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미국이라는 우리의 난제
한국의 이십대, 탈미를 상상하다
이병한 李炳翰
1978년 출생. 연세대 인문학부 졸업. 현재 샹하이 쟈오퉁(交通)대학 국제학대학원 재학중. Ibh7826@hanmail.net
하늘 높이 솟는 불, 우리의 가슴 고동치게 하네. 이제 모두 다 일어나, 영원히 함께 살아가야 할 길 나서자.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 사는 세상 더욱 살기 좋도록.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서로서로 사랑하는 한마음 되자, 손잡고.
1988년 무던히도 많이 듣고, 또 많이 불렀던 노래다. 목놓아 노래 부른 우리들의 기운이 전해진 것일까. 이듬해 베를린 장벽이 정말로 무너졌다. 서독과 동독의 사람들이 손에 손을 잡고 벽을 넘어선 것이다. 이어 동유럽이 붕괴되었다고 했고, 마침내 소련도 해체되었다. 그 일련의 사태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올림픽 당시 느꼈던 당혹감을 다소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당시 열살짜리 ‘반공소년’이었던 내게 올림픽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필드와 링에서 실력을 겨루는 또 하나의 전장이었다. 그 다툼에서 소련이 1위, 동독이 2위를 차지했고 미국은 3위에 그쳤다. 충격이었고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였다. 내 머릿속에서 서열화되어 있던 세계지도가 순식간에 동요했다. 견고히 구축된 그 지도 안에서 존재하며 세계를 인식하던 나의 실존마저도 흔들리는 불쾌한 체험이었다.
그러나 89년 이후의 역사적 격변은 올림픽이 끝나고도 쉬이 가시지 않던 찝찝함과 미심쩍음을 단숨에 해소해주었다. 다소의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미국과 ‘자유세계’는 끝내 승리했다. 진즉 그래야 하는 필연의 산물이었고 역사의 순리이기도 했다. 때로는 지체되고 후퇴하지만 그래도 역사는 전진한다. 그렇게 나는 ‘진보’를 굳게 믿고 있었다. 바야흐로 미국이 단일패권을 쥔, 그래서 온세상이 미국화되는 그런 ‘멋진 신세계’가 도래하고 있었다. 이 멋진 신세계에 도취한 미국의 한 지식인은 ‘역사의 종언’을 선포하기도 했다. 그 역사의 종착지에서 우리들의 십대는 막 시작되었다.
그런 내가 어느덧 이십대의 끝자락에 있다. 2006년, 현실은 그저 앙상하다. 지리멸렬한 한국의 오늘과 위태위태한 한반도와 세계의 현재를 보노라면 87년 민주화운동의 함성과 89년 자유진영의 승리에 대한 환호가 무색해질 지경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그래서 나는 미국이 곧 세계였던 지난 20년을 복기해보고 싶다. 내 삶에 녹아 있던 미국을 추출해내 심문해보려 한다. 나의 경험이 우리 세대를 대표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과 함께 미국의 강력한 자장 속에서 20년을 살았다는 점에서 일정한 전형성은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미국의 주술에서 벗어나기까지 내가 겪은 짧은 성장기다.
1990년대 1—서태지와 체 게바라
문화의 시대, 욕망으로 들끓던 사춘기의 우리에게 소비자본주의가 꽃핀 90년대는 그야말로 황금시절이었다. 내 방의 벽은 뉴키즈온더블럭, 마이클 볼튼, 머라이어 캐리 등 당대를 주름잡던 미국 팝가수들의 브로마이드로 도배되어 있었다. ‘아메리칸 탑 포티’라는 라디오 방송을 꼬박꼬박 챙겨 듣고 빌보드차트를 줄줄 외우고 다니며, ‘가요톱텐’에 머물러 있던 또래들 사이에서 야릇한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거대한 지진해일 같은 농구붐이 밀려오기도 했다. 『슬램덩크』는 우리 세대의 바이블이었고 연세대와 고려대의 농구부는 여학생들의 우상이었다. 나는 잰 척 한걸음 더 나아가 미국 프로농구 NBA에 탐닉했다. 홍콩의 위성방송을 통해 NBA선수들이 펼치는 신기에 가까운 경기를 넋놓아 지켜보았고, 내 방의 벽지는 어느새 혀를 쑥 내민 얼굴로 허공에 떠 있는 마이클 조던으로 바뀌어 있었다. 운동화는 언제나 ‘Air Jordan’이 새겨진 나이키였고, 그것을 신는 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멋지고 당당했다.
우리는 말 그대로 ‘소비하는 주체’였고 소비를 통해 자아를 구성해갔다. 빌보드, NBA, 나이키, 할리우드를 소비하면서 특별히 ‘미국’을 의식하지는 않았다. 그것들은 나의 욕망을 표현하고 실현하는 훌륭한 도구이자 기호였을 따름이다. 미국은 우리의 일상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었고 우리의 삶과 정체성을 구성하는 내부화된 코드였다.
그런 우리의 자유분방함은 ‘개인’의 탄생으로 예찬되고, 그 일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낯설지만 근사한 어휘로 포착됐다. 돌아보면 우리를 수식하던 그 언어의 인플레는 사회주의가 몰락한 90년대를 살아가기 위해 제1세계에서 빌려온 탈혁명의 처세술이었다. ‘거칠었던 과거’를 반성한 뭇 혁명가들은 퇴폐한 양키문화라 손가락질했던 대중문화에 새 둥지를 틀어 밥을 벌었고, 때마침(소련 해체 이듬해) 등장한 서태지는 그들의 구세주가 되었다. 공장노동자들의 록에 슬럼가 흑인들의 랩비트를 섞고 태평소 가락 한구절도 삽입한 「하여가」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논하고 판소리와 탈춤에 몰두했던 그들이 더 흥분했다. 서태지의 반항기는 한없이 부풀려졌고 세계를 바꾸는 것 대신 비꼬는 것이 ‘문화혁명’이 되었다. 덕분에 그의 CD를 사고 미국의 좌파 밴드 레이지어게인스트더머신의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우쭐댈 수 있었다. 진보는 소비되었고 체 게바라는 액세서리가 되었다. 너무 다른 우리와 그들은 그 기묘한 담합 속에서 미국이 승리한 90년대를 공유했다. 그러다 1997년 IMF가 터졌다.
1990년대 2—IMF에서 씨애틀까지
90년대의 아이콘 서태지는 96년 은퇴했다. 그가 홀연 미국으로 떠나자 돌연 IMF가 찾아왔다. 주가는 바닥을 모르고 폭락했고 환율은 천장을 모르고 치솟았다. 도대체 실체를 알 길 없는 저 거대한 씨스템에 의해 우리 삶의 기반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정권이 교체되었고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되고 꽃은 피는데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의 한파가 몰아닥쳤다. 벚꽃이 만발하던 4월의 포근했던 어느날, 우리는 87년 TV에서 보았던 격동의 한복판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그날 서울대에서는 서울지하철과 공공부문 노조, 대학생들이 집결해 민주화 이후 10년 만에 ‘노학연대’가 부활했다. 혼란스럽게도 10년 전의 민주화 주역들이 우리와 대치하고 있었다. 역사는 기묘하게 굴절했다. 우리에겐 낯설기 그지없던 박정희의 유령이 한반도를 떠돌기 시작했고 ‘그때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독버섯처럼 퍼져나갔다. 전경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