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한국학의 역정과 동아시아 문명론

 

 

임형택 林熒澤

성균관대 명예교수. 동아시아학술원장 역임. 저서로 『실사구시의 한국학』 『한국문학사의 논리와 체계』 『문명의식과 실학』 등이 있음.

 

한기형 韓基亨

성균관대 교수, 국문학. 저서로 『한국근대소설사의 시각』 『근대를 다시 읽는다』(공저) 『근대어·근대매체·근대문학』(공저) 등이 있음.

 

홍석률 洪錫律

성신여대 교수, 사학. 저서로 『통일문제와 정치사회적 갈등』 『1960년대 한국의 근대화와 지식인』(공저), 『박정희시대 연구』(공저) 등이 있음.

 

ⓒ이영균

 

 

한기형 지금을 문명적 전환의 와중이라고 본다면 오늘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인문학의 지혜와 경세학의 통찰을 두루 겸비한 원로들의 견해를 경청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근 40년간 국학연구의 중심에서 활동하셨고 또 최근에는 동아시아 문명의 흐름에 대한 예리한 시각을 보여주신 임형택 선생님과 함께하는 이 좌담은 그런 의미에서 뜻깊습니다. 대담자 두 사람 모두 근현대 연구자로 임선생님의 주된 관심 분야인 고전과 전통에 대한 식견이 충분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창비 측에서 저희 둘을 선택한 것에는 임선생님의 학술역정에 담긴 현재적 시무성(時務性)을 발견해달라는 각별한 뜻이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선생님은 올해 2월 정년을 맞아 과거에 비해 자유로운 처지가 되셨는데요. 간단한 소회를 말씀해주시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하면 어떨까요?

임형택 생애의 가장 중심이 되는 기간을 학교에 몸담고 있다가 정년을 맞으니까 우선 해방감이 들었어요. 『교수신문』에서 신년초가 되면 금년의 사자성어를 뽑아 제시하잖아요. 정년을 맞으면서 떠올린 사자성어가 하나 있는데 ‘소통지원(疏通知遠)’이에요. 본디 『예기(禮記)』에 나오는 말인데, 소통을 해서 멀리까지 알 수 있다는 의미이고, 소통을 해야 지식이 멀리까지 갈 수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요. 어느 쪽이건 다 긴요하다고 생각됩니다만, 후자의 뜻에 비중을 두고 싶어요. 연구자로서 소통을 한다고 할 때 우선 시대와 소통하고, 사람들 즉 독서대중과 소통하고, 또 지식의 경계를 소통하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그래서 나는 이걸 ‘삼통(三通)’이라고 부릅니다. 지금 나로서는 소통을 한답시고 설치고 나설 입장은 아니고, 조용히 소통의 자세를 지키겠다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웃음)

 

4·19의 시대적 분위기와 대학생활

 

홍석률 선생님은 60년대초 대학에 들어가 국문학에 입문하셨는데, 그때 대학가의 분위기는 아마 1960년에 발생한 4·19 민주항쟁의 파장 속에 놓여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최근 1919년 3·1운동을 한국과 동아시아 근대문화 형성의 진정한 기원으로 재평가하는 글을 발표하셨는데, 그렇다면 4·19는 우리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닌다고 보시나요? 선생님께서 학문연구, 그중에서도 국학연구에 입문하신 것은 4·19 이후의 사회 분위기와 관련이 있겠지요?

임형택 나는 1919년 3·1운동이 5·4운동과 함께 동아시아에서 진정한 의미의 근대의 출발선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대를 편의상 현대라고 부른다면, 1945년이 현대의 시작이지만 진정한 의미의 현대는 1960년의 4·19로 출발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3·1운동이 식민지배를 종식시키지 못했듯이 4·19도 바로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로 반전되고 말지요. 하지만 4·19로 타오른 해방과 민주의 불길은 꺼지지 않고 내연(內燃)해서 마치 활화산처럼 억압을 뚫고 밖으로 분출했어요.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의 어린 나이에 하나의 분자로서 시위대열에 끼었을 뿐인데, 자신이 참여한 운동이 이승만 독재의 철벽같은 아성을 무너뜨렸다는 사실이 굉장히 놀라웠고, 벅찬 감격이었습니다. 그때 막연하지만 마음속으로 어떤 민족의 대서사시 같은 것을 그려봤고, 그래서 그런 의식이 국문학과로 들어가게 만든 것이 아니었나 해요. 그런데 국문학과에 들어가서는 전공분야를 한문학 쪽으로 돌렸고, 처음에 꾸었던 꿈은 접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형식을 달리해서 표현을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기형 소설가가 되려다가 학자가 되신 건가요? 소설가가 되셨다면 한국문학사의 획기적인 작품을 쓰시지 않았을까요?(웃음)

임형택 고등학교 3학년 때 입시공부 안하고 소설을 썼거든요. 그런 게 말하자면-

한기형 제목이 뭐였나요?

임형택 ‘빈터에 서다’였어요. 이 제목은, 염상섭이 『만세전』에서 3·1운동 당시의 조선 현실을 묘지로 생각했던 것처럼-물론 당시 내가 『만세전』의 원제인 ‘묘지’와 관련해서 제목을 잡았던 건 아니지만요-4·19 시점의 황량한 심리적 상태를 표현하려고 했지요. 작가 황석영이 나하고 동갑내긴데 속으로 내가 만약 소설을 썼다면 황석영과 비교해서 어땠을까, 아무래도 내가 못 따라갔겠죠.(웃음)

한기형 그럼 황석영 선생을 적수로 생각하고 작가의 꿈을 접으신 겁니까?(웃음)

임형택 그런 건 아니고, 그때는 황석영이란 존재를 알 수 없었으니까(웃음). 이쪽 한문학의 자장이 강력해서 끌려간 셈이지요.

홍석률 선생님은 하여튼 4·19를 원체험하신 거지요. 고등학교 때 직접 시위에 참여했으니까요. 그러면 대학 때 발생한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어땠나요? 당시 이 운동은 한국의 민족문제에 대한 인식과 이와 관련된 민족주의를 자극했을 거라고 봅니다만, 젊은 국학연구자들의 동향은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임형택 1964년의 6·3운동은 대학교 3학년 때지요. 내가 대학에 들어간 첫해 봄에 한미관계에 대한 개선을 촉구하는 데모가 있었어요. 그땐 5·16 직후라 삼엄한 계엄령하였지요. 이후로 개학이 되고 대학가에 개나리가 피면 데모를 하지 않고 넘어가는 해가 없었습니다. 나는 데모의 정치적 이슈에 동의해서 참여하는 편이었지만, 앞장서서 주도한다든지 직접 정치운동에 나선다든지 하는 것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1960년대는 대학 캠퍼스가 일종의 해방구 같은 분위기였어요. 70년대 중반부터는 경찰이나 기관원들이 대학에 들어와 있었고 상황이 발생하면 즉각 체포하고 그랬지만 그때는 아무리 가두시위를 벌이고 투석전을 하다가도 캠퍼스 안으로 들어오면 안전했거든요.

나는 통상적인 구분으로는 6·3세대지만 6·3은 역시 4·19의 연장선상에 있으니 나 자신을 4·19세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4·19로 해방된 자유와 창조의 정신이 적어도 캠퍼스 안에서는 충만했어요. 요즘은 ‘신세대’라고 하지만 그땐 ‘새세대’라는 말이 유행했어요. 저는 60년대에 일어난 상황을 ‘새세대 문화운동’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민중문화의 범주에 속하는 가면극(탈춤), 판소리, 민요 등 여러가지 민속적인 연희형태를 새롭게 발견하는 작업이 진행되는데 이 과정에서 전통계승이란 주제가 제기됐습니다. 조동일(趙東一) 선생 주도로 ‘우리문화연구회’라는 단체가 결성됐고, 좀더 학문적인 결사체로 젊은 한국사학도들이 주축이 된 ‘연사회(硏史會)’라는 것도 있었어요. 기성세대의 역사연구에 반기를 들고 좀더 주체적이고 민족적이고 진취적인 입장에서 우리 역사와 사상을 연구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이 연사회에는 영남대 계시다가 돌아가신 정석종(鄭奭鍾) 선생이 권유해서 저도 뒤늦게 참여했는데, 70년대로 와서는 내부 갈등이 있어서 연사회라는 이름으로 존재하진 못했지요. 송찬식(宋贊植), 정창렬(鄭昌烈), 이성무(李成茂), 한영우(韓永愚) 이런 분들이 중심 멤버가 아니었던가 싶어요. ‘새세대 문화운동’으로 포괄할 수 있는 범위가 여러 분야에 걸쳐 넓은데, 한국 근대에서 상당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봅니다. 그 지향점은 반권위주의적, 반서구중심적인 민족문화운동 정도로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한기형 1960년대 중반의 선도적 지식인들이 민중문화에 접근하면서 구비전통과 국문전통에 주력하는 문화적 경향성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는데, 선생님은 그 반대편인 한문학에 공부의 주안을 두셨습니다. 어떤 이유로 당시의 새로운 지식문화의 일반적인 흐름과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한문학 입문과 잊지 못할 스승들

 

임형택 그건 아마 내 개인적인 것하고 관련이 있을 텐데요.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고향엘 갔어요. 우리 종가는 6·25전쟁에 화를 당해서 거의 폐가처럼 되어 있었어요. 그 집에서 선조부터 내려온 서롱(書籠)에 담긴 책과 고문서를 꺼내보니까 쥐가 쏠고 좀이 먹어서 완전히 버려진 상태였어요. 그래서 쥐똥을 떨어내고 거풍(擧風)이라도 시키면서 고서만이라도 최소한 어떻게 정리해서 목록을 만들자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대로 대충 작성한 목록을 지금도 소중하게 간수하고 있습니다. 그 산적한 고문적의 더미가 당시 내 눈에는 까만 건 글자고 하얀 건 종이였죠. 그래도 이렇게 방치해도 되느냐, 얼마 전까지 우리 조상님들이 소중하게 보고 또 직접 남긴 글도 있는데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다니던 국문과의 ‘국문학개설’ 과목에는 국문학의 개념 규정상 한문학은 국문학의 범위 밖이라고, 그러니 한문학은 우리 문학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겁니다. 학문적으로 접근이 되지 않는 자료가 아무리 쌓여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었지요. 그래서 이걸 누구라도 연구해야 되지 않느냐, 이런 생각을 비교적 일찍 갖게 됐어요.

홍석률 한문학을 하시게 된 데에는 남다른 가정적 배경 외에도 특수한 사사 혹은 사숙의 경험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거의 사라진 전통이지만요. 대학에서 가르침을 주신 분도 있겠고, 신호열 성낙훈 이우성 선생님들을 사사하셨다고 알고 있는데, 당시의 분위기와 재미있는 일화들을 말씀해주시죠.

임형택 저는 스승 복을 타고난 사람인 것 같아요. 선생님이 여러 분인데다 많은 사랑을 받은 편이기 때문입니다. 제도권의 사제관계와 제도권 밖의 사제관계로 구분해서 말할 수 있겠는데요. 대학의 국문과에서 고전문학 전공의 정병욱(鄭炳昱) 선생님, 장덕순(張德順) 선생님을 통해서 국문학에 입문했는데, 이 분들이 제게 베푼 관심과 사랑은 각별해서 잊혀지지 않습니다. 내가 교수가 되어서 제자들에게 내가 받았던 만큼의 관심과 사랑을 베풀지 못해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곤 합니다. 국어학 선생님들께도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근대학문이 요구하는 엄정성과 객관성을 이해할 수 있었지요. 그런데 당시의 대학제도에서 한문학은 완전히 배제된 상태였습니다. 한문학을 연구하겠다고 마음을 굳혔는데 한문을 배울 곳도 없고, 전인미답(前人未踏)의 한문학을 어떻게 개척할지 막막했습니다. 독학으로 한문 독해를 공부해보려 했지만 아무래도 어려움을 느껴서 먼저 찾아간 분이 우전(雨田) 신호열(辛鎬烈) 선생님입니다. 그때 전통적인 한학자들은 아무리 대가라도 자기 지식으로 먹고살 길이 거의 없었지요. 우전 선생님만 해도 처음 찾아가 뵈니까 집 한칸도 없이 하숙을 하고 계셨어요. 대학원 시절에는 방은(放隱) 성낙훈(成樂熏) 선생님을 찾아갔는데 역시나 그때로선 변두리인 답십리에 살고 계셨습니다. 역사학 전공의 몇분과 함께 공부했는데, 사람이 다섯만 되어도 하나는 문 밖으로 나가야 했어요.(웃음) 이 두 선생님을 통해서 한문 원전을 독해하는 역량을 길렀고 더불어 전통적인 학문자세를 접하면서 근대 학문의 문제점을 많이 느끼게 됐습니다.

그리고 벽사(碧史) 이우성(李佑成) 선생님을 들어야겠어요. 벽사 선생님은 성균관대 교수로 계셨으니까 제도권이지만 내가 대학 4학년 때 개별적으로 찾아가서 학연을 맺었으니 굳이 나누자면 제도권 밖입니다. 누가 그래요. 성대에 이우성이란 분이 있는데 한문학에 정통하고 역사학자로서도 대단한 존재라고. 벽사 선생의 고려사 관련 논문을 읽어보니까 놀라웠어요. 제가 그분 연구실로 처음 찾아갔을 때 연세가 만으로 마흔이셨어요. 그래도 얼마나 근엄해 보이는지 두렵기도 했지요. 그런데 나는 어른 앞에서 주눅이 잘 들지 않아 나쁘게 보면 버르장머리가 없고 좋게 보면 용기가 있다거나 학구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웃음) 벽사 선생은 불쑥 찾아온 타교의 학생에게 정말 열정적으로 학문의 길과 민족·역사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더라고요. 그야말로 도도한 강론을 듣다보니 꽤 시간이 흘렀는데 퇴근하시는 길에 버스를 탈 때까지 그 준론이 이어졌던 기억이 납니다. 다른 선생님들은 진작에 돌아가셨고 지금 오직 벽사 선생 한분이 건재하십니다. 조만간 선생님의 전집이 바로 창비에서 나오게 되어 감회가 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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