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한민족의 문자생활과 20세기 국한문체

 

임형택 林熒澤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

 

 

이 글은 우리가 방금 통과한 20세기를 문자생활의 측면에서 회상한 것이다. 주제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겠기에 위로 소급해서 논의를 시작한다.

생각해보면 우리 민족은 지난 2000년 동안 내내 한자에 의존한 문자생활을 해왔다. 그러다가 20세기로 와서 한글이 ‘국문’이란 칭호와 그에 상응하는 지위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한자를 떨쳐버리지 못해 국한문체가 우리의 문자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해왔다. 때문에 ‘한글전용론’과 ‘한자혼용론’이 대립하여 일대 문화적 쟁점이 되면서 논전이 끊이지 않았다. 이 모두 20세기의 역사적 과제인 국민(민족)국가의 수립과 무관하지 않은, 곧 ‘국어’의 형성상에서 야기된 문제들이다.

나의 전공에 비추어 주제넘은 일이란 느낌도 없지 않지만, 이 주제는 ‘글쓰기’라는 넓은 차원에서 글쓰는 사람이면 응당 관심을 가져야 할 사안인데다 한자는 나의 전공과 인연이 긴밀한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우리 문자생활의 실제 정황을 해명하기에 힘쓸 터이요, 연관해서 약간의 소견을 붙이는 데 그치고자 한다. 나 자신 주장을 세울 고명한 이론이 없기도 하지만, 나름으로는 뜻이 있다. 문자가 인간다움의, 문화창조의 기초요건인만큼 반성적으로 사고할 재료를 세상에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다.

 

 

훈민정음

 

우리의 지난 천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을 들라면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한글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기실 우리의 옛 문물 가운데서 한글만큼 지금껏 두루 유용하게 쓰이는 것이 또 있을까. 아니, 세종이 「훈민정음서(訓民正音序)」에서 표명한 바 “사람마다 쉽게 배워 일상에 편히 쓰도록 한다”는 그 뜻이 5백년을 뛰어넘어 비로소 현실화된 것이다.

그렇다면 세종이 당시 훈민정음을 창제한 의도는 과연 어디에 있었던가? 우리 말에 적합한 문자가 필요해서 만든 것이라는 지당한 말만 가지고는 납득이 잘 되지 않는다. 이 물음에 대해 학계에 보고된 두 가지 상이한 설이 있다. 하나는 한자음의 정리 내지 한어 학습의 수단으로 개발했다는 주장이며, 다른 하나는 훈민정책과 관련해서 설명한 논리다. 동일한 사실을 두고 상이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A가 맞으면 B는 틀리는 그런 것이 아니고 서로 다른 측면을 보고 있는데, 그 입각점 또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마땅히 여러 측면을 아울러 전체를 보아야 할 터이요, 그래야 훈민정음을 창제한 의미의 해석도 진전될 수 있으리라.

 

(1)이것(훈민정음—인용자)으로 글을 풀이하면 그 뜻을 알 수 있고, (2)이것으로 청송(聽訟, 소송판결—인용자)을 하면 그 실정을 파악할 수 있으며, (3)자운(字韻)에 있어서는 청탁(淸濁)을 분간할 수 있고, (4)악가(樂歌)에 있어서는 율려(律呂)를 고르게 할 수 있다. 쓰는 바에 구비되지 않음이 없고 가는 바에 통달하지 않음이 없으니 바람소리, 학 울음, 닭 울음, 개 짖는 소리까지도 다 포착해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번호는 인용자)

 

정인지(鄭麟趾)가 붙인 훈민정음의 서문으로 그 효용가치를 밝힌 대목이다. 인용문의 뒤에서는 “소리에 따라 글자를 만들어(因聲制字) 만물의 정황에 통한다”는 문자의 고전적 원리가 신문자에서 십분 발휘될 수 있다고 자신있게 주장하고 있다. 그 증거로 하필 바람소리, 학 울음 등을 든 것은 중국의 학자 정초(鄭樵)가 “학 울음, 바람소리, 닭 울음, 개 짖는 소리나 우레가 귀를 뚫고 모기가 눈앞에 스쳐가는 것까지 모두 포착해서 쓸 수 있다”(「七音略序」)고 한 바 있기 때문이다. 문자의 음성주의적 이상은 한자를 가지고는 도달하기 불가능한 일이었고, 새로 제정한 훈민정음에서 가능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 점을 정인지는 자랑스럽게 내세운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는 신문자의 용도를 넷으로 구분지어 명시하고 있다. 문자의 용도가 꼭 한정될 이치는 없겠으니 신문자를 제정한 입장에서 염두에 둔 중요한 용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1)과 (2)의 용도는 종래 이두(吏讀) 혹은 구결(口訣)로 처리되던 것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도 정인지가 「훈민정음서」에서 먼저 언급한 바 있다.

 

우리 동방은 예악문물이 중화를 본받고 있거니와 다만 방언이어(方言俚語)가 더불어 같지 않기로 글을 배우는 자들은 글의 의미를 깨치기 어려움으로 고생하고 옥사를 다스리는 자들은 사건의 곡절을 통하기 어려움으로 곤란해한다. 옛날 신라의 설총이 처음 이두를 만들어 관청과 민간에서 지금에 이르도록 쓰이고 있다. 그러나 차자(借字)를 해서 쓰니 혹은 난삽하고 혹은 불통이 되어 비루(鄙陋)·무계(無稽)할 뿐 아니라 언어의 사이에 이르러는 만에 하나도 통할 수 없는 형편이다.

 

‘방언이어’란 우리 말을 지칭하는 그때의 관용적 표현이다. 우리 말과 공용문어(한문)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국과의 문화적 접촉이 시작되면서부터 부딪힌 난관이었다. 유교 및 불교의 경전들을 어떻게 해독할 것인가? 직접 입으로 가르칠 수야 물론 있겠으나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전수하기는 불가능하다. 또한 한문 자체가 문학어로 발달한 것이기 때문에, 중국에서도 실제적 정확성을 요하는 문서들은 이문(吏文)이라는 별도의 문체로 써야 했다. 이런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으로 고안된 것이 이두·구결이었다. 이른바 차용표기인데, 향가 또한 이 표기법으로 씌어진 것이다.1 하지만 이 차자의 방식은 워낙 불편하고 난삽해서 난관을 극복하는 묘방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근본적인 해법을 찾아 신문자의 창제로 들어갔다고 하겠다.

 

훈민정음이 이미 만들어지자 천하의 소리를 다 표현하지 못할 것이 없다. 이에 『홍무정운(洪武正韻)』을 역훈(譯訓)하여 중화음을 바로잡고, 또 한편 『직해동자습 역훈평화(直解童子習譯訓評話)』는 곧 중화어 학습의 입문서라 하여 (…) 정음으로 한훈(漢訓)을 번역해서 글자마다 그 아래 잘게 쓰고 또 방언으로 그 뜻을 풀이하도록 했다. (…) 〔한어를—인용자〕 학습하는 사람들은 먼저 정음의 글자를 얼마간 배운 다음 여기에 접근하면 열흘 동안에 한어를 통할 수 있고 운학(韻學)에 밝아져서 사대(事大, 중국에 대한 외교—인용자)의 일을 능히 수행할 수 있을 터이다.

 

성삼문(成三問)이 쓴 『직해동자습』이란 책의 서문이다. 『직해동자습』은 한어 학습서로 『홍무정운역훈』과 함께 단종 때 간행되었다고 한다(현재 원본이 전하지 않음). 외국어 학습이란, 달리 음과 뜻을 나타내는 방도가 없는 상황에선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을 성삼문은 “중원의 학자가 옆에 서서 바로잡아주는 것도 아니니 아무리 노숙한 통역관이라도 고루함을 면할 수 없다”(「直解童自習序」)고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신문자를 활용하여 한어 학습서로 『직해동자습』 그리고 한자 음운의 정통한 이해를 위해서 『홍무정운역훈』을 편찬한 것이다. 그보다 앞서 훈민정음의 창제와 때를 같이하여 편찬된 것이 『동국정운(東國正韻)』이다. 훈민정음의 창제동기가 한자음 정리에 있다는 주장은 이 『동국정운』을 중시해서 나온 것이다.

먼저 인용한 정인지의 훈민정음 서문에 열거된 신문자의 용도 (3)“자운(字韻)에 있어서는 청탁을 분간할 수 있다” 함은 한자의 음운 및 중국어 학습에 관련한 언급이다. 다음 (4)“‘악가(樂歌)’에 있어서는 율려를 고르게 할 수 있다” 함은 음악과 결부된 노래의 측면이다. 신라 때부터 벌써 “시는 당사(唐辭, 한문)로 쓰고 노래는 향어(鄕語, 방언 즉 국어)로 엮는”(「均如傳序」) 것이 문화적 관행처럼 되어 있었다. 따라서 노랫말을 짓고 전하는 데 신문자가 요긴하게 쓰였으니, 신문자의 쓰임 네 가지 (1)경전 등 한문 학습을 위한 언해(諺解) (2)송사 등의 문서 작성 (3)한자음 표시와 중국어 학습 (4)노래 가사는 중요도로 순위가 정해질 성질이 아니고 기능을 각기 달리하면서 하나하나 중요한 몫임이 물론이다. 그런데 훈민정음은 ‘어제(御制)’라고 일컫듯 국왕 세종의 작품이다. 신문자 제정은 최고 통치자의 개인적 열성이 바쳐진 고도의 정치적 행위였다는 사실에 특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말을 하고 싶어도 뜻을 펴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의 안타까운 사정을 생각해서 새로 28자모를 만든다. 이런 세종의 발언에 비추어 ‘나라 글자’의 필요성을 ‘어리석은 백성’과 관련해서 절감하게 된 것이라는 견해가 타당하게 들린다.

이때 ‘어리석은 백성〔愚民〕’이란 어떤 부류인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라는 훈민서를 언해하여 민간에 반포하면서 세종은 “우부우부(愚夫愚婦)들도 모두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우부우부’가 곧 ‘어리석은 백성’이니 문맹을 가리키는 것이다. 문맹은 한문의 문맹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백성’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당시 ‘민’ 일반의 실상이었다. 최고 통치권자로서는 ‘민’을 훈도해서 체제 속에 통합시킬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요컨대 훈민정책의 실효를 거두기 위해 ‘나라 글자’를 마련한 것이다.

훈민정음은 ‘나라 글자’로 상정, ‘백성을 위한 글자’로 제정되었다. 이것이 훈민정음의 기본성격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점이 있다. 하나는 ‘나라 글자’란 ‘보편적 문자’(한자)에 대립적·부정적 관계로 설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디까지나 중국 중심의 세계 속에서 주변부의 한 나라이니, ‘나라 글자’는 한자가 보편적 문자로 통행하는 가운데 보조적 기능을 하는 일종의 발음기호일 뿐이었다. 신문자 용도의 (1)과 (3)은 보조적 기능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다른 하나는, ‘백성을 위한 글자’란 사대부의 문자는 아니라는 말도 된다는 사실이다. 당초에 한글은 문맹인 ‘우부우부’들의 뜻을 펴는 수단으로 만들었지, 그 시대 사회의 주도층인 사대부 남성들이 쓰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훈민정음은 공용문자로 되기에는 태생적 제약이 있었다고 보겠다.

훈민정음의 제한적 성격은 공간적 한계이고 또 시대성이었다. 그러므로 제한을 넘어 비약할 가능성은 고유하게 잠재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성삼문은 “천하의 소리를 다 표현하지 못할 것이 없다”라고, 신숙주(申叔舟)는 “만고의 한 소리도 털끝만큼의 오차가 없으니 실로 음을 전하는 연결고리이다”(「東國正韻序」)라고 신문자를 자랑한 터였다. 말하자면 만국 발음기호처럼 보편적 부호로 의식한 것이다. 실제로 ‘보편적 문자’의 발음기호로 적용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반도에서 그친 일이었다. 한자의 본고장 중국에서는 음을 표시할 좋은 방안이 개발되지 않아서 예로부터 곤란을 겪었다. 20세기에 이르자 주음(注音)부호란 것을 만들어 쓰기도 했으나, 현재는 로마자를 빌려서 쓰는 형편이다. 이웃에 마침 알맞은 도구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등잔 밑이 어두웠고 부뚜막의 소금을 집어넣을 줄 몰랐던 격이다.

‘나라 글자’의 제정을 조선왕조의 훈민정책과 관련해서 설명한 이우성(李佑成) 선생은 “왕조 자체의 지향과

  1. 차용표기의 방법으로는 역사적으로 향찰(鄕札) 및 이두·구결이 있었다. 한자의 음과 뜻을 이용해서 우리 말을 표기한 점에서는 모두 마찬가지인데, 향찰은 전면적으로 쓰고, 이두는 부분적으로 특수용어나 어미에 쓰며, 구결은 한문에 붙이는 토이니, 각각 쓰임새로 구분지은 것이다. 향찰은 향가 이후 용례를 찾을 수 없으므로 고려시대로 들어와서 이미 소멸한 표기법이다. 참고로 이두와 구결의 예를 들어본다. 가령 ‘짐짓’은 이두로 故只, ‘다짐’은 이두로 侤音이라고 썼던 것이다. 가령 또 이두의 是如爲乃는 ‘─이다 하나’란 말이다. 구결은 ‘國之語音異乎中國’이란 한문을 해독하기 위해 편의상 토를 붙여 ‘國之語音이 異乎中國하야’라고 하는 따위다. 구결은 한글이 나오기 전에는 한자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한자가 약호화되기에 이르렀다. 위의 ‘이’는 伊→イ, ‘하야’는 爲也→ソツ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구결은 일종의 발음기호의 성격을 띠었는데 그 형태가 일본 글자의 카따까나와 일치하고 있다. 일본은 이 방식을 자기들의 문자로 확대·발전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