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문학, 세계와 소통하는 길

 

해외작가에게 듣는다


하나이며 여럿인 세계문학

 

 

한샤오꿍 韓少功

중국의 소설가. 저서로 『마교사전(馬橋辭典)』 『암시(暗示)』 등이 있음.

 

 

위장 민족주의와 젖먹이 세계주의

 

중국인이 자신을 서양인으로 바꾸려고 할 때 부딪히게 되는 큰 장애는 아마도 위장(胃腸)에서 올 것이다. 어릴 때부터 양식(洋食)에 단련된 상태가 아닌 바에야 다 큰 뒤 두부를 버리고 치즈를 즐기거나 생강과 파, 민물 게를 버리고 덜 익은 소고기 요리를 가까이하기란 거의 괴로운 형벌을 받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세계 각지의 차이나타운에 있는 무수한 중국식당들은 바로 이러한 음식전통의 유력한 증거이다. 때문에 세계문명의 일체화 문제가 식탁 이외의 측면에서는 대대적으로 논의되곤 하더라도, 양복을 걸치고 버터 바른 듯 혀를 능란하게 굴려대는, 겉은 노랗지만 속은 하얀‘바나나인간’도 일단 공복 때가 되면 중국 군침을 흘리고 중국 트림을 하면서 서양인과 달리 중국 음식을 마음껏 즐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물론 모든 사람의 위장이 민족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혹은 적어도 이러한‘위장 민족주의’가 그리 절대적이고 영원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가끔 간단한 문화실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즉 아무나 어떤 사람을 잡아와서 사흘 동안 굶기면 어떻게 될지 보는 것이다. 만약 굶어서 눈이 뒤집힌 중국인에게는 치즈를 주고, 서양인에게는 두부를 준다면 그 음식 맛이 어떻게 느껴질까? 음식문화의 특성이 이 사람들 몸에서 여전히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아마도 미친 듯 게걸스럽게 먹을 테고 그러고 나면 두부와 치즈는 아무런 맛을 느낄 수 없는 열량으로 바뀔 것이다. 말 그대로, 배고픈 마당에 찬밥 더운밥 가릴 여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요컨대 배가 고플 때에는 맛을 분별할 수 없고 문화를 구별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모종의 생리적 요구가 극한에 임박했을 때, 예컨대 어떤 사람이 거의 굶어 죽어가는 지경에 이르면 예전에 지극히 선명하고 위대했던 문화적 특성 역시 옅어지고 서서히 사라지며, 심지어는 완전히 없어지고 만다.

이렇게 본다면 문화 차이란 배부른 자에게 해당하는 일일 뿐 배고픈 사람과는 별 관계가 없다. 그것은 배불리 먹고 마신 사람만이 진실로 느끼고 맛을 음미하며 사고하고 논란을 벌이고 탐구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수많은 대작들과 형형색색의 유파가 생길 수 있는 것이지, 일단 배고픔에 맞닥뜨리게 되면 문화 차이란 것은 어쩔 수 없이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바꿔 말하면 사람이 배불리 먹게 되면 사는 것이 퍽 문화적이 되고 못 먹어 굶으면 사는 것이 자연적이 되는 것이다. 배불리 먹게 되면 사는 것에 차이가 발생하게 되고 못 먹어 굶으면 사는 것이 비슷해진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나는 문화다원주의자이기도 하고 문화보편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는 내가 어떤 대화 상대와 마주하고 있는지, 예컨대 상대방이 방금 아침을 먹은 사람인지 아닌지에 따라 결정된다.

사실, 문화 차이란 그저 어른들의 일이기도 하다. 어른들은 동양의 가족주의나 서양의 개인주의를 고민할 수 있지만, 어린 아이들은 콧물을 훔치고 공을 빼앗고 진흙에서 뛰놀면서 검은 머리, 하얀 머리, 노란 머리에 상관없이 모두 똑같은 덕성을 갖추고 있다. 문화 차이는 또한 그저 건강한 사람의 일이다. 건강한 사람은 동양인의 경험주의나 서양인의 공리주의를 고민할 수 있지만, 폐암 같은 병에 걸리면 피차간에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느끼게 되며, 병상에서 내는 신음에는 어떤 민족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문화 차이가 안전한 자의 일이라는 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취권(醉拳)과 야구의 구별도 유교와 기독교의 구별도 그리고 중화문명과 지중해문명의 구별도 마찬가지이다. 그 모두가 그것을 논하는 사람이 버젓이 살아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들이 대지진이나 항공사고를 당했다든지 흉악한 강도를 만났다고 생각해보라. 목숨이 위태로운 생사의 갈림길에서 그들 사이에는 차이가 더 많을까 공통점이 더 많을까? 도망치거나 맞서 싸움, 또는 비겁하거나 용감함 따위의 그들의 대처방식이란 것이, 어떤 민족이나 국가의 문화적 꼬리표를 붙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어떤 한 민족국가의 전매특허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중국인은 용감한 것을 영예라고 보는데 서양인들은 용감한 것을 수치라고 여길 것인가? 그런 상황에서 중국인은 살고 싶어하는데 서양인은 기어이 죽고 싶어한단 말인가?

그들이 도망치거나 맞서 싸울 때 어떤 사람에게는 야구의 영향이 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취권의 영향이 보이더라도, 이러한 형식상의 차이가 생사의 길목에서조차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죽고 사는 문제에서 여전히‘다원(多元)’적일 수 있을 것인가? 만약‘다원’적일 수 없다면 생명을 보존하고 지속하게 하는 일체의 관념과 의식, 제도, 정신은 공통적 특징을 더욱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러한 일체의 관념, 의식, 제도, 정신이란 것들은 문화 토론의 테이블 위에 올리지 말아야 하는가?

목숨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문화가 어찌 가능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오직 하나의 목숨만을 가지고 있고 하나의 머리, 하나의 생식기가 있을 뿐으로, 이는 중국이든 서구든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것들로 인해 발생한 문화는 큰 차이가 없다. 예로부터 전세계 각 민족에서 아기가 엄마를 부르는 언어는‘마마’(mama) 하나이다. 이러한‘영아(嬰兒) 지구화’와‘젖먹이 세계주의’는 중요한 문화적 상징이다. 이는 용감함이 미덕이지 추태가 아니라는 점이 모든 문화전통에서 똑같이 긍정되고 존중받으며 여기에는 어떠한 차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편 사람은 당연히 종족과 성별이라는 생리적 소속이 있으며 계급, 직업, 공동체, 국가, 지리, 역사 등의 생존환경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매우 다르고 차이가 존재해왔으며 이로 인해 형성된 문화는 실은 그다지 공통된 것이 없다. 특히나 기아에서 멀어지고 불치병에서, 위험에서, 어린이다움에서, 반(半)동물상태에서 멀어지면서, 다시 말해 모종의 생리적·자연적 극한에서 멀어지면서 사람들은 완전하게 각자 자기 주장대로 하고 각자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살 수 있다. 이른바 문화란 바로 이러한 제한된 범위에서 비로소 다원적일 수 있는 것이고 비로소 오색찬란하게 백화제방(百花齊放)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들은 다르면 다른 대로, 충돌하면 충돌하는 대로 백명의 헌팅턴(S. Huntington)이나 백명의 싸이드(E. Said)를 내놓아도 온전히 떳떳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잊어서는 안될 것, 문화 토론에 참여하는 높으신 분들이 잊어서는 안될 것은 우리가 사흘 동안 굶주림을 참을 수 없는 것처럼 어떤 명제라도 제한된 범위라는 한계에 직면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문화의 특성을 논할 때의 중요한 경계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계를 경시하면 어떠한 참된 지식도 오류일 수 있다. 이러한 경계를 경시한 문학 토론은, 그것이 같음을 지향하든 다름을 지향하든, 한쪽 다리만으로 먼 길을 떠나려 하는 것과 같다.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나는 모든 우수한 문학은 전세계 독자를 잠재적인 소통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교통, 통신, 번역, 시장 등의 장벽으로 인해 그러한 소통이 충분하게 실현되지 못하거나 소통과정 가운데 어떠한 선별과 손실 더 나아가서는 오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셰익스피어나 카프카 같은 외국작가들의 경우에도 그들의 원래 모습과 비교해보면 이미 원래와는 다른 변형과 변조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들은 모두 특정한 문화전통의 산물인데 우리가 그러한 전통을 전부 이해할 수 없는 이상 어떻게 원래 진정한 의미의 셰익스피어와 카프카를 이해한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이해라는 것에는 원래 한계가 있는 법이어서, 가령 자기 민족의 작가에 대한 이해도, 가족이나 이웃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이다. 우수한 문학작품은 보편적인 인성의 경험, 즉 모든 독자들이 그것을 조우할 때 일어나는 마음의 떨림을 제공해주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 대해 어느정도 개방성을 지니기 마련이다. 나의 장편소설 『마교사전(馬橋辭典)』은 이미 세 종류의 영문 판본으로 출간되었다. 일부 서구 독자들은 책을 읽으면서 심지어 이것이 중국소설이라고 느끼지도 못했으며 마치 그들 주변에서 일어난 일처럼 여겨졌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이는 그들이 이 책 속의 느낌과 사상을 전부 이해했기 때문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 어떤 작가도 자국 독자이건 외국 독자이건 독자에게 자신과 완전히 똑같은 사람으로 변할 것을 요구할 권리는 없다. 어떤 작가도 지구화시대의 엄청난 수의 해외 독자를 포함하여 특정한 잠재적 독자에 영합하려고 진력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추측하고 영합하려는 투기는 오로지 글을 구속할 뿐이며 혼란스럽게, 심지어 거짓으로 만들어버릴 뿐이다. 반대로 작가가 글을 쓸 때에는 기술적으로 표현의 정확성과 명료함에 주의하는 일 외에는 오로지 스스로의 진실한 마음을 대면해야만 자기 자신을 세계 전부로 삼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가 성실하게 이 은밀한 세계에 빠져들 때 전세계 독자들이 각기 저 나름대로 이해할 가장 큰 가능성을 얻게 될 것이다.

문화의 동질화와 차별화는 영원히 병립하면서도 모순되지 않는 하나의 과정이다. 괴테 이전, 세계문학이 중요한 차이점을 지녔던 것은 지리적 요인 때문이다. 교통과 통신수단이 낙후되었던 것이다. 예컨대 한국과 중국의 문화는 서로 달랐으며 아시아와 유럽의 문화는 무척이나 달랐다. 괴테가 말한‘세계문학’은 이러한 관점에서 말하자면 아마도 의의가 없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리공간은 단지 문화 차이를 제약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이지 그 전부는 아니다. 종교, 정치, 경제, 기술, 연령, 성별 등도 차이를 만들어낸다. 만약 자본 주도의 전지구화가 어떠한 차이와 충돌을 격화시킨다면 새로운 형태의 분열은 마찬가지로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루슈디(S. Rushdie)의 『악마의 시』는 다른 종교집단들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세계문학’인가? 해리포터 씨리즈는 서로 다른 연령대 모두가 열광하는‘세계문학’인가? 어떤 지리적 장애도 이제 특별히 중요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러면 세계는 이제 하나의 세계가 된 것인가? 지리 이외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괴테 또한 비교적 천진한 노인네인 듯하다. 아마도 괴테는 자신이 말하는‘세계문학’이란 다양성과 충돌을 수용하는 것이며 결코 동질화된 문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의 예측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는데 왜냐하면 문학은 원래부터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보다 한참 이전에도 세계의 문학은 바로 이러한‘세계문학’, 즉 같기도 하고 또 다르기도 한 문학, 공자가 말한 대로‘타고난 것은 서로 비슷한데 습관으로 인해 서로 멀어진’문학, 지금 말로 하면 인성은 서로 통하나 문화적으로 차이를 지닌 문학이었다. 그리스, 이집트, 인도, 아랍의 문학 등은 이처럼 줄곧 조용히 세계와 대륙의 지각판을 뛰어넘었고 결코 어떤 특정지역의 집단에 독점되지 않았다. 당시 그들 문학이 세계에 전파될 수 없었던 것은 전파기술이 낙후한 탓이지 문학 자체와는 결코 관계가 없다.

김하림 옮김

 

 


왜 일본語문학이냐

 

 

김석범 金石範

재일조선인 소설가. 장편소설 『화산도(火山島)』로 마이니찌예술상(每日藝術賞)을 수상함.

 

 

‘세계문학’에 대해 한마디

 

문학이 언어예술인만큼‘세계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