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신자유주의, 바로 알고 대안 찾기

 

한국 대학사회의 슬픈 단상들

화려한 건물, 마비된 양식

 

박노자 朴露子

오슬로대학교 인문학부 교수, 한국학 및 동아시아학. 주요 저서로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당신들의 대한민국』 『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 등이 있음. vladimir.tikhonov@ikos.uio.no

 

 

내가 사랑한 한국의 모교

 

나는 평소 학벌에 관심이 없다. 러시아에서‘우수한 대학’으로 꼽히는 레닌그라드(현 쌍뜨뻬쩨르부르그)국립대학과 모스끄바국립대학을 다녔지만 졸업 이후 동창회에 간 적은 한번도 없다. 그만큼 나의 러시아 모교들에 향수라고는 느껴본 적 없지만, 1991년에 3개월간 언어실습 일환으로 있었던 고려대에 대해서는 퍽 다르다. 당시 감수성이 풍부한 어린 3학년생으로서 한국에 처음 가봐서 그랬던 것일까? 체류기간은 채 한 학기도 안됐지만 그때 생겨난 추억은 소련/러시아에서 학사·석사·박사까지 했던 전체 기간보다 더 많았다. 교실에서의 신라사 강의와 향가나 시조 관련 수업부터 안암골 뒷골목에서의 막걸리 폭음까지, 지하‘운동권’모임에서의 견문부터 운동장에서 뛰어놀던 일까지, 지적 도전,‘대듦’그 자체로 느껴졌던 고려대는 어린 나에게 너무나‘얌전하고’제도권적인 본교 레닌그라드대학보다 매력적이었다. 거의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기분으로 귀국 비행기를 탔을 때 “평생 가난한 노동자와 부대끼면서 살고 싶다”던 한 여자선배의 얼굴이 계속 눈에 선했다. 말년의 소련에서는 미국에 가서 자기 주택을 소유할 정도의 튼튼한 중산층이 되겠다는 선배들은 무수히 만날 수 있어도 가난을 감수하겠다는 인뗄리겐찌아는 빛바랜 옛날 책에서만 찾을 수 있었기에 그 고려대 선배의 담담한‘진로구상 고백’은 나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세상에는 돈과 출세를 마다할 수 있는 사람이 실재한다는 것을 난생처음으로 발견한 것이다. 함석헌(咸錫憲) 선생께서 “대듦이 바로 생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16년 전 고려대에서‘생명’그 자체를 봤다. 목마르고, 늘 뭔가 찾고 있고, 때로는 절망과 좌절을 하고, 때로는 배제와 적대의 극단까지 가는, 자연이 낳은 그대로의 생명이었다.‘지금 여기’에 있는‘나’는 어찌 보면 그때 그 경험이‘만들었다’고까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991년 말 서울을 떠난 후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고려대에 들렀다. 그러나 대개는 신세졌던 은사들에게 인사드리기 위한 짧은 방문이었기에‘나의 학교’와 본격적으로‘재회’한 것이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1990년대 말 3년간 서울 근처의 한 사립대에서 강의하던 시절에도 쎄미나 참석 등의 목적으로 몇번이나 고려대에 갔지만, 학교를 제대로 둘러볼 여유를 갖지 못했다. 2000년 오슬로대에서 교직을 얻어 노르웨이로 옮긴 뒤에는 그러한 기회마저도 거의 끊겼다. 2005년쯤인가 고려대 당국에서 우편으로 보낸 두툼한 학교 홍보자료를 받았는데, 끔찍하게도 홍보책자 첫 페이지에는 영문으로 “고려대학교는 현직 국회의원들의 20%를 배출한 대한민국 최고 명문대학 중 하나”라고 적혀 있었다. 이 문구를 보는 순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런 방식으로 학교를 홍보하는 분들은 특정 몇개‘명문’대학의 전국적 패권주의가 세계적 자랑거리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이 문구를 보는 외국대학의 상대자들이 당장 고려대의‘힘’을 우러러볼 것으로 기대하는 것인가? 학교간 교류문제다 보니 그 자료를 상부에 제출해야 했지만, 나의‘한국 모교’가 이러한 방식으로 홍보물을 만들었다는 것이 부끄러워서 제출을 계속 미루기까지 했다. 이‘홍보자료 사건’(?) 이후로는 내 사랑하는 안암골에서 모종의 탐탁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는데, 그만큼이나 추억어린 고려대 교정에 다시 가서 시간 여유를 가지고 모든 문제들을 제대로 관찰해볼 기회를 계속 기다리게 됐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2006년 늦은 봄에, 그해 여름 고려대에서 개최될 대규모 국제한국학대회에 토론자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요청을 받자마자 “네, 물론 가겠습니다”라고 답신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인간적·학술적 고향과도 같은‘나의 고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직접 볼 기회가 드디어 온 것이었다.

 

 

글로벌 대학의 우울한 초상

 

2006년의 무더운 여름 마침내 나는 꿈에도 그리던 안암골에 다시 갔다. 며칠에 걸쳐 아침부터 저녁까지 진행되는 학술행사다 보니 여유있게 캠퍼스를 돌아볼 시간이 있었다. 그전에도 옛날에 뛰어놀곤 했던 운동장이 없어진 것을 보긴 했는데, 그 대신 생긴 광장과 지하매장 시설을 그때 처음으로 자세히 구경했다.‘중앙지하광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정문 바로 뒤의 지하시설을 둘러봤을 때는 만감이 엇갈렸다. 고급커피를 마실 수 있는 중고급 커피숍이 들어온 것은 커피 애호가로서 기쁜 일이었다. 그런데 만만치 않은 가격의 커피를 주머니 사정상 마시지 못할 학생들은 그 대신에 백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마시면서 얼마나 소외감을 느낄까? 지하주차장에는 자동차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세계의 많은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오슬로대 같으면 운동을 좀 하려는 요량부터 대기오염과 지구온난화에 대한 염려까지 중첩돼, 학생이든 교수든 대학인들 사이에서 자동차로 출퇴근하는 것은 불명예로 인식된다. 학교 당국에서 꽤나 좁은 주차장을 늘리려는 움직임이 별로 없으며, 자동차를 타고 오다 동료들과 마주치면 “아이들을 멀리 있는 유치원에 데려다주느라 어쩔 수 없이 탔다”는 변명을 하느라 바쁘다. 그런데 고려대에서는 오히려‘주차장을 늘렸다’는 것을 자축하는 분위기인 듯했다.‘글로벌 대학’을 지향한다는 학교가 환경처럼 핵심적인 세계적 문제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비(非)세계적’인가? 지하광장을 구경할 때부터 느낌이 다소 이상했는데, 그다음에 구경하게 될 일들에 비해서는 약과에 불과했다.

학회의 장소는‘100주년기념 삼성관’으로 명기되어 있었다. 삼성관? 1991년이라면 상상하기도 어려운 이름의 이 건물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나는 알 리가 없었다.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중앙광장과 멀지도 않은 그 삼성관 문으로 들어서자 외국대학에서도 보기 어려운 신축 건물의 화려함에 새삼 놀랐다. 대회 장소에 들어가 알고 지내던 고려대 교수에게 물어보니 공사비가 650억원에 달했다는 답을 들었다. 650억원! 상상을 압도하는 액수였다. 가만히 계산 좀 해보자. 선배들에게 들은 대로 고려대에서 전임강사의 평균 연봉이 5천만원 정도라면 전임강사 이상 교원의 평균 재직기간을 25년으로 치고 승진시 연봉 증액까지 감안해도, 이 650억원이면 약 40명의 소장학자들에게 시간강사로서의 고생을 면하게 해주고 정규직으로서 학문적·교육적 인생을 보장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고려대는 어떤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전국 사립대에서 전체 교양강의의 47.1%, 전공강의의 30.5%를 시간강사들이 담당하는 것으로 안다. 한시간에 3만원 정도 받는 시간강사가 학술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과연 일주일에 20시간쯤 강의하는 시간강사가‘글로벌’수준의 강의를 충실히 준비할 수 있겠는가? 선배들 이야기로는 고려대에서 약 3천명이 시간강의를 하고 있다던데, 이 건물의 건축비로 그중 100분의 1이라도 구제할 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