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변화하는 세계, 새로운 주체
‘한류’와 협동적 창조의 가능성
「오징어 게임」과 「지옥」을 통해 본 ‘K-콘텐츠’의 문명 비판
한영인 韓永仁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지만: 임현론」 「세계의 불안을 견디는 두가지 방식」 등이 있음.
jwhyi@naver.com
1. ‘한류’의 문명적 가능성
2019년 6월 1일, BTS는 한국 가수 최초로 ‘팝의 성지’ 웸블리 스타디움에 입성했다. 당시의 풍경을 전한 기사에 따르면 런던은 공연 시작 전부터 뜨거운 몸살을 앓았다고 한다. 영국뿐 아니라 스페인, 아일랜드, 독일, 프랑스, 이딸리아 등 인근 유럽 국가의 팬들이 BTS가 출연한 광고를 보기 위해 피커딜리서커스 광장에 몰려들어 일대가 마비되었다는 것이다. 불과 십년 전까지만 해도 변방의 낯선 음악에 불과했던 ‘케이팝’(K-POP)은 어떻게 전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아이콘이 될 수 있었을까? BTS의 성공이 반복되기 쉽지 않은 사례라는 걸 인정하더라도 그 성공의 밑바탕에 ‘한류’라는 거대한 흐름이 자리 잡고 있음은 분명하다. 아시아에서 시작된 한류는 오늘날 유럽과 북미는 물론 남미 대륙과 중동에까지 확산됨으로써 전지구적 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인자로 떠오르고 있다.
국내에서 한류를 바라보는 시선은 엇갈린다. 일각에서는 한국의 우수성을 세계만방에 떨친 ‘국위선양’의 사례로 숭앙하는 반면, 국가의 정책적 지원과 대형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기획력이 결합해 만들어낸 일시적 유행으로 치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대립하는 듯 보이지만 둘 다 ‘수출 주도 산업화’의 관점에서 한류를 바라본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쪽에서는 자동차와 반도체를 넘어 문화 콘텐츠까지 수출하게 되었으니 금상첨화라는 것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수출 금자탑’이 내뿜는 화려한 광채가 한국사회의 모순을 은폐하진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류를 산업적 차원에서 파악하는 ‘경제주의적 편향’은 대중문화 콘텐츠를 향유하는 경험이 자동차나 휴대폰 같은 공산품의 소비경험과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다.
한류 콘텐츠를 “여러 지역의 문명적 힘들이 서로 교차하고 경쟁하며 만들어진 산물”1로 바라볼 것을 주문하는 정호재의 논의는 ‘경제주의적 편향’을 넘어 한류의 문명적 가능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사유할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한류 열풍의 핵심 의미는 한국이 서구 문물의 수동적인 수용자에서 벗어나 세계를 향해 새로운 가치와 비전을 발신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데 있다.2 ‘문화산업의 논리에 매몰된 기획상품에 가당찮은 기대를 건다’는 식의 냉소와 한국이 세계적 차원의 비전을 발신하는 장면을 감히 꿈도 꾸지 못하는 주변부적 자기비하는 물론, 한류의 인기를 자족적으로 탐하는 데 급급한 ‘국뽕’ 모두와 거리를 두고 한류의 문명적 가능성을 차분하게 검토하는 작업이 요구되는 이유다.
문명이라는 말이 조금 거창해 보이지만 현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데 영감을 줄 수 있는 대안적인 사유의 발신 여부가 관건이다. 백낙청은 일찍이 “오늘의 자본주의 문명이 자본주의로서 자기완성 겸 문명으로서의 자기부정에까지 가기 전에 아직 남아 있는 문명적 유산들을 총동원하여 새로운 지구문명을 건설할 필요성”을 강조하며 현존하는 다양한 문명적 유산들이 “자신을 낳은 과거 문명들과 현존자본주의 문명의 온갖 부당한 차별을 철폐할 새로운 전지구적 질서에 맞도록 갱신되어야” 함을 역설한 바 있다. 당시에는 ‘한류’라는 용어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기존 문명에 대한 창조적 갱신을 강조하는 데 그치고 있지만 “문명유산 및 문화적 연속성의 유지는 그 창조적 활용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그 창조적 보존이 바로 우리 자신의 일이라는 ‘세계화된’ 시각”3을 갖출 필요가 있다는 주문은 한류의 문명적 가능성을 타진하는 관점을 선취하는 면이 있다.
한류는 “과거 미국과 유럽이 한번쯤 거쳐 갔지만 감히 풀어내지 못했던” “‘인간성의 회복’과 ‘해방’에 대한 숙제”4를 풀어낼 문명적 잠재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 이를 측정하는 기준은 다양하겠지만 오늘날 자본주의 문명이 드러내고 있는 말기적 증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가기 위한 영감을 얼마나 풍부하게 제공할 수 있는지 여부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2021년 넷플릭스(Netflix)에 공개된 이후 전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이끌어낸 드라마 「오징어 게임」과 「지옥」을 통해 오늘날 한류 콘텐츠가 드러내고 있는 자본주의 문명 비판의 양상을 검토해보고자 한다.5
2. ‘부채 자본주의’의 죽음 정치와 ‘참(懺)의 수치심’: 「오징어 게임」
「오징어 게임」이 잔혹한 생존 경쟁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분석은 흥행 직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하지만 이 작품이 그 비판의 초점을 ‘부채’에 맞추고 있다는 사실은 비교적 덜 조명되었다. 「오징어 게임」은 대리운전을 해서 벌어다준 돈이 있지 않냐면서 용돈을 더 달라고 떼를 쓰는 기훈에게 엄마가 “그깟 놈의 돈, 너 대출받은 한달 이자도 안 된다”라고 쏘아붙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기훈은 자동차회사에서 구조조정 당한 뒤 분식집과 치킨집을 열었지만 모두 실패하고 현재 수억원에 달하는 빚을 지고 있는 ‘부채인간’이다.
어디 기훈뿐일까. ‘오징어 게임’의 참가자들이 의식을 잃은 채 끌려온 것에 항의하자 진행요원은 모니터에 영상을 띄워 사람들이 지고 있는 채무의 액수를 공개함으로써 소요를 잠재운다. 참가자 모두가 막대한 빚을 지고 있는 ‘부채인간’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오징어 게임’은 채권자가 빚을 갚지 못한 채무자를 응징하기 위해 설계한 것일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참가자들은 첫번째 게임이 끝난 뒤 어떻게 해서든 빚을 꼭 갚겠다고 사정하거나 “우리가 빚을 졌지 죽을죄를 진 건 아니잖아요!”라며 울부짖는다. 이때 진행요원은 당황한 목소리로 자신들은 돈을 받아내려는 게 아니라 단지 기회를 제공하려는 것이라고 해명한다. 진행요원이 내비치는 당혹감은 이 게임을 설계한 오일남이 참가자들의 직접적인 채권자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비롯하지만, 이들이 갚을 수 없는 막대한 부채에 짓눌리지 않았더라면 게임에도 참여할 이유가 없었다는 점에서 그 당혹감은 기만에 불과하다. 진실은 차라리 “우리가 빚을 졌지 죽을죄를 진 건 아니잖아요!”라는 항변에 담겨 있는데, 여기에서 오늘날 자본주의는 모든 인간을 “자본 앞에서는 죄인이자 책임이 있는 자, 즉 ‘채무자’”6로 만든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7
이 작품은 기훈과 상우, 덕수와 새벽의 경우를 제외하면 참가자들이 거액의 빚을 지게 된 사연을 구체적으로 보여
- 정호재 『다시, K를 보다』, 메디치미디어 2021, 10면. ↩
- 같은 책 256면 참조. ↩
- 백낙청 「새로운 전지구적 문명을 향하여: 한국 민중운동의 역할」, 『창작과비평』 1996년 여름호 11~13면. ↩
- 정호재, 앞의 책 279면. ↩
- 두 작품이 얻은 세계적인 인기는 넷플릭스라는 새로운 플랫폼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넷플릭스는 맑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예측했던 세계문학의 형성 가능성을 영상 콘텐츠 분야에서 실현하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을 둘러싼 수익 배분 논란에서 엿볼 수 있듯 새로운 플랫폼 경제 특유의 착취적 성격은 새로운 논쟁거리다. 넷플릭스를 비롯한 플랫폼 경제가 “대량실업, 생산과 노동의 외주화, 전 지구적 착취라는 기존 경향에 기대어 성장”했다는 비판에 관해서는 닉 서르닉 『플랫폼 자본주의』, 킹콩북 2020 참조. ↩
- 마우리치오 라자라토 『부채인간』, 허경·양진성 옮김, 메디치미디어 2012, 26면. 라자라또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거대한 채권자’이자 ‘포괄적 채권자’로 나타나게 된다고 말한다. ↩
- 이 작품에서 오일남은 바로 라자라또가 말한 ‘포괄적 채권자’(앞의 각주 참조)의 의인화된 형상이다. 니체는 죄책감이 부채에서 비롯되었음을 논증하면서 “채권자의 공동체”는 “전체에 맞서 계약을 어기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채무자를 “법의 보호 밖에 놓인 야만적인 상태”로 몰아낸다고 말한 바 있는데 「오징어 게임」의 세트장은 정확히 니체가 말했던 ‘야만적 치외법권’ 지대라고 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학』, 홍성광 옮김, 연암서가 2011, 84~93면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