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한국현대사, 같고 다른 세가지 길

김종필, 이종찬, 임재경의 회고록을 읽고

 

 

한홍구 韓洪九

성공회대 교수, 한국현대사.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책임편집인. 저서로 『사법부: 법을 지배한 자들의 역사』 『역사와 책임』 『대한민국사』(전4권) 『유신』 등이 있음. hongkoo@skhu.ac.kr

 

 

회고록 읽기와 역사연구

 

문헌자료를 중심으로 연구하는 역사학도들에게 회고록은 사료로 쓰기도 애매하고, 무시하기도 힘든 참 골치 아픈 존재다. 구술 인터뷰의 경우는 그래도 질문자가 어느정도 개입하여 추가질문도 하고 반대증거도 제시할 수 있지만, 문자화된 회고록은 일방통행길처럼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다. 사람의 기억은 착오가 있게 마련이다. 의도적으로 자기변명이나 미화를 하려는 것이 아니더라도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어떤 것은 지워지거나 부풀려지고 어떤 것들은 서로 엉켜버린다. 하물며 어떤 역사적 사건의 핵심에 있었던 사람이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행동이나 결정을 정당화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면 그의 기억은 자발적인 왜곡의 과정을 겪게 된다. 회고록은 중요한 자료이긴 하지만 마치 오염된 시료처럼 실험에 사용하기는 매우 꺼려지는 자료가 아닐 수 없다.

필자가 처음 현대사에 관심을 갖게 된 1970년대나 80년대에는 워낙 연구서도 자료도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헌책방에서 『광복20년』 『정계야화』 『흑막』 『내막』 『사실의 전부를 기술한다』 같은 회고록이나 비화 등을 찾아 읽어야 했다. 이때는 『창작과비평』 등에 실린 현기영 김춘복 이문구 윤흥길 김원일 등의 소설이 해방에서 한국전쟁에 걸친 현대사에 대한 훌륭한 입문서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화가 진척되고 또 해외자료가 발굴되면서 원 사료에 대한 접근이 가능해지고 연구자의 층도 두터워짐에 따라 회고록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급격히 감소되었다. 특히 노무현정부 시기에 본격화된 과거사정리사업은 몇몇 사학자의 노력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방대한 사료를 발굴해냈다. 그렇지만 이런 사료들이 현대사의 광범한 영역을 모두 포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특히 권력 내부의 은밀한 이야기는 처음부터 자료가 만들어진 적도 없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여전히 회고록에 무엇이라 쓰였는가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회고록에는 공식사료에서 보기 힘든 관련자들의 인간성이나 생각, 서로의 관계, 인물평 등이 생생하게 나와 상황과 시대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권력의 핵심에 있었거나, 어떤 큰 역사적 사건에서 당사자로 활동한 사람들의 증언도 중요하지만, 권력의 외부에서 당대인의 생각을 전해주는 회고록 또한 소중하다.

요즘도 회고록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원조보수라 불리는 김종필(金鍾泌, 1926~ ), 광주학살을 통해 등장한 전두환정권에서 온건합리파란 묘한 위치를 점하다가 김대중정권 탄생의 1등공신이 된 이종찬(李鍾贊, 1936~ ), 그리고 평생을 비판적 언론인·지식인으로 일관해온 임재경(任在慶, 1936~ ) 세 사람이 최근에 낸 회고록1)은 특별한 관심을 끈다.

 

 

듣고 싶은 것은 없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많은 『김종필 증언록』

 

아마도 대중적인 관심이 가장 크게 쏠린 책은 『김종필 증언록』일 것이다. 한마디로 이 책을 평한다면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이다. 김종필은 자신은 “회고록을 쓰지 않겠다”고 했다면서 “자화자찬, 자기미화와 정당화의 늪에 빠질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110면). 그러나 안타깝게도 최근 몇년간 읽은 회고록 중 자화자찬과 정당화를 가장 많이 한 책이 아닐까 한다.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권력의 정점 부근에서 보낸 JP는 누구보다 깊은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고, 누구보다 할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분량도 1천쪽에 가깝다. 장을 볼 때는 이것저것 귀한 식재료를 많이 사간 것 같은데 막상 식탁에 내놓은 음식은 변변치 못한 격이다. 말한 것보다는 말하지 않은 것, 드러낸 것보다는 감춘 것에 더 관심이 가게 만드는 책이다. 원조보수를 자처하는 노정객이 인생 90에 입을 열었다면 더 솔직했어야 했다. 중앙일보 연재 당시의 제목은 ‘소이부답(笑而不答)’이었다. 이백(李白)의 유명한 시 「산중문답(山中問答)」에서 따온 말로, 왜 깊은 산속에 사느냐고 묻거든 빙그레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내 마음은 편안하다(問余何事栖碧山 笑而不答心自閑)는 뜻이다. 김종필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실컷 늘어놓았지 정작 현대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은 씩 웃으며 비켜갔다. 그 마음이 과연 이백이 말하듯 스스로 한가로운 것이었을까?

나는 젊은 시절의 김종필은 누가 뭐라 해도 패기만만하고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는 멋있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군사정권의 2인자였던 JP는 대학생들과의 토론을 피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그에게 꼭 설득된 것은 아니었다. 학생들은 야유로 JP를 맞이했지만 두세시간 열정적으로 학생들에 맞서 토론했던 그를 큰 박수로 떠나보냈다고 한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매력은 나이 든 쌀리에리가 재주 넘치지만 경박한 모차르트를 여전히 질투하고 부러워하며 회상하는 점에 있다고 할 것이다. 『김종필 증언록』에서 나는 비록 지금은 나이 들었지만 그런 JP를 만나고 싶었다. 늙고 주름진 쌀리에리가 자신이 바로 모차르트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력이 없다. 그 JP는 어디로 갔을까?

시작은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다. 특히 한국전쟁 개전 초기 한강 인도교를 폭파할 때 200미터쯤 떨어져 있던 김종필의 얼굴에 후두둑후두둑 사람의 피와 살점이 떨어졌다는 얘기는 너무도 생생했다. 김종필은 5·16군사반란의 이른바 ‘혁명공약’ 제1항,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第一義)로 삼”는다는 것이 박정희(朴正熙)의 좌익경력 때문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진술했다. 박정희의 좌익경력은 이제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이 대목에서 궁금한 점은 박정희의 좌익경력이 아니다. 정말 문제가 되는 점은 김종필 자신의 좌익경력이다. 미국은 또는 한국의 보수세력은 박정희의 좌익경력을 사실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박정희는 좌익의 조직체계 전체를 ‘분’ 댓가로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좌익의 입장에서 볼 때 박정희는 용서받을 수 없는 배신자였다. 그런데 JP는 달랐다. 당시 징병제도 아니었는데 서울대 학생이 장교도 아닌 사병으로 입대했다면 99퍼센트 좌익운동을 하다 경찰에 쫓겨 군으로 도망친 경우였다. 당시는 전산화가 되어 있지 않아 군입대가 경찰의 추적을 피하는 가장 안전한 피난처였다.2) 당시 미 대사관 서기관으로 있던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은 「군사정부 내에서의 공산주의자 영향력에 관한 테제」라는 비밀문서를 작성한 바 있다.3) 헨더슨은 김종필이나 그의 측근인 김용태(金龍泰), 장태화(張太和) 등 군사정권 요인(要人) 중 상당수가 “현재 공산주의 ‘슬리퍼’(활동하지 않고 숨어 있는 스파이)인지, 아니면 우리가 바라듯이, 단지 회개한 과거 좌익분자들의 친목집단인지는 입증되지 않은 상태”라고 주장했다.

김종필의 자민련 총재 시절 비서실장을 지낸 극우논객 이동복(李東馥)은 필자와의 인터뷰4)에서 깜짝 놀랄 증언을 했다. 미국이 5·16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다음날인 1961523일, 김종필은 이백여명의 내외신 기자들을 태평로 국회의사당에 모아놓고 기자회견을 했다고 한다. “혁명정부의 경제정책은 어떻게 됩니까”라는 어느 외신기자의 질문에 김종필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혁명정부의 경제정책은 사회주의로 나갑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동복은 이 사회주의는 이집트의 나세르(G. A. Nasser)식 사회주의였으며, “군사쿠데타 주체 가운데에 그 사회주의에 대한 미련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덧붙였다.

박정희는 자신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19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