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한국 민주화 다시 보기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
김선철
컬럼비아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한국 사회운동과 민주주의 전공. 바나드(Barnard)대 등에서 사회과학 방법론, 사회운동, 한국정치 강의를 맡고 있음. jollary@yahoo.com
80년대 이후 남한의 민주화과정은 독특한 경로를 그려왔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도입된 후 사회운동이 제도화되거나 탈동원되었던 다른 나라들의 민주화와 달리, 남한의 민주화는 끊임없이 아래로부터의 동원을 동반했고 사회운동은 정치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해오고 있다. 이처럼 역동적인 남한의 현실은 사회운동이나 민주주의에 관한 이론을 더욱 새롭고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잠재력이 얼마나 제대로 발휘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되려 남한 민주주의에 대한 대부분의 논의는 기성 이론에 비추어 현실을 보거나 강한 규범지향에 이끌려 현실을 진단하는 시도들로 채워지는 듯한 느낌이다. 반면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새로운 이론화를 모색하는 시도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 글은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남한 민주화와 관련해 많은 이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몇가지 가정들과 그 근저에 있는 인식론적 전제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 민주주의는 도달되(어야 하)는 어떤 이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는 사회정치적 투쟁과정 속에서 잠정적이고 때로는 우연적으로 조정된 합의의 결과로 파악된다. 이러한 시각은 민주주의를 이상적인 제도의 조합이나 사회운동 투쟁의 과제로 파악하는 다분히 규범적인 접근과 달리, 민주주의를 현실과정으로 파악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1
이러한 관점 아래 이 글에서는 권위주의의 유산이 민주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남한의 민주화가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라는, 그리고 민주주의의 공고화가 우리의 정치적 과제라는 다소 상식적인 이야기들을 색다른 각도에서 조명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민주주의에 관한 많은 논의가 정형화된 도식을 따르고 있으며, 현실화되지 않은 가상의 결과를 선험적으로 전제하고 그에 맞추어 현실을 해석하려는 목적론적 경향이 있음을 지적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과정으로 파악할 때 이러한 문제가 극복될 수 있으며 좀더 적극적인 이론화도 가능할 것이다.
불완전한 민주화 이행의 역설적 결과
남한 민주화를 다룬 대부분의 저작들은 남한의 민주화가 상당부분 권위주의세력의 통제 아래에서 이루어진, 따라서 권위주의와 강한 연속성을 가진 불완전한 이행이었음을 지적한다. 강력한 국가의 억압력, 보스 중심으로 사당화(私黨化)된 정치정당, 강력한 노동통제, 사회 곳곳에 똬리를 틀고 앉은 권위주의적 습속 등 과거의 유산은 당연히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또 민주화의 정착을 저해하는 장애물로 취급되고 있다.
권위주의의 유산이 민주화의 길에 제약을 가한다는 사실은 반박될 수 없다. 그러나 불완전한 민주주의나 권위주의의 유산 때문에 민주화가 더디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너무 단순한 논리가 될 수 있다. 이 논리는 조금 더‘완전한’방식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졌다면, 즉 권위주의정권과 좀더 완전하게 결별했더라면 오늘날 민주주의의 질은 훨씬 더 나아졌을 것이라는 가정을 담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랬을까? 남한의 민주화와 유사성이 많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브라질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아공과 브라질은 모두 70년대 중반 이후 시작되었던 소위 민주화‘제3의 물결’의 일부분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동원이 민주화에 강한 영향을 미쳤던 나라들이다. 하지만 민주화의 첫 돌파구가 열린 이후 두 나라가 보여준 경로는 상당히 달랐다. 남아공의 민주화는 그 드라마틱했던 과정만큼이나 과거와의 단절도 강했다. 협상과정에서 백인들의 사회경제적인 지위가 보장되긴 했지만, 정권교체나 과거사 청산 등 적어도 정치적 차원에서 과거와의 단절은 확실한 것이었다. 하지만 과거와 강하게 단절했던 혹은 좀더‘완전한’민주화 이행의 양태를 보였던 남아공은 그래서 더 민주적이 되었는가?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과거 인종주의정책에 강력히 저항했던 운동세력은 눈깜짝할 사이에 새 정권으로 몰려들었으며, 사회운동은 급속히 탈동원되었다. 선거 때마다 압도적 다수의 지지를 받는 집권당은 관료화되기 시작했고, 이를 제대로 감시해야 할 시민사회는 텅 비어버리게 되었다. 그 결과 남아공의 집권세력은 투투(Desmond Tutu) 주교가 공개적으로 그 비민주성을 지적할 정도로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어졌다.[2. 2005년 봄 아파르트헤이트를 주도했던 민
- 이런 접근은 현실에서 민주주의가 발생·전개·변형되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추적해왔던 존 마코프(JohnMarkoff)나 찰스 틸리(Charles Tilly) 같은 사회사가들의 접근과 일맥상통한다. John Markoff, Waves of Democracy: Social Movements and Political Change, Pine Forge Press 1996; Charles Tilly, Contention and Democracy in Europe, 1650-2000, Cambridge Univ. Press 2003; Charles Tilly, Democracy, Cambridge Univ. Press 2007. 또한 민주화, 혁명, 사회운동, 집합행위, 일상적인 정치과정 등 서로 달라 보이는 정치과정을 관통하는 인과 메커니즘을 찾고자 하는 다툼의 정치(contentious politics)의 문제의식과도 맞닿는다. Doug McAdam, Sidney Tarrow and Charles Tilly, Dynamics of Contention, Cambridge Univ. Press 2001; Sidney Tarrow and Charles Tilly, Contentious Politics, Paradigm Publishers 2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