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함석헌의 민족적 정체성과 우찌무라 칸조오

 

 

양현혜 梁賢惠

전주대학교 기독교학과 겸임교수. 저서로 『윤치호와 김교신─근대 조선에 있어서 민족적 아이덴티티와 기독교』 등이 있음. yanghh@dreamwiz.com

 

 

1. 들어가는 말

 

함석헌(咸錫憲, 1901〜89)은 수입종교로서의 기독교의 부박함과 폐쇄적인 교단주의 틀을 벗어나 한국사회 전반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 그는 기독교의 진리를 동양 종교사상과 연관시켜 더욱 깊이 이해함으로써 서구적 기독교의 편협한 틀을 탈피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진리를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새로운 한국 현대역사의 창조를 도모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함석헌은 한국 개신교 120년 역사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기독교적 인물’ 중의 한 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함석헌이 그의 나이 53세에 「흰손」 「대선언」을 발표하기 전까지 일본의 우찌무라 칸조오(內村鑑三, 1861〜1930)가 주창한 무교회주의 풍토 속에 있었다는 것은 언뜻 불가사의하게 보인다. 알다시피 근대 한국의 민족적 정체성은 일본제국주의와의 대결 속에서 자각된 측면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함석헌 연구에서 함석헌과 우찌무라의 사상적 관계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은 것은 이 점과도 관련이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본고에서는 무교회주의자로서 함석헌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시기인 『성서조선』 시대의 그의 글을 중심으로 하여 그가 우찌무라의 사상에서 무엇을 수용하고 그것을 어떻게 주체적으로 전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우찌무라의 사상적 틀을 돌파한 계기는 무엇이었는가를 분석함으로써, 우찌무라와 함석헌의 사상적 연관관계를 고찰하고자 한다.

 

 

2. 자아 정체성의 추구

 

조선은 1876년 강화도조약을 출발점으로 서구 열강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러나 조선이 자주적인 근대 국민국가로서 스스로를 성공적으로 변혁하기에는 주변정세가 너무나 불리했다. 조선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던 1901년 함석헌은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독립 애국정신과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는 기독교계 사립학교에서 초등학교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나이 10세 때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이후 조선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 고난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지만, 애국·독립의 기상은 결코 잃지 않았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 조선민족의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보여주었다. 3·1독립운동은 함석헌의 삶을 대지진과도 같이 뒤흔들어놓았다. 함석헌 역시 평양경찰서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목이 다 타 마르도록” 독립만세를 불렀다. 후일 함석헌은 그런 용기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불가사의했다고 회고했다.1

그러나 규모나 내용에서 말 그대로 거족적인 운동이었던 3·1독립운동은 가시적인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조선사회에 또다시 허탈감과 절망감이 엄습했다. 특히 천도교와 더불어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개신교 내에도 이런 분위기는 만연하였다. 현실에 눈을 감으려는 탈역사주의가 ‘정교이원론(政敎二元論)’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교회의 대세를 점해간 것이다.

하지만 3·1독립운동을 경험한 함석헌은 “무슨 새것을 발견하고 잃었던 커다란 것을 찾은 듯”했기 때문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니던 평양고등보통학교의 학생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2 함석헌은 자신과 새로 자각한 민족의식을 어떻게 연결시켜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 채 고향에서 2년간을 혼자 번민했다. 이런 함석헌에게 돌파구가 된 것이 오산학교였다. 3·1독립운동 이후 ‘민족주의의 소굴’로 간주되어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던 오산학교가 1921년 다시 문을 연 것이다. 오산학교에 입학한 함석헌은 민족의식을 더욱 확고히하면서, 감옥에 감금되어 있던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이라는 존재를 알게 된다. 이승훈은 당시 학생들에 의해 “참새 무리의 가슴속에 백두산 호랑이의 혼을 넣어주는” 선생으로 존경받고 있었다.3 함석헌이 남강의 가르침을 직접 받게 되는 것은 토오꾜오 유학을 마치고 1928년 모교인 오산학교에 교사로서 부임하면서부터이나, 이미 재학 시절 함석헌에게 남강의 존재는 크게 각인되어 있었다.

한편 함석헌은 오산학교에서 또 한 명의 생애의 스승이 된 유영모(柳永模)를 만나게 된다. 오산학교의 교장이던 유영모의 가르침을 통해 함석헌은 단순히 성경의 자구에만 구속되어 있던 당시 교회의 성서읽기와는 달리, 깊은 생각과 해석을 필요로 하는 성서읽기의 입체적인 책임을 인식했다. 함석헌의 의식세계에 민족·삶·진리·기독교 등의 커다란 화두가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함석헌은 민족정신을 계발하는 데는 교육이 가장 시급하다는 생각에서 토오꾜오 유학길에 올라 1924년 토오꾜오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일본사회에서는 비합법적이기는 하지만 일본공산당이 결성되어 있었으므로 지식인과 학생 사회에 유물사관이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함석헌은 민족운동의 방법으로 기독교 신앙이 적합한지, 아니면 유물사관이 더 적절한지 등 삶의 문제를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함석헌은 민족, 자신의 삶과 진리, 그리고 기독교 신앙과 유물사관 등의 문제를 올바르게 규정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절박한 내면의 요구에 직면했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내면의 고뇌를 안은 채 우찌무라와 만나게 된다. 후일 함석헌은 우찌무라와의 만남에 대해 “인생문제와 민족문제가 한데 얽혀 맘에 결정을 못하던 내게 그의 강연을 듣는 동안 많이 풀린 것이 있고 참믿음이 참애국이라는 확신이 생겼다”고 회상한다.4 그는 5년간의 우찌무라의 성서 강의를 통해 민족과 자신의 삶 그리고 기독교의 진리가 하나로 관통하여 자아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찌무라로부터 함석헌은 무엇을 발견했던 것일까.

 

 

3. 우찌무라와 ‘두 개의 J’

 

토꾸가와막부(德川幕府) 이래 250년 동안 기독교는 일본을 위협하는 사교(邪敎)로 금지되었기 때문에 일본 기독교인에게는 애국심과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관계지어야 하는가가 커다란 사상적 과제였다. 우찌무라에게도 이 문제는 젊은날 기독교에 입신한 이래 가장 절박한 과제의 하나였다. 우찌무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두 개의 J를 사랑하고 그외의 다른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나는 예수(Jesus)이고 또 하나는 일본(Japan)이다. 예수인가 일본인가, 나는 그중 어느 쪽을 좀더 사랑하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모든 친구를 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예수와 일본을 잃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예수와 일본, 나의 신앙은 하나의 중심을 가진 원이 아니다. 그것은 두 개의 중심을 가진 타원이다. 나의 심정과 지성은 이 두 개의 사랑하는 이름 주위를 회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강하게 하는 것을 안다. 예수는 일본에 대한 나의 사랑을 강하게 하고 고결하게 한다. 그리고 일본은 예수에 대한 나의 사랑에 명확한 목표를 부여한다. 이 두 개가 없다면 나는 단순한 몽상가가 되거나 광신자가 되어 무정형(無定形)의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5

  1. 함석헌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삼중당 1964, 76면.
  2. 같은 책 78면.
  3. 같은 책 122면.
  4. 같은 책 162면.
  5. 內村鑑三 「二つの J」, 『Japan Christian Intelligencer』 1926年 9月 9日; 『內村鑑三全集』 第30卷, 東京: 岩波書店 1980, 5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