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2000년대 한국문학이 읽은 시대적 징후

 

한국문학의 새로운 현실 읽기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주요 평론으로 「지구화시대의 세계문학」 「대중문화 속의 소설과 영화」 「우리 시대의 사랑·성·환경 이야기」 등이 있음. englhkwn@ijnc.inje.ac.kr

 

 

1. 새로운 현실과 시기구분의 문제

 

2000년대 한국문학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현실을 어떻게 읽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는 무엇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현실인가, 그리고 새로워진 우리 문학이 이 새로운 현실을 어떻게 읽고 있는가라는 이중의 물음이 내포되어 있다. 이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것은 2000년을 전후하여 새로운 경향의 신예작가들이 대거 등장하고 90년대 이전 문학세대 역시 주목할 만한 예술적 자기쇄신을 보여주면서 우리 문학의 지형이 크게 바뀌고 있는데, 그것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 문학의 전망에 대해 검토하면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전망의 문제는 새로운 현실과 새로운 문학 양자를 어떻게 보느냐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2000년대 문학의 지형변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 우리 문학의 전망을 특별히 어둡게 볼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다. 90년대 이후 문학세대만 따지더라도, 우리 문학사에서 지금처럼 작가들의 층이 두텁고 개성적인 스타일의 작품들이 많이 생산된 적이 있었는가 싶기 때문이다. 물론 2000년대 문학의 전망을 마냥 낙관할 일은 아니다. 문학의 환경이 점점 나빠지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특히 자본주의의 상품논리가 극에 달한 것으로 보이는 시대에 2000년대의 자유분방한 문학이 이렇다 할 대안적인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김명인(金明仁)이 다소 극단적으로 한국문학을 옥죄는 ‘이중의 악몽’을 거론한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밖에서 오는 악몽’이 영화나 인터넷 콘텐츠 같은“문학 아닌 다른 것들이 이제까지 문학이 차지해왔던 문화적 위의(威儀)를 잠식하고 있는”상황이라면, 이를 자초하는 ‘안에서 오는’악몽은“파편화, 왜소화, 쇄말화로 요약될 수 있는 문학의 자기위축 혹은 자기모멸”이라고 진단한다.1 김명인이 이런 진단을 내놓을 당시에는 2000년대 문학의 지형변동을 충분히 고려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2002년의 김명인만이 비관적인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2000년대의 ‘젊은’소설들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김형중(金亨中)과 김영찬(金永贊) 같은 젊은 비평가들 역시 뜻밖에도 한국문학의 전망을 어둡게 보고 있다. 이들이 어두운 전망을 갖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역사나 현실을 보는 눈이 너무 작거나 커서 중간치의 시야가 포착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령 이들은 상품논리에 깊이 침윤된 2000년대 한국의 (대중)문화적 현실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미세한 눈을 가진 반면, 현실의 여러 층위들을 나누어 보지 않고 하나로 뭉뚱그려 ‘자본주의’(혹은 ‘후기자본주의’)라는 통칭으로 호명한다. 김영찬이 ‘역사의 간지(奸智)’대신“자본의 간지”혹은“후기자본주의의 가혹한 간지”를 거론하면서2 자본주의의 막강한 현실적·담론적 힘과 ‘무력한 개인’을 대비할 때가 그렇다. 그리고 김형중이“한국 현대소설사 백년을 통틀어 지금처럼 소설이 위기에 처한 시절은 없었다. 왜냐하면 가장 강력한 적수, 자본주의가 바로 그 위기의 원인이기 때문”3이라고 경종을 울릴 때도 그렇다.

여기서 자본주의라는 보편적 체제만을 문제삼는 것은 관념적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자본주의인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때의 (후기)자본주의가 ‘한국 자본주의’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한반도의 남쪽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2000년대에 주목할 만한 작가들이 상상의 지평을 동북아로, 세계로 확대하고 있는데, 이런 협소한 시각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 다른 한편 이것이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너무 시야가 넓어서 그것이 한반도나 동북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가 역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시야의 사각지대에서 지금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반세기 동안 유지되어오던 분단체제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문학의 장래에 중대변수가 되지 않을까. 요컨대 우리 시대 문학의 가능성을 균형있게 진단하려면 한국의 분단현대사에 획기적인 2000년 6월사건의 중차대한 의미를 놓칠 수 없고, 이를 빼놓고 ‘새로운 현실’을 논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2000년대 문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제기되는 물음, 즉 2000년대 문학의 기점에 해당하는 역사상의 계기를 무엇으로 잡을 것인가라는 물음과 직결된다.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가르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1997년의 IMF사태와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 6·15공동선언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양자 모두 충격적인 사건인데, 한반도 남녘 사람의 일상생활에 직격탄을 날린 쪽은 전자이지만 한반도 주민 전체의 장래에 더 결정적인 사건은 후자이고, 그런만큼 후자를 2000년대 문학의 기점으로 삼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양자가 서로 무관한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는 점도 덧붙일 필요가 있다. IMF라는 국가적 재정파탄에 직면한 남녘 사람들은 위기극복에 합심하여 상당한 출혈을 감수하면서 어렵게 위기를 넘어섰는데, 이때 발휘된 국민적 저력을 바탕으로 남북관계에 획기적인 6·15선언을 이뤄낸 것이다. 이렇게 심각한 위기를 경이로운 성공으로 전화한 역사적 과정이 2000년대의 현실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은 2000년대 문학을 논하는 자리에서도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이다.

2000년대 한국문학 전반에 ‘직접적’인 흔적을 많이 남긴 쪽은 물론 IMF사태의 후과랄 수 있다. 가령 IMF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정책이 시행되면서 한국경제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더 깊숙이 편입되었는데, 그로 말미암은 양극화의 심화·고착화 현상을 2000년대 문학에서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다. 가령 갑작스런 해고사태와 비정규직의 빈번한 등장도 IMF사태의 여파가 반영된 것일 터이다. 2000년대 문학에 자주 나타나는 험악한 사회 분위기라든지 등장인물의 가혹한 심리상태 역시 IMF사태가 끼친 영향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에 비해 6·15공동선언이 2000년대 문학에 직접적으로 남긴 흔적은 제한적이다. 이 선언의 결과로 남녘 사람들의 방북 기회가 늘어나고 있지만 남북의 경계를 넘는 일은 아직 일상생활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만큼 이를 소재로 하는 작품도 그리 많지 않지만, 최근 들어 점차 늘어나는 추세인 것은 분명하다.

좀더 중요한 것은 이런 소재주의적 관점을 넘어서 한국문학의 심층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6·15의 관점에서 되새겨보는 일이다. 6·15로 시작된 한반도 전체의 역사적 변화는 남녘 사람들의 일상생활상의 실감을 넘어서기 때문에 좀더 심층적인 분석과 고차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여기서는 한두 가지만 짚고자 한다. 일단 남녘 사람들(특히 젊은 세대들)에게는 IMF사태가 6·15선언보다 훨씬 충격적으로 느껴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두 사건으로 말미암은 중장기적인 변화를 비교하면 6·15선언 쪽이 훨씬 심대할 것이다. 다만 당장 표층에서 드러나는 변화는 빙산의 일각이기 때문에 남녘 사람들이 변화의 심대함을 충분히 실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술가나 작가의 경우는 이런 심대한 변화에 알게 모르게 반응할 공산이 크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6·15사건 자체가 지닌 파격성 혹은 전복성이다. 도저히 범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던—범하는 즉시 국보법으로 잡혀가던—남북의 경계를 남북의 정상 스스로가 돌파한 이 사건은 기존의 사고방식으로는 상상불허의 파격이자 극적인 전복이다. 최대의 금기가 돌연 최고의 성취로 둔갑하는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6·15가 남녘 사람들의 사유와 상상력을 크게 자극한 것은 분명하고, 어쩌면 우리 내부의 억압적 경계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분단과 경계를 당연시해온 기존의 역사가 일순간 거짓말처럼 변해버리는 이 경험을 겪은 후엔 적어도 상상력으로 넘지 못할 경계는 없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넘는 일은 치밀한 사유와 냉정한 현실적 판단을 요하는데, 남북의 경계를 제대로 넘으면 평화와 상생이지만 제멋대로 넘으면 아직은 전쟁과 공멸을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6·15선언에 담긴 합의문의 골자가 남북의 경계를 지혜롭게 넘는 방법이랄 수 있으니, 통일을 서둘러 하지 말고 지금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하자는 것에 다름아니다. 슬그머니 진행되는 통일의 과정에서만이 한국사회 내부의 수많은 억압적 경계들을 돌파하면서 삶의 질을 높이는 민주주의 개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 내부의 억압적 경계를 돌파하면서 개혁을 수행하는 일은 한반도 주민이 통일 후에 얼마나 나은 삶을 누리게 될지를 좌우하는 중대사이며, 6·15시대의 핵심과제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경계에 대한 사유와 상상력의 단련은 한국사회 내부의 온갖 경계를 극복하는 데도 관건이 된다고 본다. 이주노동자가 늘어나면서 생겨나는 인종주의적 경계, 남녀 차별을 지속시키고 은폐하는 가부장제나 주류문화와 하위문화를 가르는 문화적 경계를 넘는 일에도 그 나름의 상상력과 사유의 단련이 요구된다. 2000년대 문학에서 이처럼 온갖 경계에 대한 사유와 상상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면, 그 의미를 ‘6·15시대’라는 역사적 관점에서 새기는 것이 뜻깊고 실속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 글 자체는 이런 작업에 대한 하나의 작은 시도일 뿐이다. 2000년대 문학의 일단을, 그것도 몇몇 주목할 만한 소설을 중심으로 간단히 검토할 이 글이 그 가능성의 한 자락만이라도 보여준다면 다행이겠다.

 

 

2. 문학적 지평의 확대와 2000년대 젊은 소설의 ‘새로움’

 

세계화의 조류와도 무관하지 않겠지만 6·15 경험 이후 우리 문학에서 경계 넘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은 외형적으로도 확인이 된다. 우리 작가들이 소설의 공간을 동남아와 유럽 등으로 넓혀감에 따라 그 사유와 상상력의 지평이 여러 국경/경계를 넘어 크게 확장되고, 그럼으로써 한반도 남쪽의 반국적 시야에서 빠른 속도로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는 방현석의 「존재의 형식」(2002), 이대환의 『붉은 고래』(2004), 공지영의 『별들의 들판』(2004), 전성태의 「국경을 넘는 일」(2004) 「코리언 솔저」(2005) 「강을 건너는 사람들」(2005),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2005년 『파라21』 연재), 정도상의 「소소, 눈사람이 되다」(2006)처럼 외국의 경험을 통해 분단의 상처와 그 경계를 넘는 일의 의미를 의식적으로 되새기는 작품들도 적지 않다.

남북분단이나 국가의 경계를 특별히 의식하고 씌어졌다고는 할 수 없되 6·15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큰 소설도 상당수다. 가령 김영하의 『검은 꽃』(2003), 배수아의 『에세이스트의 책상』(2003), 김연수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2005)와 김인숙의 『그 여자의 자서전』(2005), 그리고 소설 공간의 국적이 불분명하거나 의도적으로 애매하게 처리되는 배수아의 『훌』(2006)이나 현재 연재중인 강영숙의 『리나』 등 역시 국경이나 내면의 여러 경계를 넘는 일과 관련해서 의미심장한 울림을 갖는다 하겠다.

우리 안의 외국이랄 수 있는 이주노동자의 문제를 다룬 소설도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한다. 이 문제는 국적과 언어가 다른 외국인과 한국인, 혹은 언어는 같아도 국적은 다른 해외교포와 한국인의 결혼과 연관되고, 또 그로 인한 혼혈 2세와 다인종·다민족·다국적 가족의 문제와 겹쳐 있다. 이런 현상은 주로 세계화시대 한국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생존 전략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인종적·국민적·민족적 경계의 횡단과 관련이 있다. 이 다층적 경계를 제대로 넘는 일이 장차 통일한국의 국가적·민족적 성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점에서 6·15시대에 각별한 의미를 띤다. 이주노동자 문제를 반세계화적·생태주의적 관점에서 그려낸 박범신의 『나마스테』(2005), 장애인 문제와 겹쳐놓은 이명랑의 『나의 이복형제들』(2004), 민중적 관점에서 천착하는 김재영의 『코끼리』(2005), 그리고 남한남자와 결혼한 중국조선족 여인의 비극을 다룬 천운영의 『잘 가라, 서커스』(2005) 등은 적어도 소재 면에서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들이다.

물론 앞의 세 부류 가운데 어디에 속하든 소재나 주제 상의 혁신성이 작품의 예술성이나 당대성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못한다. 어디까지나 빼어난 언어와 상상력, 깊이있는 사유가 작동할 때만이 여러 경계들로 짜여진 우리 시대의 새로운 현실에 적실하게 대응하는 새로운 예술에 값할 것이다. 이 가운데 주목할 만한 작품들은 뒤에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2000년대 신예작가들의 문학적 특성이나 ‘새로움’에 눈길을 돌리고자 한다. 이들 작가들의 작품을 일일이 논하기에는 능력이나 지면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밝힌 몇몇 평자들의 견해를 논평하는 방식을 취하고자 한다. 2000년대 문학의 특징을 ‘무중력 공간의 탄생’에서 찾는 이광호(李光鎬)의 견해를 먼저 살펴보자.

 

2000년대에 와서 공식적인 글쓰기를 시작한 작가들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정치적 죄의식과 역사적 현실의 중력과는 무관한 자리로부터 글쓰기의 존재를 설정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가령 이런 새로운 글쓰기의 자리를 ‘무중력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데, 이때 ‘무중력 공간’은 90년대 문학의 주체들이 문화적으로 투쟁했던 것과 같은 방식의 ‘무엇으로부터’의 환멸과 저항의 전선을 설정하지 않는다.4

 

이것이 2000년대에 등단한 상당수 작가들의 내면성향이나 심리상태를 기술한 것이라면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글쓰기의 존재를 설정’한다는 이상한 논법에서 감지되듯 이 발언의 요지는 그게 아니다. ‘무중력 공간’이란 2000년대 등단작가들의 심리적 공간에 그치지 않고 ‘2000년대 문학공간’이라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담론적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2000년대 작가들의 세대론적 심리경향을 어물쩍 2000년대 문학의 특성으로 차용하는 방식은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작품 읽기에서 상당한 선입관으로 작용할 수 있다. 2000년대 문학작품들을 실제 이상으로 탈현실적이고 탈역사적인 맥락에서 읽기 쉽다는 것이다.

가령 이광호가 2000년대의 유망작가로 꼽은 김중혁 편혜영 서준환 한유주 김애란 조하형 천명관 가운데, 우선 김애란은 그의 발상에 전혀 들어맞지 않는 작가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IMF이후 한국사회의 가혹한 현실을 김애란만큼 실감나고 깊이있게 그려낸 작가는 흔치 않다. 그의 유망작가 명단에 들어 있지 않은 박민규 정도를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김애란은 80년대식 리얼리스트와는 달리 발랄한 상상을 보여주지만, 이를 두고 ‘무중력 공간’을 연상한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김애란은 상상이 현실의 구성성분이기도 함을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역사적 현실의 중력’을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그 압박에 주눅들지 않는 상상력을 보여주는 것이 김애란 소설의 매력이 아닐까.

김중혁(金重赫)은 이광호의 발상에 좀더 어울리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김중혁의 소설들이“미디어의 세계에 대한 문명적 차원의 ‘쿨하고도 진지한’상상력”을 보여주고“환경과 문명 그리고 인간 존재를 둘러싼 만만치 않은 ‘진지한 주제’들을 무국적인 상상력으로 다루”는 것(169면)도 어느정도 사실이다. 그러나“이런 소설적 문제설정은 한국적인 것의 특수성과 거의 무관”(같은 면)하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김중혁의 생태주의적 대안 모색이 성장제일주의로 일관해온 한국사회에 요긴하고, 그 점을 작가가 의식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용지물 박물관」과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는 이 시대의 시각중심·인간(자아)중심의 문명에서 우리가 상실한 감각이나 착각하고 있는 것들을 유연한 상상력으로 일깨워주는 의미심장한 소설로 읽힌다. 그의 소설의 밑바탕에 생태주의 문제의식과 아울러 근대/탈근대의 경계에 대한 사유와 상상력이 작동하는데, 흠을 잡자면 이런 탈근대적인 사유와 상상력도 근대 세계체제에 얼마든지 포섭될 수 있다는 자각이 미흡하다는 것이다. 그가 무국적/한국적이라는 경계를 너무 쉽게 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김영찬의 평론이 찾아낸 새로움은 우선 2000년대 젊은 소설 다수가“대중문화의 코드 그 자체에 몸 전체를 싣고 있”5는 현상이다. 이 현상에 대한 김영찬의 분석은 적절하고, 젊은 작가들의 소설들을 비평적으로 읽어내는 그의 예리하고 균형잡힌 독법은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그가 2000년대 젊은 문학의 가능성으로 ‘탈내면의 상상력’을 내세우고, 이를 가능케 하는 전제로 ‘무력한 자아’혹은 ‘빈곤하고 왜소한 주체’를 부각할 때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탈내면의 상상력’이라는 역설적 가능성이 아무리 소중하다 해도, 강영숙 윤성희 김애란 박민규 이기호 손홍규 편혜영 김중혁 박형서 김유진 등을 줄줄이 거론하며 그들의 주체들을 도매금으로 ‘무력’하다고 규정하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2000년대 젊은 문학의 자아는 대체로 처음부터 자기 자신의 현실적·정신적 무력함을 일종의 운명으로 내면화하고 있는 자아”6라는 김영찬의 주장은 부분의 성향을 전체의 성격으로 확대하고 절반의 진실을 입증된 사실처럼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2000년대 젊은 문학의 ‘탈내면의 상상력’이라는 가능성을 취하기 위해 ‘2000년대 문학의 자아’에 죄다 ‘무력함’ ‘왜소함’ ‘빈곤함’의 딱지를 붙이는 느낌이랄까. 그는 최근의 글에서도 ‘무력한 주체’혹은 ‘무력한 개인’을 수차례 거론하지만 어법상 미묘한 차이가 있다. 가령 김애란의 ‘편집증적 유머’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젊은 작가들의 이 편집증적 유머가 자아를 짓누르는 위압적인 현실의 위력을 거리화하고 분산시켜버리는 무력한 주체의 특징적인 상상전략 중 하나라는 것은 여기서 특별히 환기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2000년대 젊은 문학의 상상력이 현실의 중력을 나름으로 감당하고 소화하면서 그 속에 자아의 위치를 그리는 문학적 방식 가운데 하나다.7

 

“위압적인 현실의 위력”에 이 정도로 맞대응할 수 있는 주체에게 ‘무력한’이라는 꼬리표를 굳이 달 필요가 있을까. 김영찬이 ‘무력한/강력한 주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이들에게는 기댈 수 있는 어떤 관념적 거점도, 현실과 부딪치는 모험적 열정도, 자기파괴적 항의도, 냉소할 수 있는 여력도, 또 이를 떠받칠 수 있는 자아에 대한 강한 신념도 없다”8는 대목에서 나타나는데, 이때 ‘강력한 주체’가 ‘무력한 주체’보다 반드시 바람직한지도 의문이다. ‘관념적 거점’도 ‘자아에 대한 강한 신념’도 착각이라면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김애란과 박민규 소설의 화자의 ‘무력한’자아는 관념적 거품이 빠져 있는 자아이며, 자신을 끊임없이 응시하고 자각하는 자아이기도 하다. 자신과 타자와 세계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되 나름의 기발한 상상력을 발동하여 자기의 안팎을 끊임없이 타진하는 호기심 많은 자아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자아라고 해서 위압적 현실의 위력이나 편집증을 면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무력’해 보이는 자아에 이런 중요한 이면이 있기에 소위 ‘탈내면적 상상력’이 가능하지 않을까. 가령 김애란의 「영원한 화자」의 이런 독백을 새겨보라.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 자주 상상한다. 나는 나에게서 당신만큼 멀리 떨어져 있으니 내가 아무리 나라고 해도 나를 상상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상상하는 사람, 그러나 그것이 내 모습인 것이 이상하여 자꾸만 당신의 상상을 빌려오는 사람이다.(『달려라, 아비』, 창비 2005, 136면)

 

이런 자아를 ‘무력한 자아’혹은 ‘편집증적인 자아’라고 일면적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소설의 문맥에서 자연스럽게 읽히는 대목이지만, 곰곰이 새겨보면 ‘나’라는 변화무쌍한 아상(我相)에 대한 인식과, 자아와 타자의 관계/경계에 대한 사유가 범상치 않다. 이런 자아는 자기수련이 상당한 수준에 이른 자아일 수 있다. 자본주의의 가혹한 현실이나 주변부적인 삶의 횡포에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원한에 사로잡히지도 주눅들지도 않을 만큼 나름의 ‘중심’을 지닌 자아 말이다. 박민규와 김애란의 경우 외에도 무력하거나 편집증적인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성찰의 경지가 높은 자아를 2000년대 젊은 소설에서 종종 접할 수 있다. 김애란과 박민규 등 젊은 소설가들이 ‘지금, 여기’에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현실의 중력’을 온몸으로 겪으면서도 그 체제의 논리에 쉽사리 포섭되지 않는 주체들을 보여주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뜻깊다. 자본주의체제도 하나의 경계라면 경계인데, 이 경계가 당분간 무너지지 않을 때 대응하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작가들의 성취는 예사롭지 않다고 할 수 있다.

2000년대에 등단한 신예작가들은 남북의 경계나 국경을 넘는 일보다는 주로 우리 사회 내부의 문화적·계층적·세대적 경계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듯하다. 가령 박민규의 소설이나 황병승의 시는 기성의 주류문화와 비주류 하위문화 사이의 경계에 대한 이들의 대응을 감안하지 않고서는 그 묘미를 충분히 이해하기 힘들거니와 이런 종류의 경계를 넘는 일이 6·15시대에 어떤 의의를 갖는지를 해명하자면 좀더 복잡하고 정교한 논의가 필요할 듯하다. 이런 과제들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이제 90년대 등단작가들이 어떤 경계 넘기의 글쓰기를 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3. 90년대 문학세대의 자기쇄신

 

2000년대에 90년대 문학세대가 거둔 자기쇄신의 성과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여러 작가들의 작품들을 두루 살펴봐야겠지만 여기서는 전성태와 김연수의 몇몇 단편들을 살펴보는 데 만족해야 할 듯하다. 많은 작가들 가운데 이들을 택한 데는 성향과 스타일이 대조적인 두 작가가 서로 다른 방향에서 국경/경계를 넘으면서 문학과 역사, 인간에 대한 탐구를 수행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고, 이들의 작업이 6·15시대의 문학에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성태(全成太)의 변모는 주목할 만하다. 빼어난 언어구사력과 세밀한 묘사력이 일품이었으되 향토적 사실주의의 한계를 시원하게 넘어서지 못했던 『매향』(실천문학사 1999)의 전성태가 우리 시대 삶의 여러 경계를 성찰하는 비범한 예술가로 변모한 것이다. 소설집 『국경을 넘는 일』(창비 2005)의 첫번째 소설 「존재의 숲」은 이런 놀라운 변모 이면에서 그가 어떤 예술적 경계를 돌파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오늘날 리얼리즘 문학의 한계와 가능성을 예리하게 짚는 뜻깊은 작품이다.“말이 입에 올랐으되 삶을 밟고 있지는 못한 형국”(11면)에 처한 개그맨 화자에게 점쟁이가 들려주는 충고의 핵심은 ‘캄캄한 삶’을 밟아보라는 것인데, 이는 ‘진창에 구르며’밑바닥 삶을 겪는 것과는 다르다. 점쟁이는 오히려 그런 경우에 생기는“자기연민은 공연히 억지가 되기 십상”(13면)임을 경고한다. 오늘날 리얼리즘 문학의 문제점을 이보다 예리하게 짚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니까 ‘캄캄한 삶’이란 소재적인 차원에서 우리 사회의 ‘어두운 삶’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삶’에 근거하되 이제껏 미답인 어떤 영역을 뜻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존재적인 차원에서 낯익은 세계의 경계를 넘어 낯선 세계를 밟아보라는 주문인 것이다.

「존재의 숲」이 뛰어난 것은 이런 예술적 한계를 돌파하는 서사와, 화자가 여꼴댁의 오두막을 찾아가서 겪는 귀신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결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앞부분에서 설화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교묘한 복선(“예전에 여기 든 청년 하나가 귀신에 씌어서 미쳐 나갔다”)을 깔아놓았기 때문에 나중에 ‘양철집 할머니’가 사실은 여꼴댁 귀신임이 판명되는 반전을 겪으면서도 이런 초자연적 경험이 터무니없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의 촛점은 환상/현실의 경계 넘기에 있다기보다 여꼴댁의 아들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는 차원(점쟁이의 말에 따르면“절실하면 남 얘기가 내 얘기가 되는 것”)에 놓여진다. 화자가 환상/현실의 경계를 넘어 여꼴댁 귀신을 만나는 것은 그 아들의 입장에서 여꼴댁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결과일 따름이다. 화자는 이야기들이 바로 ‘존재의 숲’이 되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캄캄한 삶’을 밟아본 것이다.

「퇴역 레슬러」는 한 개인의 과거에 대한 영락없는 기억도 가공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은 이야기로 출발한다. 황혼기에 접어들어 고향을 찾아간 퇴역 레슬러는 양파 냄새를 맡고 유년시절의 아름다운 기억을 떠올리는데, 양파 냄새가 그의 어릴적 과거와는 무관함이 판명되는 것이다. 이 일화가 의미심장한 것은“강렬한 자기암시가 간혹 후각까지 속일 수 있다”(41면)는 사실, 즉 몸의 감각을 통해 기억된 과거도 허구일 수 있다는 데 있다. 몸의 언어/기억을 신비화하는 담론에 대한 일침으로 읽힌다. 두번째 일화는 이런 가공된 기억이 좌우파의 이념적 대립으로 굴절된 한국현대사와 교차하는 지점에서 일어난다. 퇴역 레슬러는 자신이 ‘배가 고파서’고향을 떠났다고 기억하지만 사실은 좌파 ‘사람들을 넘기고’도망쳐 나왔던 것이다. 기억의 이런 허구성은 자신이 고향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실조차 왜곡시킬 수 있다는 데서 충격적이다. 그럼에도 이런 엄청난 왜곡이 그럴 법한 것은 그가 레슬러로 성공하여 국민적 영웅이 되는 인생행로 자체가 70년대 반공개발독재 이데올로기의 산물인 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개인사든 민족사든 (얼마든지 거짓일 수 있는) 기억이나 이데올로기를 통해 재구성되는 측면을 예리하게 포착하면서도 진실의 준거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값지다. 양파 냄새 일화 같은 개인사에 관한 ‘작은 이야기’를 이념대립과 개발독재로 일그러진 한국역사라는 ‘큰 이야기’와 접맥시키는 솜씨도 일품이다. 기억 혹은 역사의 구성성과 진실의 경계를 어디쯤에 설정하는가는 6·15시대 문학의 중요한 주제랄 수 있는데, 전성태 나름의 방식으로 이 주제를 깔끔하고 수준 높게 다뤘다는 생각이다.

6·15시대 문학의 가장 직접적인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국경을 넘는 일’일 것이다. 물론 이것도 소재주의를 넘어 존재적 차원에서 다룰 때만이 그 핵심적인 중요성을 입증할 수 있다. 전성태의 「국경을 넘는 일」은 크게 두 단계의 이야기로 짜여 있다. 첫째 이야기는 화자인 ‘박’이 일본인 여행객 일행과 함께 캄보디아에서 태국으로 가는 국경을 넘다가 다리 난간의 탄흔을 발견하고“누군가 등 뒤에서 총부리를 들이대고 있으리라는 공포”(137면)에 사로잡히고, 이런 상황에서 호루라기 소리를 듣고는 겁에 질려 정신없이 뛰어간 사건이다. 나중에 일본인 일행 중 하나인 나오꼬가 그 이유를 묻자 박은“우리에게 국경을 넘는 일은 죽음을 의미하지요. 아마 제 무의식 속에 그런 국경에 대한 공포가 잠재돼 있었던 모양이에요”(141면)라고 대답하지만 박은 내심 자신의 그 말이“진실일까 의문”이었고, 나오꼬 앞에서 자신을“포장하고 싶다는 욕망”도 작용한 발언이었음을 깨닫는다. 전성태는 분단국에서 흔히 동일시되는 국민적/개인적 정체성 사이의 틈새를 중요한 공간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사실, 두번째 이야기에서 ‘박과 나오꼬의 관계’의 진전은 국민적/개인적 정체성 사이의 틈새를 얼마나 확보하고 한일간의 국가적·민족적 경계를 얼마나 넘어설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이런 맥락에서 두 남녀가 모두 벚꽃을 좋아하고 ‘벚나무 때문에 입은 상처’가 있다는 상황 설정은 약간은 작위적이지만, 틈새 확보와 경계 넘기의 작업이 조금은 진전되었다는 신호로 읽힌다. 그러나 둘 사이의 관계를 가로막는 내면의 경계가 무너지지 않았음은 나오꼬와 첫 정사를 치른 후에 박이 자신의 내면에서 감지되는 색다른 ‘충만감’의 정체를 추궁하면서 드러난다.

 

육체의 열락과 상관없이 그의 의식 속에서 피어난 충만감은 왠지 불온하나 매혹적인 느낌으로 떠돌았다. 나오꼬. 일본여자. 기필코 그녀는 그의 생에서는 도저히 상상해보지 못한 낯선 존재였다. 그건 정서적으로도 그러했다. 가장 멀리 있고 가장 까다로운 여자와 그는 사랑을 나눈 것만 같았다. 그는 뭔가를 뛰어넘은 느낌이었다. 외부의 어떤 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내부를 뛰어넘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이 불온한 쾌감이 육체의 열락과 동등하게 놓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따위의 쾌감이 몸집을 키워 덮친다면 그는 스스로도 견딜 수 없을 만큼 황폐해질 것 같았다. 그러자 마음 한쪽에서 또다른 혐오감이 치밀었다. 뭔가를 뛰어넘었다고 생각했으나 알고 보니 제자리인 자신을 발견하는 기분이었다. (156~57면)

 

‘육체적 열락’과는 상관없는 ‘충만감’의 정체는 처음에는 가장 ‘낯선 존재’와의 관계를 성취한 데서 나오는 것으로 느껴진다. 이를테면 존재적 차원에서 ‘뭔가를 뛰어넘은 느낌’인 것이다. 그러나 충만감이 불온한 쾌감으로 정체를 드러내면서 박은 자기 내부의 민족적·국가적 경계를 제대로 뛰어넘지 못했음을 자각하게 된다. 요컨대 박은 국적과 상관없이 낯선 존재인 나오꼬와 진정한 관계를 성취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색다른 충만감’의 정체를 똑바로 파악하고 내부의 어떤 경계를 뛰어넘었다는 착각을 떨쳐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상당한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진전에도 불구하고 두번째 정사 후 그들의 관계가 다시 악화되는 것은 박이 경계 넘기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반지로 상징되는 나오꼬의 개인적 차원을 이해하고 존중하지 못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런 차원이 쉽게 납득되기 힘든 것은 사실이다. 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오꼬는 잃어버린 반지를 찾느라 정신없는데 이런 행동은 박이 국경을 넘다가 정신없이 뛰어간 행동과 대칭을 이루는 듯하다.“그 반지는 내가 내버리려던 거란 말예요. 그렇게 잃어버리면 안되는 반지였어요. 당신이 뭘 알아요?”(165면)라는 나오꼬의 종잡을 수 없는 발언은 일본인 애인과의 관계를 청산하려는 의도로 추측되지만 작품의 의미층을 모호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박이 떠나가는 나오꼬에게“너는 그냥 어린 계집아이일 뿐이야”라고 소리칠 때 그것이 국적과 상관없는 낯선 소녀일 뿐이라는 뜻인지 일본여자가 자신을 무시한 데 대한 분풀이인지 애매하다. 박이 스스로 자인하듯 ‘어정쩡한’상태인 것이다. 반지사건이 석연치 않은 것은 그것이 한국과 일본의 어정쩡한 관계를 배려한 장치인 측면이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이 ‘국경을 넘는 일’이라는 중요한 주제를 존재적 차원에서 뚝심있게 밀고 나가는 흔치 않은 성취를 거두었음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김연수(金衍洙)의 최근 소설들이 6·15시대에 의미심장한 것은 전성태와 정반대의 방향에서 역사, 민족, 국가, 문학(텍스트) 등에 대한 탐구를 밀고 나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전성태가 사실주의에서 출발하여 세계/역사의 허구적·구성적 측면에 대한 깨달음을 거쳐 진실로 나아가는 쪽이라면, 김연수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출발하여 세계/역사에 관한 실증적 자료의 재구성을 거쳐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양상인 것이다. 전성태가 대다수 리얼리스트들과 달리 기존의 경계를 넘어 낯선 존재의 영역을 밟아보려는 용기를 갖고 있다면 김연수는 대다수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달리 진실/진리에 가닿으려는 강렬한 욕망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김연수와 전성태가 때로 아주 가까워지면서 서로를 조명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김연수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이나 「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에서처럼 역사나 사랑에서 ‘우연’의 역할을 강조할수록 두 사람의 거리는 멀어질 것이지만 말이다.

김연수의 최근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창비 2005)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역사에 대한 사변적 이야기와 사랑이야기가 함께 등장한다는 점과, 종종 텍스트(지도/말/문학)의 진실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이 사이에 끼여든다는 점이다. 각각 작품의 소설적 효과는 이 세 요소가 어떻게 병치·교차·결합되면서 진실 찾기가 이뤄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뿌넝숴(不能設)」에서 역사와 사랑의 진실 찾기는 일종의 모순어법에서 출발한다.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지평리전투에 참여한 화자는“전쟁에는 진실이 있지만, 전쟁 이야기에는 조금의 진실도 없”다거나“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게 아니”(61면)라는 발언을 하면서도“그럼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비 이야기라면 어떨까?”(57면)라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또한“운명은 절대로 말로 표현할 수 없어. 말하는 순간, 그 운명은 바뀔 테니까. 뿌넝숴, 뿌넝숴. 하지만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여기서 한번 해볼까?”(61면)라고도 말한다. 텍스트(지도/말/문학)에 대한 이런 모순과 역설의 발상이 김연수 소설의 근저에 깔려 있음은 여러 작품에서 드러나지만, 그럼에도 발설된 이야기가 얼마나 진실에 근접하는가는 작품마다 다르다.

‘전쟁/삶/운명’의 진실은 말할 수 없다는 「뿌넝숴」의 화자가 말하려는 것은 진실은 책에 기록된 공식역사에서 찾을 수 없고 오로지 인간이 온몸으로 체험한 것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뿌넝숴. 뿌넝숴. 역사라는 건 책이나 기념비에 기록되는 게 아니야.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몸에 기록되는 거야. 그것만이 진짜야”(70면)라는 주장이다. 한국전쟁이 남북에서 서로 판이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감안하면 지당하신 말씀이다. 하지만 인간의 몸에 기록된 역사는 얼마나 진실을 말해줄 수 있을까? 전쟁에 참여한 화자가 들려주는 「뿌넝숴」라는 전쟁과 사랑의 이야기는 어떤가? 비와 피, 쎅스와 죽음으로 가득한 처절한 사랑/전쟁 이야기는 화자가 온몸으로 겪은 생생한 체험기라는 느낌을 준다. 화자가 겪은 전쟁과 사랑의 처절함과 공식역사의 이데올로기적인 냉랭함이 대비되는 효과가 있다. 다른 한편 너무 처절하고 질퍽해서 주관적 경험론에 치우친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든다. 처절함이 곧 진실은 아니며 진실에 더 가깝다는 보장도 없다. 또한 몸에 기록된 역사라 해서 모두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은 「퇴역 레슬러」가 이미 보여준 바이다. 물론 처음부터“전쟁에는 진실이 있지만, 전쟁 이야기에는 조금의 진실도 없”다고 전제했으니 어느정도 면책은 되겠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흔들리던 공식역사의 경계를 정면으로 돌파한 점은 사줄 만하지만 진실추구를 끝까지 밀어붙여 새로운 경지로 나아갔다는 느낌은 없다. 또한 사랑/전쟁 이야기가 엮여 있음은 분명하지만 처절하다는 것 외에 특별히 서로를 조명해주는 효과도 거의 없다는 점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소설집에서 단연 돋보이는 작품은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다. 무엇보다 텍스트(글쓰기)의 경계, 사랑의 경계, 세상의 경계, 삶의 경계 등 모든 경계를 넘어서 궁극의 진실을 찾으려는 한 인간의 도저한 분투가 기이한 감흥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주인공 ‘그’가 구도자 같기도 하고 ‘미친놈’같기도 한 것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모든 ‘경계 넘기’의 최종판 같은 이 이야기는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 걸까. 우선 「존재의 숲」이 보여준 것처럼 ‘캄캄한 삶’을 밟아보는 것, 즉 기존의 경계를 넘어 낯선 존재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인 것이다. 가령 주인공 ‘그’가“아주 기이하고도 독특하고 불가해한 것들을 마주할 용기”(111면)를 갖고“더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에서 조금 더 밀고 나가는 일”(112면)을 실행에 옮기는 이야기이다. 「존재의 숲」의 화자가 잠깐 귀신에 씐 것처럼 이 소설의 주인공 ‘그’역시 고소증세로 미쳤을 수 있다. 이런 유사점은 기존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존재 영역으로 나아가는 데 따르는 광기의 위험을 암시한다.

그런데 이를 감안해도 ‘그’는 너무 나아갔다. ‘그’는 ‘캄캄한 삶’을 밟아보는 데 그치지 않고“희망 없이 절망을 받아들이는” 감각으로“반드시 죽음의 지대를 거쳐야만”(141면) 하는 어떤 낯선 영역까지 나아간 것이다. 마치 세상의 마지막 경계까지 가서 몸을 날려버린 듯이. ‘그’의 이런 행위가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돌파한 것인지 아니면 ‘경계 넘는’일에 너무 매료되어 쓸데없이 죽음을 자초한 것인지 애매한데, 이 작품의 매력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그의 행위가 득도인지 광기인지에 상관없이 화자인 ‘나’가 상상하는 ‘그’의 마지막은 기이하고 애절하고 아스라하다.

이런 극한의 감흥과 애매함의 효과는 성공적인 플롯에 힘입은 바 크다. 즉 두 여자와의 사랑과 여러 (역사적/소설적) 텍스트의 진실을 세상 끝까지 추적하려는 주인공의 분투가 낭가파르바트 등정으로 수렴되는 플롯이 소설의 극적인 효과를 높여준 것이다. 이는 작품에 혼재되어 있는 다양한 포스트모던 기법과 장치 들이 제대로 작동하면서 빛을 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령 텍스트의 미스터리는 ‘그’의 여자친구가 남긴 유서에서부터 그 의미를 해독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그’가 쓰기 시작하는 소설로, 낭가파르바트 등정을 꿈꾸는 그가 열심히 해독하려는 『왕오천축국전』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동한다. 이 모든 미스터리가 수렴되는 곳은 물론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라는 텍스트이다. 사랑의 미스터리도 여기에 접맥된다. ‘그’는 여자친구의 마음을 알 수 없고, ‘그’와 ‘나’는 서로 사랑하지만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사랑의 진실은 지워진 글자가 있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만큼이나 완벽한 이해가 불가능하고 오로지 짐작할 뿐이다.  

이런 수법보다 더 주목할 것은 특이한 주인공/화자의 운용이다. 작가는 화자인 ‘나’와 주인공인 ‘그’를 헷갈리게 함으로써 퍼즐을 대할 때처럼 독자의 지적 욕구를 자극한다. 가령 독자의 입장에서는 작품 초반에 등장하는“그가 나는 과연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 즈음, 버스는 숙소에 도착했다”(114면)라는 문장의 뜻을 종잡기 힘든데, 이 괴상한 문장이 나중에 가면 완벽하게 말이 되는 것이다. 화자 ‘나’가 『왕오천축국전』의 주석본을 쓴 대학교수이고 ‘그’는 이 책의 애독자임이 확연해질 즈음에 ‘나’가 ‘그’에게 진한 키스를 하는 장면이 등장하여 그때까지 ‘나’를 남자로 가정한 독자를 당황케 한다. 독자는 동성애 사이를 의심하지만 얼마 후에 ‘나’가 남편과 아이들을 둔 여성임이 확인된다. 그러나 이렇게 지적 흥미를 유발하고 쏠쏠한 의외성의 재미를 주는 것은 부차적인 효과이다.

이런 특이한 주인공/화자 운영의 예술적 효과는 ‘그’의 이야기가 사실은 화자 ‘나’가 ‘그’의 편지와 등반일지 등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라는 점이 확연해지면서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즉 ‘그’의 이야기는 ‘나’의 관점에서 재해석된 것이므로 더욱 허구적이고 애매한 것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라는 텍스트의 미스터리는 한층 더 깊어진다. 그러나 그 때문에 이 소설은 텍스트(문학/역사)와 사랑의 진실을 끝까지 추구할 때 당도하게 되는 극한의 지점으로 우리를 데려다주는 듯한 효과를 거둔다. 김연수의 역량이 느껴지는 수작이다.

 

앞서 2000년대의 신예작가들과 90년대 문학세대의 몇몇 소설을 논평하거나 검토했다. 2000년대 신예작가들의 작품을 두루 다루지 못한 탓에 이것만으로 2000년대 문학을 6·15시대의 관점이나 ‘경계 넘기’에 주목하여 읽는 것이 적실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정한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성태와 김연수의 소설 논의를 통해 우리 시대 문학에서 새로운 현실을 깊숙이 파고드는 경계 넘기의 글쓰기가 시도되고 있다는 것은 어느정도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양한 스타일과 성향의 작가들에게 이런 ‘경계 넘기’의 글쓰기나 6·15시대의 관점이 얼마나 유효할지는 개개의 ‘물건’을 갖다놓고 세심하게 따져봐야 할 문제이다. 또한 이 글이 우리 문학의 전망과 가능성을 밝게 볼 수 있는 근거를 확실히 제시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우리 문학의 작가층이 어느 때보다 두터워지고 있고, 그들의 시야가 빠른 속도로 넓어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 시대의 새로운 현실에 실로 다양한 목소리와 기법, 온갖 서사적 상상력으로 반응하는 2000년대 문학은 그 활력과 예술적 풍요로움으로 보건대 위축되거나 왜소화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다. 앞서 2000년대 문학의 ‘새로움’을 어떤 서사적 유형이나 세대적 심리나 감수성에서 찾으려는 몇몇 비평가들의 입론을 비판한 것은 그들의 논의 자체가 그런 면을 부각하는 효과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비평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효과를 따지는 차원에 있지 않다. 전성태나 김연수의 작품이 그렇듯이 존재적 차원에서 작품을 대하고 사심없이 평가할 일인 것이다. 2000년대 문학 논의가 그런 차원에서 이어져 우리 문학에 큰 보탬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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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명인 「단자(單子), 상품, 그리고 권력」, 『자명한 것들과의 결별』, 창비 2004, 239~40면. 『월간 건축인 포아』 2002년 6월호에 처음 발표되었음.
  2. 김영찬 「2000년대 문학, 한국소설의 상상지도」, 『문예중앙』 2006년 봄호, 40, 51면.
  3. 김형중 「기어라, 비평!—2000년대 소설담론에 대한 단상들」, 『문예중앙』 2005년 겨울호, 21, 22면.
  4. 이광호 「혼종적 글쓰기 혹은 무중력 공간의 탄생—2000년대 문학의 다른 이름들」, 『문학과사회』 2005년 여름호, 167~68면. 앞으로 본문에 면수만 밝힘.
  5. 김영찬 「소설의 상처, 대중문화라는 증상」, 『파라21』 2004년 봄호, 74면.
  6. 김영찬 「2000년대, 한국문학을 위한 비판적 단상」, 『창작과비평』 2005년 가을호, 309면.
  7. 김영찬 「2000년대 문학, 한국소설의 상상지도」, 50면.
  8. 김영찬 「2000년대, 한국문학을 위한 비판적 단상」, 31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