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한국 근대를 살아냈을 뿐

기억과 현재성의 예술로서 『아버지에게 갔었어』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저서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21세기 한반도 구상』(공저), 역서 『필경사 바틀비』 『우리 집에 불났어』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공역) 등이 있음.

kiwookh@gmail.com

 

 

1. 기억과 현재성

 

신경숙의 신작 장편 『아버지에게 갔었어』(창비 2021, 이하 『아버지』)를 읽으면서 새삼 눈에 띄는 것은 작품 곳곳에 깔려 있는 크고 작은 기억들이었다. 이 기억들 중에는 아버지가 ‘나’의 글을 읽고 “별것을 다 기억한다”(『아버지』 49면, 이하 면수만 표기)라고 했을 때의 ‘별것’과 잠 못드는 밤 ‘나’가 펼쳐든 『그날들』에서 사진작가가 언급한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어떤 것” 혹은 “다시는 나타날 수 없는 그런 순간”(50면)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적잖은 기억들이 작가의 전작에서 등장한 바 있지만 새로운 서사와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런 기억들의 생생함은 어디서 생겨나는 걸까. 선형적인 시간관에서 기억의 서사는 과거의 영역을 다루며 현재와의 단절을 전제로 전개되지만, 신경숙 소설에서 기억은 과거에 속하는 완결되고 고착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현재의 시간대에서 벌어지는 ‘동사(動詞)’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이 점은 글쓰기에 대한 고민과 그 지난한 과정을 소설의 핵심적 일부로 통합하는 그의 ‘메타픽션’적이고 ‘생성적’인 작법을 통해 수시로 강조된다. 가령 『외딴방』(전2권, 문학동네 1995)의 ‘나’는 육년 전 하계숙과 희재언니 등과 함께했던 시절을 두고 “내게는 그때가 지나간 시간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낙타의 혹처럼 나는 내 등에 그 시간들을 짊어지고 있음을, 오래도록 어쩌면 나, 여기 머무는 동안 내내 그 시간들은 나의 현재일 것임을”(1권 85면) 느낀다. 이렇게 현재로 남아 있는 과거와 그것을 끌어내는 기억을 문학의 속성과 연관시키기도 한다.

 

현재성을 오래 생각해본다. (…) 미래소설이나 가상소설이라고 처음부터 작정을 해둔 게 아니면 글쓰기는 결국 뒤돌아보기 아닌가. 적어도 문학 속에서는 지금 이 순간 이전의 모든 기억들은 성찰의 대상이 되는 거 아닌가. 오늘 속에 흐르는 어제 캐내기 아닌가. 왜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지금 내가 여기에서 무얼 하려고 하는지 알기 위해서.(1권 86~87면, 강조는 인용자)

 

이때 ‘현재성’이란 선형적인 시간대의 실증적 현재가 아니라 개별자의 삶과 존재에 지금 생동하는 것, 시간이라기보다 존재의 떨림이다. 글쓰기가 “오늘 속에 흐르는 어제 캐내기”가 되는 차원에서 기억은 이를테면 ‘과거도 현재도 아닌 그 중간쯤의 시간’에 속할 것이다. 작가는 ‘기억’을 이렇게 현재성과 연동시켜 문학의 본질적인 속성으로까지 조명하지만, 기억의 한계 역시 분명히 인식한다. 가령 ‘나’는 “〔희재〕언니의 진실을, 언니에 대한 나의 진실을, 제대로 따라가”기를 염원하면서 “내가 진실해질 수 있는 때는 내 기억을 들여다보고 있는 때도 남은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도 아니었어. 그런 것들은 공허했어. 이렇게 엎드려 뭐라고뭐라고 적어보고 있을 때만 나는 나를 알겠었어. 나는 글쓰기로 언니에게 도달해보려고 해.”(1권 248면)라고 말한다. 이는 기억을 “공허”한 것으로 재규정한다기보다, 기억이든 사진이든 완결·고착된 재현물의 한계에 맞닥뜨릴 때 “뭐라고뭐라고 적어보”는 글쓰기라는 창조적 과정을 통해 그 한계를 돌파할 수 있으며 현재성을 구현할 수 있다는 뜻일 듯싶다.1

한 개인의 기억에 이런 한계와 불완전한 면이 있음에도 어째서 현재성의 예술에 요긴한 자원이 될 수 있는 걸까. 생활고에 몰려 한편의 영화만 더 만들어보기로 한 「미나리」(2020)의 감독 정이삭은 어떻게 새로운 시나리오를 쓸 것인지 고민하던 끝에 윌라 캐서(Willa Cather)의 『나의 앤토니아』(My Antonia, 1918)를 발견하게 된다. 한 소년의 네브래스카 농장에서의 성장기를 그린 이 소설은 아칸소 농장에서 자란 그의 마음에 속속 와닿았다. 처음에 이를 각색해 시나리오를 쓰려 했던 감독은 “감탄하기를 그치고 기억하기 시작했을 때 내게 삶이 시작되었다”는 캐서의 발언에 영감을 받아 자기 삶의 ‘기억’으로 영화를 만들기로 한다.2 자신이 어린아이일 때—영화 속 데이비드의 나이일 때—어땠는지를 써내려간 결과 그는 80개가량의 기억들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것만으로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고 ‘뭐라고뭐라고 적어보는’ 것에 해당하는 배치와 편집, 연기와 연출의 과정을 거쳐야 했을 것이다. 어쨌든, 만약 이 기억들 대신 자신의 기존 작품처럼 ‘개념있는’ 서사를 활용해서 ‘제작된’ 각본을 사용했더라면 이렇듯 생생한 영화로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경숙의 이번 장편 『아버지』는 작가의 삶에서 끌어올린 이런 기억들을 활용하되 기억이 지닌 한계를 직시하고 돌파하려는 분투의 결과물이라고 여겨진다. 이 글에서는 ‘개별자’로서의 한 비평가에게 이 소설이 왜 중요하게 느껴지는지를, 즉 기억이 어떻게 현재성의 예술인 작품을 일구어 역사를 써내는지를, 아버지의 진실에 닿기 위해 ‘뭐라고뭐라고 적어보는’ 직관과 성찰이 어찌하여 ‘나’ 자신의 진실에 닿게 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아버지와 ‘나’의 재회의 시간

 

『아버지』에서 서사의 중심축은 일인칭 화자인 큰딸 ‘나’와 아버지 사이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현재는 교통사고로 불시에 딸을 잃은 ‘나’가 노년의 아버지가 울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랜만에 J시(정읍)의 고향집을 찾아가 병든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나’는 딸의 죽음으로 인한 상심으로 부모와의 만남을 피해왔지만 오년의 세월이 흐른데다가 엄마가 병원 치료를 위해 상경하는 바람에 홀로 된 아버지의 곁에 있기로 한다.

아버지와 단둘이만 있는 터라 현재 시간대의 서사가 진행되는 중간중간 등장하는 과거의 시간도 대체로는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기억들은 J시의 집에 당도하기 전부터 ‘나’에게 찾아든다. 중학교 졸업 후 고향을 떠나기 전 ‘나’가 아버지 가게에 찾아가지만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졌을 때, 중학생이던 ‘나’가 대흥리 다리에서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29면)의 아버지와 마주치고 외면했을 때, 서울 이주 후 ‘나’가 J시의 역으로 자신을 마중 나온 아버지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고 집으로 달려갔을 때의 기억이 그것이다. 이 기억들은 시기와 정황이 다르지만 모두 ‘나’가 간직한 아버지의 여러 모습이다. 주목할 것은 이런 기억이 사실적인 이야기이자 동시에 ‘정동(情動)’적인 장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첫번째 기억에서 작별의 상황은 처음에는 “내가 J시를 떠나오던 날 집에서 나와 아버지에게 작별인사를 하려고 그 가게에 갔었다. 가게에 도착해서 늘 그랬던 것처럼 그 늘어뜨려진 고무줄을 모아 잡고 아버지, 불렀는데 아버지가 안에서 나오기 전에 기차역으로 가는 버스가 가게 앞 신작로에 도착했다. 밤이었다. 그 버스를 놓치면 기차역까지 걸어가야 했다. 걸어서 기차역에 도착해본들 기차가 출발한 다음일 것이다”(16면)처럼 사실적으로 서술되다가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정동이 점점 고조되면서 ‘장면’(scene)화한다.

 

혹여라도 버스가 출발해버릴까봐 나는 어두운 가게 안쪽에 대고 아버지, 나 가요…… 소리치고는 뛰어서 버스에 타버렸다. (…) 아버지는 가게에서 막 뛰쳐나와 한쪽 발엔 슬리퍼를 한쪽 발엔 고무신을 끼어 신고 손을 흔들지도 어쩌지도 못한 채 나를 태운 버스를 쳐다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내가 방금 붙잡았다가 세차게 놓아서 그때까지도 흔들리고 있던 검은 고무줄 옆 어둠 속에 서 있던 아버지의 실루엣.(17면)<

  1. 기억은 착오나 왜곡에서 자유롭지 않은 재현방식이기도 하다. 『아버지』에서 ‘나’의 아버지는 자기가 산낙지를 좋아하면서도 ‘나’가 산낙지를 좋아한다고 단정하는데, ‘나’는 “이렇게 왜곡되는 것이 기억인데 내가 사실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들을 계속 믿어도 될까”(62면)라고 자문한다.
  2. 인용된 캐서의 발언(“Life began for me, when I ceased to admire and began to remember”)에는 당대 최고 작가들의 작품을 감탄하기보다 자신의 유년의 삶을 기억하면서 비로소 자기만의 작품을 쓸 수 있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Lee Isaac Jung, “Some unusual guidance is behind writing ‘Minari.’,” LA Times, 202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