내리자마자 만나게 되는 눈 부릅뜬 정보과 형사, 못마땅한 표정의 이장어른과 긴장된 마을청년, 새참 대접은 절대 받지 않는다는 추상같은 규칙, 이런 것들은 이제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이제 학생들 농활은 봉사학점으로 인정되고 학교에서는 출발 당일 예비교육을 제공하는데, 분위기는 자유롭고 여유가 있다. 차량도 지원받고 교수와 교직원들이 현지에 농활지원본부를 차리기도 한다. 이제 학생회는 농활준비나 진행에 많은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되고, 학생회와 현지 농민회 간부는 허물없이 어울리기도 하고 갈등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시간이 지났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무엇보다도 농활을 주도해야 하는 학생회 간부들의 생각과 태도는 참으로 의구하다. 필자는 예비교육에 여러번 나간 경험이 있는데, 나름대로 변화된 한국농업의 환경과 혁신의 과제를 이야기하면서 다양한 지역적 과제와 결합하기 위해서는 중앙 차원의 연대활동은 지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메아리가 없었다. 선배 세대로서 연구자로서 교육자로서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지만, 그들의 주장과 행동, 수사법과 몸짓은 관습적으로 반복된다. 아직도 학생회에 가장 중요한 것은 농활이 농학연대의 핵심적 공간이라는 점인 것 같다. 이를 통해 WTO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 힘을 모으고, 나아가 한국농업을 사수하자는 것이다.1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는 빠르게 도시화하고 있는 수도권 농촌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전철역까지 가는 길을 즐거이 걸으면서 계절을 느끼고 상념에 젖기도 한다. 그간 많은 사람들이 힘껏 투쟁했고 많은 정책이 쏟아져나왔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가면 이 들판이 생명력있는 모습으로 지속될 수 있을까? 한국경제와 농업(그리고 농민운동)은 어디로 가야 하나?

필자의 주장을 서둘러 말하면 다음과 같다. 이제 관습적 사고에서 물러서서 새로운 발걸음을 준비할 때이다. 한국농업은 여러가지 국제적·국내적 요소와 복잡한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 한국농업을 둘러싼 외부환경에는 변하지 않는 것도 있고 변하는 것도 있다.WTO로 대표되는 국제경제질서는 당분간은 우리가 변화시키기 어려운 ‘구조’이다.새롭게 태동하고 있는 동북아 경제질서는 도전과 기회의 두 얼굴을 가진 ‘형성과정’ 속에 있다. 우리는 분단을 넘어서는 새로운 질서를 지지한다. 이를 위하여 농업과 농정은 농촌주민과 소비자의 안전을 도모하면서(사회적 연대성), 경쟁과 혁신을 통해 자생력을 갖추어야 한다고(시장 친화적 접근) 생각한다.2

 

 

2. WTO 쌀 협상: 오래된 의제

 

(1) WTO는 악마인가

올해 한국농업 최대의 이슈는 WTO 뉴라운드에서 협상을 어떻게 가져가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WTO에 대해서는 어떤 관점을 가질 것인가? 우리는 거부와 추종의 양극단에서 벗어나 ‘이용’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한국은 1999년 11월 중국산 마늘에 대해 잠정 긴급관세를 부과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중국은 2000년 6월 한국산 휴대전화와 폴리에틸렌 수입을 중단하는 일방적 무역보복조치를 취했다. 일본 역시 마늘을 두고 중국과 분쟁을 벌인 바 있다. 중국은 자국 농업을 보호하고 수출을 확대하려는 충동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거친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 중국도 WTO 회원국이 되었고 따라서 WTO 규범에 따라 행동해야 하기 때문에, 분쟁의 전개과정은 일정하게 제도화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유무역은 누구에나 이익이라는 식으로 추종하는 것도 문제지만, 자유무역질서를 막무가내로 거부하는 것도 현실적이지 못하다. 반세계화 시위에 흔히 등장하는 구호로 “WTO는 가난한 사람들의 주머니를 터는 강도”라는 주장이 있다. 분명 그런 측면이 있기는 하다.WTO를 주도하는 선진국의 경우 보호관세와 보조금, 할당제 등 여러가지 수단을 통해 공업을 발전시켜놓고 다른 나라들에는 자유무역을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3 그러나 만에 하나,WTO 무용론이 현실화된다고 해도 강대국의 일방주의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국제경제질서를 마련할 구상과 능력이 있는가? WTO를 움직이는 주요 세력, 즉 미국·유럽·일본·중국 등을 빼고 국제적 차원의 조절이 가능한가? WTO가 사라지면 당장 우리 눈앞에 천하위공(天下爲公)의 대동세상이 펼쳐질 것인가?

어쩌면 WTO가 주도하는 국제무역질서에서 한국이 빠져나갈 수 있는 여지는 당분간 없다는 것은 상식적인 판단에 속한다. 오히려 미국이나 중국의 일방주의 경향이 강화되고 WTO의 기능이 약화된다면 한국으로서는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 더 어려워질 수도 있다.WTO 체제가 침몰하고 일방주의, 블록화가 득세하여 세계무역이 급속히 축소된다면, 국내에 완결된 재생산구조를 갖추지 못한 한국경제, 그리고 한국의 농업·농촌경제는 엄청난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 한국으로서는 국제무역질서의 불공정성을 내부적으로 비판하면서 장기적으로 세계경제의 통합을 지지하는 것이 선택가능한 합리적인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WTO에서 쌀협상이 우리에게 몹시 부담스런 것이기는 하지만, 모든 책임을 외부에 뒤집어씌울 일은 아니다. 세상에는 천사와 악마, 두 편만 있는 것은 아니다.

 

(2) UR과 뉴라운드의 쌀협상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정말 WTO체제 출범 전과 흡사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현재 농업관련단체들은 쌀시장의 관세화를 극력 반대하고 있으며, 이를 올해 최대의 투쟁목표로 설정하고 있다.4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FTA)을 반대한 것도 쌀시장 개방을 막기 위한 기싸움의 성격이 짙다. 농민들이야 자신의 생존권이 달려 있는 문제라 절박할 수밖에 없지만, 정부나 정치권은 ‘우는 아이 젖 주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지는 않은지, 관련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써비스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이에 편승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정부는 당초 한·칠레 FTA를 추진하면서 농업·농촌 지원을 위해 4대 특별법을 마련하고 2004년에 1조575억원의 예산을 책정했다. 그러나 국회에서 비준동의안이 7개월 만에야 통과될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정부는 앞으로 5년간 1조700억원 규모의 추가지원을 약속함으로써 지원액이 대폭 불어났다. 비전과 계획 없이 지원액수가 결정되니 ‘시위 한번에 얼마씩’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정부에서 내놓은 쌀산업대책이 시행되면 개방을 확대하더라도 전체 벼 재배면적은 2013년 80만ha 수준, 자급률은 90% 수준을 유지한다는 말이 잘 믿어지지 않는다.5

우리는 온 나라를 들끓게 했던 UR 협상과정을 기억한다. UR은 한국농업의 파멸을 가져올 것이므로 막아야 한다고 했고, 또 유럽이 반대하므로 농업무역의 자유화는 합의될 수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쌀시장은 외국에 양허할 수 없다는 것이 지배적인 분위기였다. 당시 대통령도 “직을 걸고 막겠다”고 공언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은 결국 합의에 도달했고 WTO체제는 마침내 출범했다. 농업무역에 있어서 예외없는 관세화 원칙이 확립되었다.

그렇게 되자 한국은 쌀을 지키는 방향으로 열정을 쏟았다. 그 결과 한국은 2004년까지 쌀의 관세화를 유예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문제를 잠시 회피했을 뿐이었다. 시장이 아닌 국회에서 쌀값이 결정되는 동안 국내외 가격차는 4~5배로 더욱 확대되었고, 쌀 소비가 감소하고 수입이 증가함으로써 재고가 누증되었다.6이러한 상태에서 2004년이 찾아왔다. 쌀 관세화 유예의 연장 여부를 둘러싼 협상에 나서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3) 뉴라운드 쌀협상의 예상되는 결과

농업 관계자 대부분은 이번 쌀협

  1. 전국농민회(전농)·한총련 등은 2003년 농학연대사업의 핵심과제로 WTO에 의한 개방 반대(한·칠레자유무역협정 국회비준동의안 부결,WTO 교육시장 개방 반대), 멕시코 칸쿤에서 개최되는 DDA(도하개발아젠다) 협상을 무산시키기 위한 총궐기 등을 제시한 바 있다.
  2. 필자가 주장하는 경제모델의 이념은, 한반도(남북한) 전체가 전쟁과 빈곤으로부터 위협받지 않도록 사회적 차원에서 연대성을 발휘하고 공공적 이익의 추구는 시장질서와 상호보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일영·전병유 「개혁 이후의 경제개혁: 신진보주의 경제모델 구상」, 『동향과 전망』 2004년 여름호(통권 61호), 한국사회과학연구소·박영률출판사 2004 참조.
  3. 장하준(張夏準) 교수는 기존 선진국의 ‘사다리 걷어차기’(kicking away the ladder)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후진국의 발전을 진정으로 돕는 새로운 세계경제질서의 수립을 앞장서서 추진할 수 있는 것은 한국밖에 없다고 주장한다(『오마이뉴스』 2003.8.19). 그러나 필자는 한국의 능력이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4. 전농은 식량주권운동을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우리는 대한민국이 독립된 나라임과 식량주권국임을 선언하고 이를 세계 만국에 알리어 식량은 민족의 생명이고 외세의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결정할 주권임을 분명히 한다. 오늘 우리는 식량자급률 26.9%(쌀 제외시 5%)의 엄혹한 현실과 남북분단 60년이라는 민족적 위기 앞에 세계화의 가면을 쓰고 쌀개방을 강요하는 강대국들의 식량무기화에 당당히 맞서기 위해 식량주권 수호를 선언한다.”(http://junnong.org/ 2004rice.htm)
  5. 농림부는 올 2월 ‘쌀산업 종합대책’을 발표하면서, 장기적인 쌀산업의 안정을 위해 생산·유통·소비는 시장원리에 따라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는 한편, 정부는 식량안보의 확보, 농업의 공익적 기능 유지, 시장감시 및 소비자 보호, 농가소득의 안정에 집중한다는 기본구상을 제시했다(농림부 「쌀산업 종합대책」,2004.2).
  6. 쌀 재고는 1996년 169만석에서 2002년 1040만석,2003년 763만석으로 증가했으며,2004년 말 재고는 678만석으로 전망되고 있다(농림부 「쌀산업 종합대책」,20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