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인터뷰

 

한국문학은 살아 있다

소설가 황석영과의 대화

 

심진경 沈眞卿

문학평론가. 저서로 『여성, 문학을 가로지르다』 『한국문학과 섹슈얼리티』 등이 있음.

 

황석영 黃晳暎

소설가. 장편소설 『장길산』 『무기의 그늘』 『오래된 정원』 『손님』 『심청』 『바리데기』, 소설집 『객지』 등이 있음.

 

ⓒ이영균

 

黃晳暎
소설가. 장편소설『장길산』『무기의 그늘』『오래된 정원』『손님』『심청』『바리데기』, 소설집『객지』등이 있음.

‘한국문학의 신화’로 불리는 황석영 선생과의 인터뷰는 사실 나에게 상당한 부담이었다. 그와 나는 여러가지 면에서 달랐는데, 우선 세대가 다르고 경험이 다르며 무엇보다도 성(sex)이 달랐다. 아마도 이러한 다른 점 때문에 내가 그와의‘도전인터뷰’를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같은 이유로 그에게‘도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직접 만나본 그는 생각보다 젊고 유쾌하고 또 진지했다. 그런 모습은 그에 대한 공격준비로 잔뜩 긴장한 나의 의지를 한풀 꺾었고, 자신을‘여리디여린 사슴’에 비유하면서 권위적인 마초와는 거리가 멀다고 말하는 대목에 이르러서 나의 모종의 의지는 두풀 이상 꺾였다. 그는 나의 평론가다운 딱딱하고 다소 공격적인 질문을 소설가다운 입담으로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서 쫙쫙 늘려놓았다. 그렇게 가지를 치기도 하고 샛길로 빠지다가도 다시 중심으로 치고 들어오는 기예에 가까운 그의 얘기에 넋을 빼앗기다가 결국 인터뷰는 끝나고 말았다. 나는 인터뷰 내내 입은 다물고 귀만 열어둔 셈이다. 그러니 도전이 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나의 원래 생각과 계획을 무력하게 만들어버린 이 인터뷰는, 즐거웠다.

 

자발적으로 난민 되기

 

沈眞卿문학평론가. 저서로『여성, 문학을 가로지르다』『한국문학과 섹슈얼리티』등이 있음.

沈眞卿
문학평론가. 저서로『여성, 문학을 가로지르다』『한국문학과 섹슈얼리티』등이 있음.

심진경 이번에 장편소설 『바리데기』를 출간하셨는데, 독자들한테 꽤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하네요. 전작들도 그랬지만 특히 『바리데기』는 선생님의 해외체류 경험이 녹아 있다고 봅니다. 선생님의 유랑생활이 처음엔 어쩔 수 없이 시작된 것이었다면, 지금은 오히려 선생님께서 자발적으로 디아스포라를 실천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요. 『심청』과 『바리데기』라는 디아스포라 문학의 출현 또한 최근까지의 빠리, 런던 체류 경험을 포함한 선생님의 탈국적 삶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생각하시는‘디아스포라’란 무엇인지요. 탈국적 삶을 선택하신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요.

황석영 먼저 용어를 정리합시다. 난 그‘디아스포라’라는 말이 애매해서 싫어요. 난민, 이주, 이렇게 하면 정확해질 것을 굳이 유대인이 어찌어찌 됐는데 해가며 디아스포라라는 말로 애매모호하게 흐리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신식민지 하면 개념이 더욱 정확해질 텐데 탈식민지라고 해서 흐리고…… 아마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쪽에서 연구비도 주고 하니 그것과 타협할 수밖에 없겠지요. 주로 미국 쪽에 그런 경향이 왕성한데요, 그런 한계 안에서 학자들 스스로 애매모호하게 흐리고 가는 거죠. 그래서 그냥 난민 아니면 이주, 이렇게 구체화하는 게 좋아요.

팔자인지 업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우연히 그렇게 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스스로 그런 길을 찾아가기도 했어요. 이를테면 70년대에 『장길산』을 쓰면서, 당시에는 전위냐 현장이냐 하는 논쟁도 있었지만, 나는 물론 작가니까 지금도 벽지나 다름없는 해남으로 내려가버렸거든요. 전통적인 농촌을 모른다는 약점을 스스로 보완하려는 뜻도 있었겠지요.

해외체류 경험을 얘기한다면 첫번째가 베트남입니다. 그때는 한반도 남쪽에서 외국에 가보기가 힘들었어요. 어느 정도냐면 내가 고등학생 때 어떤 사람이 국무부 초청으로 미국에 15일 다녀왔다고 여러 학교를 다니면서 미국 갔다온 얘기를 강연하더라고요. 베트남이 최초로 바깥에 나가본 세상인데, 그게 청년기에 큰 영향을 주었겠지요.

얘기를 두서없이 하게 되는데 제게 몇번의 변화의 계기가 있어요. 이를테면 고등학교 2학년 때 『사상계』 신인상을 받고 나서 8년 뒤에 「탑」이라는 단편을 조선일보에 발표했는데, 그사이에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고 엄청나게 많이 썼어요. 잡문을 발표하기도 하고. 이게 재고품으로 쌓여 있다가 나중에 급해지면 그것도 고쳐서 내놓곤 했으니까요. 김현이 내 2년 선배인데 한번은 그랬지요. “야, 「객지」를 쓴 사람이 어떻게 느닷없이 「가화(假花)」 같은 걸 쓰냐?” 그건 이십대 초반에 썼던 것이죠. 아주 탐미적이고 개인주의적이고 내면을 찾아 헤매는 그런 기간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베트남에서 완전히 변해서 돌아오지요.

그때 사회와의 접점을 찾기 시작하는데 베트남에서 돌아와 한참 고생했어요. 자다가 일어나서 포복을 하기도 하고, 동생 머리를 화병으로 내리쳐서 스무 바늘이나 꿰매기도 했지요. 어머니가 목사를 불러다가 안수기도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고 나서 다시 소설을 써야겠다고 하고 있는데 바로 그 무렵에 전태일(全泰壹)이 평화시장에서 분신을 합니다. 사실 베트남전쟁과 전태일이 만나서 「객지」를 이룬 셈이죠.

그다음에 광주에 내려가서 광주항쟁을 겪게 된 일도 중요했는데, 거기서 진작에 알게 된 게 있지요. 작가에게 자유란 뭔가? 광주에서 비겁하게 살아남은 데 대한 중압감도 있었겠지만 그후에 우리가 얼마나 서로를 괴롭혔습니까? 사실 그때 좌절하고 때려치웠을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도 두가지가 나를 지탱시켰어요. 하나는 『장길산』을 끝내겠다는 소망이었고 하나는 문화운동이었어요. 그래서 일상적으로는 연재소설을 쓰면서 인형극이라든가 남사당놀이라든가 탈춤 판소리 같은 전통연희의 원형들을 현장 마당극에 접목하는 형식실험을 많이 했지요. 그때 농촌과 노동 현장에서 50여편 이상의 대본을 공동창작으로 썼을 거요. 그 두가지 일감이 작가로서의 자기를 지킬 수 있었던 버팀목이 되어주었지요. 그러다가 광주 이후 북(北)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도 타자가 아니라 또 다른 자기라는 생각으로 방북을 하게 됩니다. 내가 남과 북이라는 분단이 주는 중압감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면 앞으로 문학도 시원스럽게 해내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이 들었습니다. 남과 북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서본 것은 작가로서 귀중한 체험이었어요.

 

바깥에 서서 안을 그리워하는 경계인

 

내게 자유란 오래전부터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살아온 인생체험 자체라고 해야 될 겁니다. 어려서부터 전학 많이 다니고 노동자 구역의 공장지대에서 혼자 놀고 사춘기 때는 퇴학 맞고…… 쫓겨났다고 생각하면서 중심부에 안 들어가는 거죠. 중심부에 들어가면 내가 못 견디거든요. 그러니 늘 바깥에 있고, 바깥에 있으면서 저 안을 그리워하고. 어떤 친구가 자칭 경계인이라고 하던데 나는 그런 의미에서 정말 경계인이에요. 늘 소속되지 않은 자의 그런 자유와 억압에 대한 긴장감이 있어요.

심진경 중심부에 들어가면 못 견디면서도 바깥에서는 저 안을 그리워한다는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한국에서는 가장 권위있는 문단의 어른이면서도 한반도라는 자기 권역 내에 안주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자기 몸을 바깥으로 밀고 나가려는 노력이 선생님의 문학적 동력이지 않았나 싶네요. 그러면서도 바깥에서 한반도 안을 들여다보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으시고…… 그러한 노력이야말로 세계라는 원심력에 이끌리면서도 한반도라는 구심력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긴장감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이 두번째 장기 해외체류였죠? 첫번째 해외체류는 방북 이후 귀국하지 못한 채 미국과 베를린을 떠돌아다니실 때였는데, 그 무렵은 어땠나요?

황석영 아까 시대마다 자기의 변화과정을 얘기했지만,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는 현장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허물어진 장벽 사이로 몰려나온 동서 베를린 시민들이 환호하고 서로 껴안고 노래 부르고 그러는데, 나는 그 사람들을 바라보면서‘아름다운 개인’을 발견하게 되죠. 그때 세계는 변화할 것이라는 전망과 지금까지의 리얼리즘적 기획이나 산문도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담은 창작노트가 남아 있습니다. 이를테면 표어처럼 스스로 언명했는데요,‘현실주의적 서사를 우리 형식에 담는다’고 했지요. 여태까지의 산문의 형식을 해체해버리겠다는 과감한 표현도 썼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감옥살이를 하면서 그 속에서 정말 치열한 일상과 대면하죠. 황아무개는 모험에 강하고 위험한 걸 잘 견디고 재밌어하거든.(웃음) 근데 아무 짓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게 미치는 거거든요. 독방 안에서 다섯해 동안 일상을 배우게 되는데 그때 나름대로의 내공이 쌓인 것 같아요.

하여튼 독일 체류시절은 정말 외로웠어요. 아주 절친했던 이들도 베를린에 왔다가 겨우 전화통화나 하고 지나갈 정도였지요. 나를 만나면 큰일 나니까. 어느 국가나 사회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고 결정된 망명자도 아니고, 지명수배 기간을 베를린과 뉴욕에서 5년 가까이 보냈는데 정말 외롭더군요. 그때 알았어요. 나는 남도 북도 아니고 국가의 구성원도 아니다. 그때 국가로부터 왕따당했다는 실감과 함께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를 접어버린 것 같아요.

그러고는 사회로 돌아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건 물론 과거의 기억들을 정리한 것들이지만…… 다시 세계를 확인하고 싶어졌어요. 왜냐하면 그때는 냉전 해체와 세계사적 변화가 막 시작됐는데 당시에는 쫓겨난 자로서 자유스럽지 않은 시절에 서구를 봤다면, 지금은 어떨까? 반드시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싶었죠. 그럴 뿐만 아니라 심리극 용어에‘역할 바꾸기’라고 있지요? 또 자기 거처를 떠나서 바라보기를‘거리감’이라고도 얘기하는데, 지금 서구 작가들 중에 내 친구들을 보면 거의 서로가 도시를 바꿔서 살아요. 예를 들어 베를린에 살던 작가는 로마에 가 있고, 런던에 살던 작가는 그리스에 가 있고, 빠리에 살던 작가는 남미에 가 있고, 뉴욕에 살던 작가는 바르셀로나에 머물고. 이렇게 거처를 바꾸어 살지요. 근데 이게 아주 신선한 게 있어요. 왜냐하면 거기에 가면 아무도 자기를 모르거든. 말하자면 스스로가 낯선 곳에서 타인이 되는 창조적 긴장이 생겨나지요. 또한 큰일이 벌어지는 서구의 대도시에 머물기 때문에, 뭐랄까 시대정신이 물결쳐 지나가는 것을 포착할 수가 있어요. 잘 보이지요. 반대의 경우도 있지만 결국 동기는 비슷합니다. 친구 르끌레지오(Le Clézio)한테 너는 왜 빠리를 싫어하냐 했더니 자기는 빠리에 가 있으면 오히려 유럽이 안 보인대요. 오지에 가야 유럽이 잘 보인다는 거예요.

 

작가의 조국은 모국어

 

심진경 달리 보면 선생님의 해외 망명시절은 그야말로 남도 북도 아닌, 제3국에서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방북 이후 남과 북 모두로부터의 거리두기는 선생님 말씀처럼 한반도 상황을 아주 리얼하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황석영 망명시절에 북과 남을 둘다 벗어났는데, 못 견디겠더군요. 내가 당시에 정신적으로 국적이 없었다는 건 뒤집어 얘기하면 나는 대한민국 사람도 아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람도 아니다, 이런 뜻입니다. 르끌레지오가 한 수 가르쳐 준 말이 있었는데 나도 진작에 한 수 보탠 것이 있어서 맞교환하기로 했어요. 즉 작가라는 존재는‘민족이나 국경에 구애받지 않는다. 작가의 조국은 모국어이니까’라는 근사한 말이었지요.

이런 일화가 있어요. 베를린 체류시절, 허리에 디스크가 와서 윤이상(尹伊桑) 선생의 권유로 북한에 들어가 5개월 이상 물리치료를 받았거든. 그래서 김일성 주석을 여러번 만나게 됩니다. 내가 평소에 재미있는 얘기를 좀 할 줄 알잖아요.(웃음) 말년의 그분이 얼마나 심심하겠어요? 맨날 앉아 있다가 외교사절 오면 사진 한번 찍고 들어와서 텔레비전 드라마 보고…… 내가 가면 말동무가 되니까 좋아하고. 이 양반이 어느날 그러는 거예요. “황작가는 미국에 간다고 하는데, 컁구단(갱단)도 많다는데 미국엔 왜 가나? 나하구 살디.” 그러면서 민촌(民村) 이기영(李箕永) 선생 얘기를 꺼내는데, “내가 벽초(碧初) 선생한테 도와달라구 부탁했더니 벽초 선생은 당에 들어와서 우리를 많이 도와주셨디. 민촌 선생한테도 도와달래니까 그저 글만 쓰갔대. 섭섭하지만 글만 쓰겠다니 어떡하겠나? 그래서‘선생님, 내가 뭘 도와드리면 되갔습네까?’했더니 과수원이나 하나 달래. 기래서 알아보라구 했디. 기랬더니 저 순안 가는 길에 복숭아 과수원이 한 3천평이 있다구 기래. 민촌 선생이 거기에 가서 글 쓰셨디. 근데 1년 만에 농사를 지어왔댔는데, 문인들이 참 게으르긴 게으르더만……”“왜요?” 물었더니 “복숭아를 한 광주리 따왔는데 절반이 썩어서.” 그러는 거예요.(웃음)

그 얘기의 요지가 뭐냐면 집필을 하려면 그냥 여기에서 살지 왜 가려고 하냐는 거지요. 그래서 측근들이 전부 눈치를 챈 거죠. 황아무개를 잡아놔야겠구나. 그래서는 여권이고 뭐고 다 숨겨놓고 못 나가게 하는 거예요. 안되겠더라고…… 내가 북한의 주요 간부에게 얘기했지요. 내가 보기에는 월북자나 월남자는 결국은 양측에서 분리주의에 종사하게 된다. 나는 내 문학으로 보더라도 차라리 붓을 꺾을지언정 결단코 분리주의를 안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북에 남으면 결국은‘식객’아닌가? 나와 내 문학은 남한 역사와 사회의 산물이다. 내가 내 독자들에게 돌아가야 통일에 보탬이 되지 여기서 식객이나 하고 있으면 무슨 보탬이 되겠냐? 나는 나가겠다, 그랬더니 “그건 아우님 말이 맞아. 내가 토론하갔시요” 그래서 겨우 나오게 됐어요. 그 얘기를 나중에 최원식 교수에게 했더니 토끼가 용궁 갔다왔다고 하는데,(웃음) 여하튼 그때 긴 시간 있는 동안 남한 군사독재 시절에 못지않은 북한의 경직된 국가주의를 봤어요. 베를린에 있는 동안에, 아까 탈국가 얘기도 했지만, 그때 일단 아주 냉정해졌어요. 냉정해지면서 스스로 어느 이데올로기로부터도 놓여났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심진경 재미있는 얘기네요. 바깥에서의 시선이 한반도의 상황을 좀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에 선생님께서 전(傳)이나 무가(巫歌), 굿 같은 전통적인 서사양식을 가져와서 소설창작에 접목하는 작업은 바깥의 시선으로 한반도의 양식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비록 그런 서사양식이 한반도 내에서는 익숙한 것일지라도‘세계 속의 한반도’라는 관점에서는 새롭게 구성되고 평가받을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런데 그런 형식이나 내용이‘세계 속의 나’라는 관점에서는 새로울 수 있을지 몰라도 한반도에서 쭉 살고 있는 저에게는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낯익고 손쉬운 방식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게다가‘세계 속의 나’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전유된 전통적 서사양식이 의도와는 다르게 한반도에 대한 익숙한 클리셰를 반복할 우려도 있을 것 같아요. 예컨대 식민지 조선이 제국 일본의 잡지에 소개될 때 물레방아라든가 한복 입은 여인네 등 몇가지 상투적 이미지로만 그려지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위험도 있지 않을까요?

황석영 내가 감옥에서 나오면서 했던 인터뷰에서도 밝혔는데, 구한말의‘동도서기(東道西器)’를‘서도동기(西道東器)’로 바꾸어 생각하자는 농담반 진담반의 말에서도 엿볼 수가 있겠네요. 김지하(金芝河)는 이를 다시 동도동기(東道東器)라는 말로 바꾸었지만. 여기서 물론 내가 생각하는 서사나 이제까지의 작품이 일제 치하의 향토주의나 검열하의 중국 현대문학의 한 분야처럼 민속주의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황아무개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으로 독법에 차질이 없기를 바랍니다. 지난 시대에 대학가에서 탈춤이나 농악 공연을 하면 그것 자체로 불온한 것이었지요. 이미 당시의 대학가는 서구 교육의 전당이었고 서구적 소비문화의 최일선이었기 때문이에요. 지금은 이십여년 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나아지지 않았다고 봅니다. 우리는 모두 현대 서구인입니다. 심선생에게는 익숙하고 안이하게 보일지 몰라도…… 언젠가 이문구(李文求)의 소설을 대학에서 읽혔더니‘오히려 포스트모던’하게 받아들이더라는 누군가의 농담이 생각나는군요. 『돈 끼호떼』가 요즈음 새삼 기억되는 것은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되던 당시에 고전을 형식적으로 패러디했던 관점이 획기적이었기 때문이지요. 말하자면 하나의 전략이기도 합니다.

서구인들이 자기들 삶의 방법대로 해가지고 우리에게 내민 것을 근대문학이 들어오면서 우리가 일방적으로 받아먹었지요. 서구에서 작가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