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한 장군의 생애와 한국 정치사의 어떤 단면

민기식 전 육군참모총장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

 

 

남재희 南載熙

전 국회의원, 노동부 장관. 저서 『진보 열전』 『남재희가 만난 통 큰 사람들』 『양파와 연꽃』 『일하는 사람들과 정책』 등이 있음.

 

 

이 글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민기식(閔耭植, 1921~98) 장군의 회고록 『격동의 역사와 나의 시련』(제일문화사 1996)을 주요 참고로 한 것이다. 민장군은 이 책이 많은 논란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명예훼손 소송도 여러건 제기될 것 같아 발행을 취소했다. 그러나 가까운 몇몇 사람들에게는 그 책이 흘러나왔다. 또 나는 그의 중학교 10년 후배로 그가 군에서 퇴역한 후에 자주 그와 술자리를 하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오능균이라는 후배는 나보다도 더 자주 만나고 흉허물 없는 이야기를 들은 듯하다. 이러한 세가지 출처를 종합하여 이 글을 엮었다. (회고록의 발간을 중지한 지 25년쯤이 지났으니 이제 그 내용을 인용해도 무방할 것으로 생각한다.)

 

만주건국대학을 다녀

민기식은 일본 괴뢰정권 만주국의 최고 명문 국립대학인 ‘건국대학’을 다녔다. 국무총리가 되는 강영훈도 같은 대학 동기생이었다. 건국대학은 6년제로 등록금이 전혀 없고, 학생들은 졸업 후에 고등문관(사무관)으로 채용되었다. 우리의 3·1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육당 최남선은 당시 그 대학의 교수였다. 일제는 조선의 지식인 가운데 춘원 이광수와 육당 최남선을 친일화하는 데 노력을 집중하여 마침내는 그 목표를 달성한 듯했다. 민기식의 기록에 의하면 최남선은 민기식을 사적으로 만났을 때 아주 은밀히 우리 민족정신을 고취했었다 한다.

2차대전 후반에 민기식은 학병으로 징집되어 일본에서 장교로서의 훈련을 받다가 전쟁이 끝나자 귀국했다.

 

“할 일 없어 군에 입대했다”

민기식은 장군 시절 육군사관학교 측으로부터 ‘장군과의 시간’에 참석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사관생들에게 강연을 하고, 이어 그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는 대화에 참여하여 ‘어떻게 하여 군인이 되었습니까’ 하는 질문에 다음과 같은 요지로 답변했다. “우리 집안은 생활이 넉넉하여 나는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만주에서 제일 좋은 건국대학에 다니기도 했다. 그러다가 일제 말에 학병으로 끌려가 일본에서 장교훈련을 받다가 해방이 되어 귀국했다. 귀국하여 보니 뚜렷하게 무언가 택할 직업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놀고 있던 때에 마침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어 거기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런 식으로 연설을 하고 있자 단하에 있던 육사의 간부가 종이쪽을 올려 보냈다. 펴보니 ‘사관생도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떻게 합니까’라는 내용이었다. 이 쪽지를 받아본 민기식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연설을 계속했다. “나는 그렇다 치고 여러분 사관생도들은 국가에서 모든 것을 부담하여 먹여주고 입혀주고 가르쳐주지 않느냐. 여러분은 국가와 국민에게 엄청난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사를 버리고 충성을 다하여 봉사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사형수 서민호 의원 구명

6·25전쟁 중 피난수도 부산에서 당시 국회가 야당의 우세인 탓에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하는 헌법으로는 이승만의 재임이 어렵다고 본 지지정파가 국민직선제로 개헌하려고 하여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났을 때다. 서민호 국회의원이 공무로 전남 순천에 가서 한 식당에 들렀을 때 일행 중 한명이 거기에 있던 군의관 서 모 대위와 시비가 벌어져 서대위가 권총을 한발 발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서의원은 자기의 권총을 뽑아 그에게 일격을 가한 것인데 서대위는 즉사하고 말았다. 그때는 전시여서 국회의원에게도 권총 휴대가 허용됐었다.

서의원은 군법회의 1심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2심 재판장으로는 민기식 장군이 임명되었다. 당시는 대통령 국민직선제를 주장하는 여당파와 그에 반대하는 야당파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였으며, 서의원은 야당 측의 투사였다. 따라서 서의원을 1심대로 사형에 처하라는 압력이 각계로부터 민기식에게 가해졌다. 특히 계엄당국의 압력은 거세었다. 민기식은 양심상 도저히 사형을 내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고심 끝에 2심 언도 뒤 지리산 속으로 도망쳐 있으려고 식량과 기름을 잔뜩 실은 지프차를 대기시켜놓았다. 그리고 용감하게 서의원에게 8년형을 언도했다. 언도 전에는 압력이 거셌으나 언도 후에는 누그러졌다.

8년형을 산 서민호 의원은 4·19혁명 후 국회의원에 다시 선출되고 부의장이 되었다. 그리고 민기식 장군이 자기 생명의 은인이라고 계속 칭송했다.

 

곽영주 경무관이 살려줘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가 있을 때 민기식은 부산에 있는 제2관구 사령관이었는데, 선거 부정을 요구하는 자유당 측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자유당의 경남도당은 그를 해임하라고 중앙당에 압력을 넣었고, 마침내는 그의 해임상신서가 경무대로 올라가고 있다는 정보가 육군본부에 있는 심복으로부터 전해졌다(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후 경무대는 청와대로 이름이 바뀌었다). 당황한 민기식은 무작정 서울로 지프차를 몰며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생각했다. 도달한 결론은 조선일보 방일영 사장에게 부탁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조선일보 사장실을 찾았다.

방사장은 관계, 정계, 사업계 등 여러 방면의 거물급들과 사통팔달의 교제 범위를 갖고 있었다. 그는 우선 자기 돈으로 그들에게 무조건 요정에서 융숭한 대접을 하는 것으로 친분을 쌓는다. 그래서 나중에는 ‘밤의 대통령’으로 불리기도 했었다.

민기식의 구명요청을 받은 방사장은 곧 경무대의 곽영주 경무관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 약속을 잡았다. 당시 경무대에는 경무대경찰서가 따로 있고 경찰서장이 있었다. 그러나 경호의 총책임자는 곽영주 경무관이었다. 민기식이 방사장과 함께 곽경무관이 지정한 낙원동에 있는 요정 ‘오진암’으로 가니 거기에는 곽경무관과 함께 연예계 조직을 총책임지며 자유당 정권의 산하조직처럼 만든 임화수도 있었다. 그들은 그날 밤 신나게 즐겼고 그 돈은 민기식이 부담했다.

육군본부에서 올라온 민기식 해임상신서를 곽영주가 자기 서랍 속에 넣어 보류시켰다는 설이 있는데 여하간 곧이어 4·19혁명이 나는 바람에 민기식은 해임을 모면하게 되었다.

민기식의 회고록에는 “자유당 말기 이기붕 씨만 죽이면 이승만 대통령은 산다는 논법”을 언급하며 “그렇다면 이씨 일가족도 자결한 것이 아니라 이대통령의 측근에 있던 곽영주, 임화수 등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라고 말하는 대목도 나온다.

 

군단장으로 5·16 지지

1961년 박정희 장군에 의해 일어난 쿠데타와 이에 대한 민기식의 대응에 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쿠데타가 있기 며칠 전 이한림 제1군 사령관은 1군 산하부대 간의 축구시합을 개최했다. 그러나 부정선수가 섞였다는 이의가 제기되어 그 시합은 유종의 미를 거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