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 | 장르문학과 한국문학

 

한국의 SF, 장르의 발생과 정치적 무의식

복거일과 듀나의 SF를 중심으로

 

복도훈 卜道勳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포스트모던 문명의 불만, 괴물들의 이상한 가역반응」 「시체, 축생, 자동인형」 「연대의 환상, 적대의 현실」 등이 있다. nomadman@hanmail.net

 

 

1. SF, 미래에 대한 질문

 

이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간단하지만 선뜻 답변하기엔 의외로 곤란한 질문 하나를 단도직입적으로 던져보자. 최근의 한국소설(비평)은 역사(과거)에 대한 해체적 상상력을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발휘하고 있다. 그 성과는 그런대로 풍요롭다. 그런 반면, 미래에 대한 상상력은 좀처럼 찾아보기 쉽지 않다. 혹시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 말하기를 주저하는 방식으로 과거만 그토록 문제 삼는 것은 아닌가. 풍요와 빈곤의 기형적 현실은 문학의 장르 내에도 반영되어 있다. 그러자 “무슨 소리!문학은 가장 희망에 차 있을 때에도 엄연히 부정성을 고수해야 하며, 가장 강렬한 부정을 통해 역설적 긍정이 이야기되는 것이오”라는 이구동성의 합창이 도처에서 들려온다.‘희망의 원리’(블로흐)보다는‘부정변증법’(아도르노)이 여전히 대세다. 침윤된 비관주의라는 공통감각이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문학의 정직한 전제조건이라 간주되는 때이며, 느리고 끈질기더라도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상상력보다 단번에 그것을 파괴하려 드는 공상이 더 솔깃한 시대다. 그러나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선구자인 샤를 푸리에(CharlesFourier)를 비틀어 말해보면, 사람들은 고통과 불행에는 온갖 상상력을 발휘하지만 엄청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상상하지 않으려 한다. 미래를 묻는다는 것은 당위적 전망이나 예언을 하는 행위라기보다는 삶을 다르게 상상하는 방법이 아닐까. SF가 그 방법 중 하나가 될 수는 없을까.

한국문학의 장르적 정체성이 급격한 해체를 겪고 있으며, 또한 각 문학 장르간의 이질혼효(異質混淆)가 두드러지는 현상은 더이상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 SF장르를 선구적으로 개척한 복거일(卜鉅一)과 듀나의 SF를 다루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다. 그 예로, 이미 수많은 논의가 있어왔지만, 김영하의 『검은 꽃』, 김훈의 『칼의 노래』, 신경숙의 『리진』 등으로 대표되는 이른바‘뉴에이지 역사소설’(서영채) 등의 명칭으로 통용되는 역사소설의 한 경향을 보자. 이 작가들은 공적이며 기록사관적인 역사 개념을 내파하면서 좀더 은밀하고 숨겨진 역사적 재료들의 틈새에 잠입하여 자신만의 또다른 서사를 상상적으로 주조해낸다. 거기에 마술적 활극(김영하), 내적 독백(김훈), 로맨스(신경숙) 등의 장르가 역사소설 장르에 이접되면서 장르 혼효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역사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해체의 좀더 단순한 과정은 이인화, 김탁환의 역사소설에서도 나타난다. 그들의 소설에서 역사는 반영으로서의 현재의 전사(前史)가 아닐뿐더러, 앞서 언급한 김영하 같은 작가들이 염두에 두는 장르적 대당(counterpart)도 아니다. 역사는 이인화, 김탁환 등의 작가들에게는 도구적으로 활용되는 미장쎈이나 장신구에 훨씬 더 가깝다. 이 작가들이 그려내는 역사는 조선후기라는 특정한 시공간을 탈현대로 통째로 옮겨놓은 박물관과 흡사하다. 그들의 소설에서 18~19세기의 조선은 포스트모던한 중세로 뒤바뀌게 되며, 구한말이나 1930년대의 샹하이에 대한 모방에서 역사는 더이상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낭만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유물, 집단적 기억보다는 영웅서사적 주인공의 사적 전유물로 둔갑하는 고고학적 토포스(topos)가 된다.

그러나 역사소설의 장르적 변화에 대해 숱한 이야기들이 오갈 때 정작 거의 참조되지 않거나 무시되는 『역사소설론』의 저자 루카치(G. Lukács)는 서구 역사소설 장르의 쇠퇴를 이야기하는 중에 플로베르(G. Flaubert)의 『쌀람보』(Salammbô)를 예로 들면서 역사가 일종의 역사의 의장(意匠)을 한 고고학으로 대체되고 있음을 주목했다. 시효가 완료된 이러한 생각에서 살릴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가 고고학으로, 과거라는 시간개념이 고고학적 발굴의 무덤으로 대체되는 최근 역사소설의 형질변화에 어떤 조망을 던져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루카치가 『쌀람보』를 고찰하면서 역사소설 장르의 쇠퇴를 보았던 시기, 1848년의 혁명 좌절 이후의 그 시기는 한편으로는 SF가 난만한 꽃을 피우던 때이기도 했다.1 현재를 비춰줄 수 있는 전망으로서의 역사를 잃어버리자마자, 작가들은 미래를 상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루카치와 같은 역사적 문맥에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 글에서 복거일과 듀나의 작품들2을 통해 다루려는 SF라는 장르적 발생에 대한 질문은 이런 물음과 궤를 같이한다. 적어도 세계체제 혹은 분단체제의 정치경제적 지형변화와 관련하여 미래에 대한 한국문학의 상상력은 어떤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한국 SF작가들의 작품을 통해서 어림짐작이라도 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그들은 어떤 미래를 상상해왔던 것일까. 현실에 대한 반영을‘낯설게 하기’라는 미적 과정을 통해 대안사회 또는 대안의 정치적 삶을 구성한다는 SF에 대한 정의 중 하나는, 최근 한국문학 전반에서 진행되는 장르 혼효의 과정을 서둘러 찬탄하기에 앞서 복거일과 듀나 같은 SF작가들의 선구적인 작업의 의의와 문제점을 찬찬히 되묻게 만든다.

장르소설로 분류되는 SF에 대한 일련의 정의들은 문학의 여타 장르에 대한 정의만큼이나 각양각색이며, 작가에 따라서도 천양지차다. 과학소설(Science Fiction)로 번역되는 SF는‘과학적 사실과 예언적 비전이 융합된 매력적인 로맨스’라는 최초의 정의에서‘인식론적 소외와 낯설게 하기를 특장으로 갖는 반(反)리얼리즘적 허구 서사물’이라는 비교적 최근의 정의에 이르기까지 변화무쌍한 시공간의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정의의 역사 또한 갖고 있다. 복거일과 듀나는 SF장르에 대한 자의식에서 스타일과 사고방식, 정치적 성향에 이르기까지 상이하며, 어떤 경우는 전혀 상반된 행보를 보여주지만, 90년대부터 본격화된 한국 SF장르의 고유한 특색과 미래에 대한 상상력의 단초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마땅한 작가들이다.

 

 

2. 한 자유주의자의 미래프로젝트

 

소설가, 시인, 사회비평가 등의 다양한 경력이 말해주듯, 복거일은 예술의 근대적 분업화의 결과인 저자(author)나 소설가보다는, 전통적인 동아시아 지식인의 형상인 박람강기(博覽强記)의 문사(文士)라는 명칭에 더 부합하는 작가다. 첫 장편 『비명을 찾아서』에서 『그라운드 제로』에 이르는 근 20년의 창작기간에 그가 쓴 작품의 상당수는 장르적으로는 SF에 속하지만, 그 안에는 작가의 시편들과 한국사회의 지식계에서 논쟁이 되었던 수많은 사회비평적

  1. 프레드릭 제임슨에 따르면, 역사소설과 SF는 서구의 서사장르의 발생적 역사에서 거의 동시대적인 장르다. 역사소설 장르의 최초 작품인 월터 스콧(WalterScott)의 『웨이벌리』(Waverley)는 1814년, SF의 최초 작품으로 불리는 메리 셸리(Mary Shelley)의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은 1818년에 출간되었다. Fredric Jameson, Archaeologies of the Future: The Desire Called Utopia and Other Science Fictions, London & New York: Verso 2005, 1~2면.
  2. 본문에서 인용되는 복거일과 듀나의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복거일 『비명을 찾아서』(문학과지성사 1987) 『역사 속의 나그네』 전3권(문학과지성사 1991) 『역사 속의 나그네』 연재(사이언스 타임즈 2005~2006; 판타스틱 2007~2008) 『목성 잠언집』(랜덤하우스중앙 2002) 『그라운드 제로』(경덕출판사 2007), 복거일 시론집 『벗어남으로서의 과학』(문학과지성사 2007). 듀나 『면세구역』(국민서관 2000) 『태평양 횡단 특급』(문학과지성사 2002) 『대리전』(이가서 2006) 『용의 이』(북스피어 2007). 복거일 외 『얼터너티브 드림』(황금가지 2007). 앞으로 텍스트를 본문에 인용할 경우, 괄호 안에 작품명과 면수를 함께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