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연구, 어디까지 왔나
강정숙 姜貞淑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원. 한국정신대연구소장,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전문위원 및 조사관 등 역임. wumright@hanmail.net
2015년 12월 28일, 한일 정부의 갑작스러운 일본군‘위안부’1) 합의안 발표는 높은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한국 외교부의 속없는 성과 자랑과는 달리, 일본정부는 ‘강제연행 증거가 없다’고 유엔에서 발언하고 미국 할리우드에서 국가 홍보 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등2) 군‘위안부’를 비롯하여 독도 등 국제적 분쟁을 자국에 유리하게 끌고가기 위한 전략을 꾸준히 수행 중이다. 교육 영역에서도 어두운 과거사 지우기를 착실히 진행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정부는 이러한 일본정부의 움직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뿐 아니라 대내적으로 여성가족부,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등에서 해오던 각종 조사연구에 대한 지원조차 중단하거나 축소하였다.
‘위안부’ 문제 진상규명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2011년 8월 헌법재판소 판결3) 이전에는 극히 제한적이었고, 판결 이후에도 여성가족부에서 운영하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 사업과 백서 등 몇가지에 국한되었다. 그나마 연구자들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이러한 지원마저 정부가 끊어버린 지금, 문제해결은커녕 진상규명에 대한 의지는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안부’ 문제의 연구성과와 과제를 짚어봄으로써 앞으로의 연구와 문제해결의 방향을 가늠해보는 작업이 절실하다. 과연 일본과 합의할 수 있을 만큼 양국의 문제인식이 근접했을까. 그리고 한국정부의 접근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여기서는 한국의 역사분야 연구성과를 중심으로 다루면서 한일 간의 주요 쟁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역사연구 성과를 중심으로 접근하려는 이유는 무엇보다 역사연구가 사실 확인에서 시작한다는 점에 있다. 어떤 학문영역에서도 객관적 사실을 공유할 수 있다면 논점은 명쾌해지고 논쟁 해소나 문제해결에 한발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
군‘위안부’ 문제제기와 진상규명 작업
1988년 한국기독교여성단체협의회가 주최한 국제세미나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사회적으로 처음 제기되었을 때, 공개적으로 자신을 드러낸 한국 거주 피해자는 없었다. 당시에는 발굴된 자료도 그리 많지 않았으며 피해자를 지칭하는 용어도 ‘정신대’를 사용하였다. 한국에서는 이미 식민지 경험과 일본에서 전달된 정보 등으로 군‘위안부’에 대한 일정한 이미지, 즉 수만명의 어린 처녀들이 일본 관헌의 직접적인 물리력에 의해 동원되었다는 상(像)이 상당히 강하게 구축되어 있었다.
군‘위안부’보다 해방 직후 언론4)에서 쓴 여자정신대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어온 관계로 관련 운동 초기인 1990년에 조직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도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곧 1992년경에 들어서는 역사적 용어로서 ‘위안부’, 그 성격으로는 성노예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피해자가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정대협을 비롯한 한국의 여성단체들이 일본정부의 책임 문제를 제기했으나 일본의 우익은 ‘위안부는 공창’이라든지 ‘민간업자가 한 일’이라는 등의 발언을 계속했고, 일본정부도 군‘위안부’ 동원 등에 대한 관의 관여를 일체 부정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의 태도에 분노한 김학순(金學順)은 1991년 8월, 일본군에 의해 당한 피해를 공개증언했고, 이후 다수의 피해자가 한국사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피해자 등장 이후 관련 단체들은 피해자 지원을 위한 법 제정운동을 벌이는 한편 생존피해자에 대한 구술 녹취작업을 시작했다. 피해 진상을 밝히려는 급박한 요구 속에서 1993년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증언1집(한울)이 간행되었다. 군‘위안부’ 문제가 외신을 타고 국제적인 관심사가 되자 중국 우한(武漢) 등지에 피해자 여러명이 생존해 있다는 소식이 국내에 전해졌다. 이에 중국의 미귀환 피해자들에 대한 조사로 이어져 『중국으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제1집(한울 1995)이 나왔으며, 지금까지 구술집 간행 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피해자 구술은 당시 문서자료가 거의 없던 한국에서 소중한 사료이자 피해자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려는 운동의 에너지원이 되었다. 공문서가 피해자의 소상한 경험을 대신할 수 없는 만큼 피해자의 시선에서 이 문제를 볼 수 있게 해주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1992년 1월 역사학자 요시미 요시아끼(吉見義明)가 군위안소 설치와 ‘위안부’ 모집 등에 일본정부가 관여한 공문서를 공개했다. 이로 인해 정부의 관여가 없었다고 주장하던 일본정부는 태도를 바꾸어 정부 차원의 자료조사를 시작했다. 요시미 교수가 모은 자료를 기초로 간행한 자료집5)과 일본정부가 1992~93년 조사·공개한 공문서가 국내에 전달되면서 피해자 구술자료와 더불어 문서자료에 기반한 역사연구가 진행될 수 있었다.
주요 주제별 연구성과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사회적으로 대단한 관심사인 데 반해 국내 역사연구는 빈약한 편이다. 그래도 나름의 중요한 성과를 시기별로 개괄해보면, 첫 시기에는 피해자가 출현한 초기의 집단작업 결과물인, 앞서 언급한 증언집과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진상』(정대협 진상조사연구위원회 엮음, 역사비평사 1997) 간행이 이뤄졌다. 두번째 시기에는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여성국제법정’ 설립과 관련하여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책임을 묻는다』(정대협 엮음, 풀빛 2001) 등이 출간되고 구술방법론에 진전이 있었다. 세번째는 2011년 헌법재판소 판결 이후 정부기관의 지원으로 여러 연구자에 의해 다양한 연구가 수행된 시기이다. 현재 정부의 지원은 대부분 중단되었지만, 이때 뿌려진 씨앗은 연구자 확대에 보탬이 되었다. 아래에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밝히는 데 중요한 역사적 주제 및 한일 간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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