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전성태 全成太

1969년 전남 고흥 출생. 1994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매향』이 있음. jstroot@hanmail.net

 

 

 

한국의 그림

 

 

이삿날을 받아놓고 아버지는 허리앓이가 도져서 며칠째 거동을 못했다.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다. 평생 무거운 연장가방을 허리에 두르셨으니 칠순을 앞에 둔 노구가 온전할 리 없었다. 묵은 직업병이라 그럭저럭 견디며 지내셨는데 지난 봄 여름 두 철 강원도 어느 사찰 요사채 짓는 일을 해주고 와서는 꽤 심해진 모양이었다. 며칠 동안은 아예 앉지도 못하시다가 침을 맞고 나서는 좀 나아졌다고 어머니가 말했다.

“남의 집 두리기둥 세우는 맛에 제 몸 기둥 무너지는 줄 몰른 인사여, 느그 아부지가. 평생 허리에 붙인 파스만 모아도 웬만한 집 지붕 하나는 일 것이다.”

어머니는 늘 아버지의 일욕심을 못마땅해했다.

하는 수 없이 양평 집을 오가며 이삿짐을 쌀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오래전부터 부모님은 두 분의 고향인 강진으로 내려가 여생을 보낼 계획을 갖고 있었다. 십여년 전에 이미 빈 농가를 하나 사들인 아버지는 틈틈이 오르내리며 집을 고쳐놓았다. 선뜻 이사를 못한 것은 어머니가 별로 내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에 익은 자리에서 사는 게 낫다거나 막둥이인 내가 공부가 늦어져서 그거나 끝나는 것 보고 내려가자는 말씀이었는데 정작은 자식들과 멀리 떨어져 지내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일 놓을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이번에는 어머니가 먼저 이사를 주장하였다.

안채 살림은 포장이사를 하기로 했고 나는 행랑 창고의 짐들만 챙기면 되었다. 짐들은 대부분 아버지의 연장들이었다. 대학원 수업이 없는 날 나는 양평으로 내려가 짐을 쌌다. 짐은 포장할 것보다 버릴 게 더 많았다. 더러 짐 속에서 우리 삼남매가 학교를 다니며 쓰던 물건들이 나오기도 했다. 나는 중학교 일학년 때 쓰던 학생모를 발견하고 얼마나 신기해했는지 모른다. 곧 교복자율화가 되었기 때문에 내가 학생모를 써본 것은 그 한해뿐이었다.

아버지의 연장 중에서도 버릴 게 많았다. 날이 못 쓰게 된 대패도 네댓 개가 넘었고 꼭지 나간 장도리며 자루 부러진 크고 작은 망치가 여럿 나왔다. 버리려고 마당 한쪽으로 내놓으면 어머니가 반은 다시 이삿짐 쪽으로 옮겨놓곤 했다. 그건 자루만 새로 해넣으면 된다, 그건 어디 절을 지을 때 쓰던 먹줄통인데 아버지가 섭섭해할 것이다, 그 끌은 잃어버렸다가 일부러 한 행비 해서 되찾아온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을 하는지 잘 알았지만 모른 척했다.

짐들이 얼추 정리되었을 때 나는 창고 안쪽 시렁에서 웬 멍석처럼 돌돌 말린 채 비닐에 싸인 물건을 발견했다. 텐트나 천막인가 싶어서 마당으로 끌어내놓고 펼쳐보니 마당을 다 덮었다. 그건 놀랍게도 텐트천에 그린 그림이었다. 망치와 삽을 든 노동자들이 함성을 지르며 전진하는 내용의 그림은 우리가 한때 ‘걸개그림’이라고 부르던 것이었다.

“이게 뭐예요?”

“오매, 징한 거. 아직 그것이 있었구나 잉. 대호 아재 거여. 느그 아부지가 언제 한번 딱 노가다 사람들하고 보라매공원으로 데모를 안 갔겄냐. 그냥 품팔이 하는 사람들이 가자고 해서 묻어간 거여. 그때 갖고 온 건디 돌려줘야 쓴다등마 아직도 갖고 있네이.”

그러고 보니 80년대 말인가 아버지는 딱 한차례 일용직 노동자 집회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평소 자식들이 데모대에 휩쓸릴까봐 노심초사하던 양반이었다.

“정 못 피하겄으먼 앞에 서지 말고 뒤에 서라. 소리만 지르제 가꾸목은 쥐지도 마라.”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근데 왜 이 그림이 우리집으로 왔죠?”

나는 신기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건너다보았다.

“대호 아재가 경찰에 잡혀가는 바람에 느그 아부지가 대신 거둬서 싣고 왔단다. 대호라믄 그저 쓸개도 빼줄 양반이여, 느그 아부지는.”

어머니는 힐끗 안방 쪽을 훔쳐보았다.

“뭐란 중 아냐? 대호한테 큰 집을 지어주는 기 소원이란다. 큰 그림 그리는 양반인게 큰 집이 있어야 쓴디야. 테레비에 보일 때마다 하는 말이 노상 그 말이다. 닌장, 팔자 고친 사람 집걱정까지 해주는 거이 느그 아부지여.”

어머니의 말을 들으며 나는 설핏 웃었다.

화가 김대호 아저씨는 한때 아버지를 따라다니던 목수였다. 익히 알려진 대로 그는 ‘걸개그림’이라는 장르를 세계미술사에 올린 장본인이다. 브리태니커 사전에도 ‘걸개그림’이라는 한국의 특수한 미술 장르가 소개되고 그 개척자로 그의 이름이 올라 있다. 요새도 종종 언론에서 그이의 모습을 보는 건 어렵지 않다. 설치미술가가 된 그는 환경파괴, 전쟁의 참상이 빚어지는 곳이면 세계 어디든 달려가 화구를 푼다. 한때 그는 한국의 거리에 큰 그림을 올렸지만 지금은 세계의 광장에다가 그림을 그려 올리는 유명인이 되어 있다.

아버지는 간혹 술을 마시면 말하곤 했다.

“목수여서 그런 큰 화가가 된 거여. 나가 목수일을 갈쳐서 그런 큰사람이 된 거라니께.”

한때 그가 우리집에서 이태를 머문 인연으로 아버지뿐 아니라 온 식구들이 그를 자랑으로 여겨왔다. 별 요상한 그림을 다 그린다며 혀를 차는 어머니도 그가 명사가 된 것만은 은근히 뿌듯해했다.

 

1986년, 일군의 청년 화가들이 경찰서에 잡혀왔다. 그들은 도심의 빌딩벽에 벽화를 그리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어온 것이었다. ‘상생도(相生圖)’라는 제목의 벽화는 한반도 형상을 한 태극기를 배경으로 남과 북의 동포들이 서로 손을 잡고 한바탕 신명나게 춤을 추는 내용이었다. 그림배경으로는 진달래가 만발해 있었다. 당국이 보기에 그림은 꽤 불온했고, 자칫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새로운 미술운동이 일어날 판이었다.

당시 분위기상 공안당국은 정국 반전의 대어를 낚았다고 판단했다. 화가 간첩단 사건 조작이 착착 진행되어갔다. 그러나 아주 사소한 문제가 발생했다. 잡혀온 청년 하나가 자신은 화가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는 것이었다.

“저는 작업대를 설치하러 온 목수라니까요. 화가분들한테 물어보시면 잘 알 겁니다.”

“하, 이 녀석 보게. 발뺌할 일이 따로 있지. 니 혼자 살아보겠다고 거짓말을 해.”

형사는 뒤통수를 갈겼다. 현장에서 찍은 사진이 증거물로 제시되었다. 사진 속에서 그는 붓을 들고 벽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것 개나리 맞지? 진달래 옆에다가 요걸 그리고 있는 게 누구야? 개수작 부리지 말고 눈이 있으면 똑똑히 봐, 인마.”

“제가 맞긴 맞는데요, 누누이 말하지만 전 목수가 분명하대도 그러시네, 참.”

“근데 왜 붓을 들고 설치냔 말이야”

“그러니까 그게…… 와 돌아버리겠네.”

그는 몹시 난처하고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작업대를 설치해놓고 옆에서 구경하자니까 화가 양반들이 진달래를 그리잖습니까. 마침 심심하던 차에 제가 한마디 거들었죠. 봄꽃에 진달래만 있느냐고요. 그랬더니 화가 선생이 그럼 또 뭐가 있느냐고 묻더라고요. 개나리도 있다고 했더니, 아 그 양반이 그럼 당신이 직접 그려보라잖습니까. 에이, 저는 농담하는 줄 알고 손사래를 쳤습니다. 그랬더니 붓을 척 건네주며 한번 그려보라는 겁니다. 그까짓 것 저도 개나리 정도는 그릴 수 있겠다 싶어 붓을 들었지요.”

화가들도 한결같이 그의 말이 맞다고 증언해주었다.

일은 그렇게 넘어가는 듯싶었다. 그러나 오후부터 취조 형사가 바뀌었다. 조사과에서 정보과로 바뀐 것이었다. 조사실도 바뀌어 책상과 의자만 덩그러니 놓인 방은 어둡고 을씨년스러웠다. 정보과 형사라는 사내는 말투가 아주 신사적이어서 외려 사람을 긴장시켰다.

“김대호씨, 우리 선수끼리 서로 길게 하지 맙시다.”

형사는 서류철을 펼쳤다.

“자, 학력이 중학교 중퇴군요. 십대에서 이십대 초반을 어떻게 보냈는지 신원이 불분명하고요. 무슨 목적으로 화가들에게 접근했습니까?”

“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작업받침대를 설치해주러 갔습니다. 일당 오만원을 받고 하는 일입니다.”

“그래요? 좋습니다. 좀 구체적으로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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