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한국문학의 증상들 혹은 리얼리즘이라는 독법
김영찬 金永贊
문학평론가, 성균관대 강사. 평론으로 「김승옥 소설의 심상지리와 병리적 개인의식의 현상학」 「소설의 상처, 대중문화라는 증상」 등이 있고, 역서로 『근대성과 페미니즘』(공역)이 있다. youngmarx@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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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라는 제목으로 지난 10년간 우리 문학의 성과를 총괄해보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창작과비평』 2004년 여름호의 특집은 여러모로 반가운 것이었다. 그것은 그동안 한국문학의 생생한 실제 현장과는 다소 거리를 두는 듯 보이던 창비가 이제는 더이상 개입과 발언을 미루지 않고 그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당대의 문학적 흐름에 동참하겠다는 의지의 산물로 읽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의 문학적 성과들을 “어설프게 분류하고 함부로 이름을 붙이기보다는”개별적인 작가나 작품에 대한 차분하고 치밀한 검토를 앞세우고 있다1는 데서도 그 신실함을 가늠할 수 있었다. 더욱이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과정에서, 최원식(崔元植)이 제안한 “작품의 실상으로 직핍”하는 “작품으로의 귀환”2이라는 명제에 값하는 창비의 본격적인 실천을 오랫동안 지루하게 기다려온 입장에서도 이 특집은 그 발걸음을 떼는 반가운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이 특집의 의미를 찾는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한국문학의 현재에 대한 창비측의 비판적 문제제기이자 그 문학적 성과를 읽는 독법에 대한 자기점검이라는 데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또다른 방향에서 인상적인 것은 그것을 통해 창비가 결과적으로 지금까지의 자족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자신의 비평적 시각과 담론의 적합성을 시험하면서 그 자체를 스스로 활발한 토론과 비평의 대상으로 방(放)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렇게 볼 경우 이미 그것의 의미는 단지 “창비 나름의 비평적 개입”이나 “창비 내부의 싸움”(『창비』 27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편집진의 표현대로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올인’하는 이 특집의 방식은 그 자체로 가진 패를 숨기지 않고 한꺼번에 모두 펼쳐보임으로써―그것이 한편으로는 자신감의 표현으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스스로는 알지 못할 수도 있는 ‘결여’까지도 외부를 향해 가시적으로 드러내어 비판적 대화를 촉발하는 비평적 모험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이 특집에서 리얼리즘의 입장에 서 있는 창비로서는 낯설고 불편할 수 있는 배수아, 김영하, 천운영, 김연수, 정이현, 이만교 같은 젊은 작가들을 읽고 있다는 데서 발생하는 효과라고 할 수도 있겠다. 편집자 대담에서 진정석(陳正石)은 적절하게도 창비의 보수성과 ‘비평적 모험’의 부재를 문제삼았지만,3 이 특집을 통해 창비는 이미 그 모험을 다른 방식으로 시작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창비가 그간 보여왔던 보수적인 비평적 행보의 근본적 전환으로 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선뜻 긍정하기 힘들다. 무엇보다도 이 특집에서 “그간의 직무소홀을 일거에 만회해보자는 야심”(『창비』 20면)에 찬 ‘이벤트’를 벌인 이면에는 그 근본적 전환을 가로막는 창비 고유의 비평적 태도와 판단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가령 편집자 대담에서 당대의 문학적 흐름과 함께하는 “과감한 비평적 모험”이 필요하다는 진정석의 자기비판적 발언에 대해 임규찬(林奎燦)은 다음과 같은 발언으로 응수하는데, 이는 임규찬 개인의 입장이라기보다는 창비 내부의 지배적인 한 경향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치 실제 현실에 상당한 무엇이 있는데 창비가 그것을 못 따라가고 있다고 진단하는 것 같은데 정말 그런가 솔직히 반문하고 싶습니다. 근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문학적 환경이 과연 그런 역사적 체계화를 자연스럽게 추동할 만큼의 긴장된 문학적 움직임을 담지하고 있는가, 정말 창비는 놓쳐서는 안될 어떤 문학적 흐름과 작가들로부터 뒤떨어져 있는 느림보인가? 저는 꼭 그렇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쉽게 규명할 수 없는 현실의 복잡성 속에서 다양한 질적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현실의 중요한 변화들을 제대로 감당할 만한 문학적 움직임이 활발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먼저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창비』 21면)
어찌 보면 이는 정확한 사실 판단일 수 있겠으나, 여기에는 말해지지 않은 잉여가 있다. 비유컨대 이러한 발언에서 부득이하게 연상되는 것은 의처증 환자에 관한 라깡(J.Lacan)의 지적이다. 라깡에 따르면, 아내가 다른 남자와 놀아나고 있다는 의처증 환자의 주장이 설령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질투는 여전히 병리적이다. 왜냐하면 그 주장은 주체와 관련된 어떤 진실을 억압하면서 제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 발언에서 억압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창비 스스로가 “현실의 중요한 변화들을 제대로 감당할 만한 문학적 움직임이 활발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직접 연루되어 있다는 것, 즉 바로 창비가 정확히 그 문제점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이다. 위 발언이 안고 있는 문제는 그렇게 주체(창비)의 책임을 회피하면서 그것을 대상의 문제로 떠넘기고 있다는 데 있다. 위 발언은 의도치 않게도 현재 창비의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더 나아가 창비의 비평이 지금 ‘현실의 중요한 변화들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온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스스로 정확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비평에 국한하여 볼 때, 그 문제점은 임규찬의 표현대로 “실제 현실에 상당한 무엇”이 있어야 비평이 개입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그 ‘상당한 무엇’이란 물론 민족문학의 입장에서 뛰어난 ‘리얼리즘적 성취’일 것이라 짐작된다. 그러나 비평이 미리 어떤 규범적 기준을 정해놓고 가까스로 거기에 도달하는 문학만을 ‘정선(精選)’해 다루고 그 기준에서 벗어나거나 그에 ‘미달한다고 생각하는’ 문학에 등을 돌린다면, 그것은 비평의 영역을 스스로 축소시켜 자족적인 폐쇄된 공간 안에 가두어버리는 것이다. 더욱이 현재 한국문학의 현장에 “아귀가 맞는”4 작품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런 당대의 문학적 현상을 진단하고 그에 개입하여 대응할 수 있는 이론의 현실적 응전력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계기로 삼아야 할 문제이지 작품의 탓으로 돌릴 일만은 아니다. 창비가 주장하는 리얼리즘론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시대와 호흡하면서 이 후기근대의 자질구레하고 복잡다기한 현실과 문학적 현상들 속에서 함께 살아가며 이론의 내성(耐性)과 적응력을 단련하려는 분투가 없다면 그것은 공소(空疎)한 밀실의 비평이 되기 십상이다. 그리고 창비가 주장하는 리얼리즘의 본뜻이 분명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난 『창비』 특집의 의미는 그 보수적 태도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거두어들이고 확고하게 설정된 문학적 규범과는 거리가 있는 듯 보이는 ‘뛰어난 군소작가들’의 숲으로 들어가 그들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읽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그럼으로써 이 특집은 ‘리얼리즘’에 대한 변치 않는 믿음을 “속내로만 안다짐하는” 그간의 “증상”(『창비』 84면)에서 벗어나 창비 고유의 독법(讀法)을 동원해 젊은 작가들의 최근 소설과 벌이는 치열한 해석적 대결의 장이 되고 있다. 이때 문제의 중심에 놓이는 것은 물론 백낙청(白樂晴)과 최원식의 글이다. 이 글들의 공통점은 통상적인 의미에서 모더니즘에 더 가까운 소설들을 리얼리즘적 해석좌표 안에 옮겨놓고 그 문학적 성과를 심문(審問)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통해 거꾸로 리얼리즘적 독법의 효력과 생산성을 시험하는 흥미로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과연 얼마만큼 생산적인가, 그리고 그 독법은 실제 작품의 핵심을 제대로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을 안고 출발하는 이 글은 리얼리즘의 독법과 그에 저항하는 모더니즘의 작품이 맞서는 긴장된 무대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그 둘과 함께 나누는 비판적 대화의 형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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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裵琇亞)의 『에세이스트의 책상』(문학동네 2003)을 검토하고 있는 백낙청의 「소설가의 책상, 에쎄이스트의 책상」은 ‘꼼꼼히 읽기’의 모범을 보여주는 글이다. 그리고 어떤 입장에서라도 이질적이고 낯설뿐더러 배수아의 다른 소설과 비교하더라도 더욱 ‘아리송한’ 이 모더니즘 소설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유연성과 포용성은 이 글의 중요한 미덕이다. 백낙청은 이 글에서 소설의 곳곳에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사건’들을 추스려 언뜻 스토리가 없는 듯 보이는 이 소설의 ‘서사(敍事)’를 일목요연하게 재구성해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그는 “치밀한 운산과 정교한 복선”(『창비』 34면)을 깔고 소설을 복류(伏流)하는 서사가 작품의 표면에서 분출하는 강렬한 정신주의를 교정하는 장치로 작용하고 있다는 주장을 치밀하게 논증한다. 이러한 백낙청의 소설 읽기는 소설을 읽을 당시 미처 깨닫지 못했던 여러 사실들을 새롭게 환기해주는 바 있어 개인적으로도 좋은 공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갖게 되는 의문은 이런 것이다. 그렇게 읽는 것이 과연 작품에 대한 “충분한 대접”(『창비』 42면)인가?
『에세이스트의 책상』에 대한 백낙청의 논평의 핵심은 “작품 자체”는 ‘정신주의’라는 “수상쩍은 명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여러 계기를 담고 있다”(『창비』 43면)는 주장이다. 여기에는 분명 작가의 이데올로기에 반(反)하는 ‘리얼리즘의 승리’를 설파하는 엥겔스(F.Engels)의 그림자가 있지만, 백낙청의 독법은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텍스트가 말하게 한다”[5. Terry Eagleton, Against the Grain: Essays 1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