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 국제심포지엄 발제문

 

한국에서의 ‘진보’와 동아시아 협력

 

 

이남주 李南周

성공회대 교수, 정치학. 『창작과비평』 편집위원. 주요 논문으로 「동아시아 협력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 「동북아시대 남북경협의 성격과 발전방향」 등이 있음. lee87@mail.skhu.ac.kr

 

 

1. 한국에서의 ‘진보’의 위기와 새로운 모색

 

최근 한국사회에는 ‘진보’가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1 이는 사회주의체제의 붕괴와 함께 냉전체제가 해체되면서 시작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진보이념이 현실 사회주의체제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공유한다는 차원에서는 사회주의적 전통과 친화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의 위기가 바로 표출되지는 않았다. 이념적으로는 위기의 조짐이 나타났지만 정치적으로는 진보세력이 영향력을 계속 증가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87년 직선제 개헌 도입으로 민주화가 시작된 이후 국민들은 대체로 기득권세력보다는 진보 혹은 개혁 진영을 지지하는 정치적 선택을 했다. 조금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일국적 차원에서든 지구적 차원에서든 자본주의체제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모순의 해결에 촛점을 맞추는 것을 진보적 경향으로, 자본주의체제의 정상적 운영, 특히 시민적 권리의 강화에 촛점을 맞추는 것을 개혁적 경향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화과정에서는 이러한 차이점이 부각되기보다는 진보와 개혁이 기득권 구조의 타파와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 건설을 지향하는 단일한 흐름으로 인식되었다.

노무현(盧武鉉)정부의 성립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흐름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다. 노무현정부의 출범을 계기로 진보·개혁세력이 단순히 동원의 대상이 아니라 정치권력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했고, 2004년 탄핵사태를 거치면서 국회에서는 민주화운동의 맥을 계승하는 열린우리당이 다수를 점하게 되었다. 정치적 차원에서 보면 진보·개혁세력이 헤게모니를 잡았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역설적이지만 이를 계기로 수면 아래에 있던 진보의 위기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선 진보·개혁세력은 정치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진보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체계적인 정책을 제시하지 못했고 과연 진보가 지향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확산시켰다. 여기에 노무현정부가 신자유주의에 투항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진보적 정체성의 혼란이 가중됐다. 또한 정책적 혼란은 노무현정부에 대한 지지도 하락으로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진보·개혁세력이 과연 정책적 대안세력이 될 수 있을 것인지 회의도 증가했다. 정치적 승리는 이처럼 진보·개혁세력에 이념적 위기를 드러내는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최근 이러한 위기의식을 공유한 진보진영은 여러 새로운 모색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진보적 전통을 계승하고자 하는 다양한 싱크탱크(think tank)들이 조직되고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변화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적 기반의 구축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현재 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실현가능한 진보적 전망을 제시할 수 있는 진보이념의 재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다음 두 가지의 문제의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남한사회 변혁운동의 민중민주주의적 전통을 계승하는 입장에서 현실의 위기를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려는 경향이며, 다른 하나는 세계체제 및 분단체제라는 거시적 차원의 변화와 연관해서 한국에서의 진보의 위기와 전망을 파악하려는 경향이다.

전자의 문제의식은 최장집(崔章集)에 의해 적극적으로 제기되었다.2 최장집은 참여정부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사회·노동정책에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적 기반을 붕괴시켰다는 점을 들고 있다. 최장집의 이러한 비판은 단순히 사회·경제적 정책만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공공성 담론의 약화나 정치의 역할 축소를 초래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황해문화』 2005년 겨울호 특집 ‘민주화시대에 민주주의가 없다’에 게재된 글 대부분도“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문제라는 최장집의 주장과 맥을 같이하면서 현상황을 진단한 바 있다.

이들의 문제제기는 정치적 영역에서 절차적 민주화가 진행되었는데도 사회·경제적인 영역에서는 민주주의의 기초가 약화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양극화문제가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부각된 데에는 이 담론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러나 ‘포스트민주화론’이 진보이념의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는 데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의문이다.

최장집은 양극화문제와 민중적 문제의식을 강조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주요 고리로 정치적 영역, 특히 제도정

  1. 여기서 진보(progress)는 역사의 변화를 과거보다 나은 미래로의 전진이라는 낙관적이고 단선적인 발전관에 입각하여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비판적 접근과 모순의 극복을 통해 더 높은 차원의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의식적 노력을 말한다. 진보의 구체적인 내용과 강조점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는데, 현재 한국에서는 정치적·절차적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실질적·사회경제적 민주주의(분배·복지)를 지향하며, 개발주의에서 벗어나 생태적 가치를 중시하고, 냉전에 의해 강요당한 분단체제를 극복하며 평화적 남북통합이 진행되는 사회를 지향하는 다양한 흐름을 포괄한다. 이러한 여러 가치가 서로 어떻게 관련되며 어떤 것이 중심과제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이견이 존재한다.
  2. 최장집의 최근 논의는 2005년 10월 참여사회연구소 해방 60주년 기념 심포지엄의 발표문 「해방 60년에 대한 하나의 해석: 민주주의자의 퍼스펙티브에서」와 2006년 1월 12일 성공회대 사회문화연구소가 주최한 토론회의 발표문 「한국 민주주의의 변형과 헤게모니」를 참고. 남한사회에서 민중민주주의적 전통을 계승하는 이념적 경향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최장집의 논의에 촛점을 맞춘 것은 비판담론에 머무르고 있는 다른 주장들과는 달리 진보이념의 재구성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실현가능성’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