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정지아 鄭智我

1965년 전남 구례 출생. 1990년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을 내며 작품활동 시작. jiajeong@hanmail.net

 

 

 

행복

 

 

토요일 정오가 지난 서울역은 발디딜 틈 없이 혼잡했다. 웅웅거리는 사람들의 소음으로 귀가 다 먹먹할 지경이었다. 어떻게 부모님을 찾아야 할지 난감했다. 플랫폼에서 기다리기로 하고서는 차가 막히는 바람에 근 이십분이나 늦어버린 것이었다. 일단 몇번 폼으로 도착했는지부터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전광판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나는 저만치 등을 돌리고 서 있는 한 늙은이를 발견했다. 제법 떨어져 있었고 사람들 틈에 끼여 뒷모습의 일부만 언뜻 보였을 뿐이지만 아버지가 분명했다. 혼잡한 역에서 아버지를 한눈에 알아차린 순간 온몸에 힘이 빠졌다. 아버지를 쉽게 알아본 것은 얼마 전에 사서 보낸 상아색 여름점퍼 때문은 아니었다. 시골 장마당에서 산 것처럼 후줄근한 점퍼가 백화점 마네킹에 입혀져 있던 바로 그 옷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은 아버지가 차에 오른 한참 뒤였다. 아버지를 알아보게 한 것은 뒷모습이었다. 아버지의 뒷모습은 유분이 적어 갈라터지기 시작한 황갈색의 유화 같았다. 조금의 윤기도 없이 푸석푸석한 아버지의 등은 자칫 손이라도 대면 한줌의 먼지로 내려앉고 말 것 같았다. 아버지, 하고 다소 물기 젖은 음성으로 불렀을 때 아버지는 8·15 특사로 출감하던 이십년 전의 그날처럼 멀뚱한 얼굴로 나를 일별하고는 내려놓았던 짐을 집어들었다. 뒷모습보다도 더 건조한 표정이었다. 아버지의 표정은 늘 그랬다. 우리 동네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서울의 사년제 대학에 합격했을 때도, 남편을 처음 소개했을 때도, 사립학교 선생으로 취직이 되었을 때도, 아버지는 그렇게 무표정했다. 아이, 느그 아부지 땜시 민망해서 죽겄다. 니가 서울서 젤 좋은 핵교 선생이 됐다고 만내는 사람마동 얼매나 자랑을 해대는지 몰러야, 어머니의 자랑 섞인 투정을 듣고서야 아버지도 내심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정도였다.

“아이, 승원이는?”

차에 오르던 어머니가 물었다. 아침 일찍 서둘러 승원이를 큰집에 맡기고 오는 길이었다.

“델꼬 오제. 보고 잡그만.”

“거봐, 보고 싶어하실 거라고 그랬지? 데리고 오자니깐, 일곱살이면 이제 다 컸는데 성가실 게 뭐 있다고……”

온 가족이 어딘가를 다녀와야 휴일다운 휴일을 보냈다고 생각하는 남편은 승원이를 두고 온 게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엊저녁 음식 준비할 때부터 놀러 간다고 잔뜩 들떠 있던 승원이는 저만 큰집에 남겨지자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듯 제 아버지 목을 끌어안고 섧게 우는 아이의 등을 두드리며 남편은 내게 눈을 흘겼다. 그런 남편에게 부모님과의 첫 나들이라는 말을, 무슨 치부라도 되는 양 나는 하지 못했다.

연애시절 자취방에 처음으로 놀러 갔을 때 남편은 수줍은 미소와 함께 낡은 사진첩을 내밀었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성장과정을 보여주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꽃무늬가 그려진 겉표지에는 ‘Happiness’라고 적혀 있었는데, 양 귀퉁이가 너덜너덜하게 닳은 세월의 흔적 속에서 사진첩의 제목은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축제의 순간에 느닷없는 화산폭발로 고스란히 묻혀버린 고대 유적지의 비밀스런 문 앞에 서 있는 느낌이랄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힘들게 자라난 남편도 나처럼 가족과의 단란한 한때를 가져보지 못한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도 빛바랜 사진 몇장으로나마 행복했던 시절이 박제되어 있는 것이다. 묵은 먼지를 털어내며 사진첩을 넘기면 박제된 행복의 순간에서 피어오른 바람이 내 몸을 한줌의 먼지로 날려버릴 듯했다.

멀거니 겉표지만 들여다보고 있던 나를 대신해 그가 페이지를 넘겼다.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닌 그의 아버지가 좁은 골목길에서 썰매를 탄 어린 그를 밀고 있는 사진이 첫장에 꽂혀 있었다. 웬일인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 거구나 하는 소소하나 서서히 가슴을 파고드는 감동과 함께, 연탄재가 쌓인 골목길에서 아빠와 함께 썰매를 타고 한나절 신나게 놀 수 있었던 그, 고사리손으로 사진첩에 사진을 끼워 넣고 그 밑에 ‘아빠와 썰매를’이라고 정성들여 써놓은 후 아버지가 그리울 때마다 눈물을 글썽거리며 사진 속의 한때를 추억했을 그가 갑자기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그때 나는 뭔가가 서걱거리며 무너져내리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내 사진첩에도 이제 그리워하며 추억할 부모님과의 한때가 담기게 될 모양이다.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일 듯한 이번 나들이를 나는 오롯이 부모님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아들 녀석의 눈물바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떨어뜨려놓고 온, 남편에게도 말하지 못한 저간의 사정은 그러했다. 남편에게 굳이 얘기 못할 사정도 아니련만 몇번 입을 달싹이다 만 것은 자취방에서 사진첩을 내밀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 탓이었다.

우리에게도 셋이 함께 찍은 한장의 사진이 있기는 했다. 그러고 보니 가족이 함께 밖에 나간 것을 나들이라고 한다면 바로 그날, 나들이의 기억도 있었다. 중3 여름방학 때였다. 사상범으로 십여년간 복역했던 아버지가 8·15 특사로 풀려났다. 광주교도소 앞 짧은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서 몇시간을 기다린 끝에 십여년 만에 상봉한 우리 가족은 곧장 고향으로 내려왔고, 다음날엔가 할머니와 아버지의 형제 누이, 사촌들까지 사진관으로 몰려가 ‘출소기념’이라고 박힌 사진 한장을 찍은 후 우리 세 식구만 피아골 계곡으로 떠났던 것이다. 구름 한점 없어 한여름 뙤약볕이 거침없이 대지를 달구는 날이었다. 아버지는 수건과 비누를 든 채 부신 햇살을 토하고 있는 커다란 바위 뒤로 사라졌다. 아버지는 작열하는 햇빛 속에서 십 몇년 만의 자유를 만끽하며 목욕을 했을 것이다. 나와 어머니는 한여름인데도 얼음장처럼 차디찬 계곡물에 목욕할 엄두가 나지 않아 계곡물에 담가놓았던 참외나 깎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얼마 후 팬티차림으로 수건을 머리에 둘둘 감고 우리에게 돌아왔지만 나는 십여년 만에 만난 아버지에게 별로 할말이 없었다. 한동안 계곡물처럼 서늘한 침묵만 흘렀고, 그후 우리는 당시만 해도 복원되지 않아 허허롭기 그지없던 연곡사를 한바퀴 휘 둘러보고는 돌아왔다. 반나절도 안되는 짧은 나들이였다.

통행증을 끊기 위해 내린 창문 틈으로 알싸한 매연냄새 가득한 바람이 밀려들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어머니의 손에 쥐여 있던 손을 차마 빼지 못했는데 내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인 어머니의 손가락은 잔가시라도 박힌 양 따갑고 거칠었다.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승원이는 제 외할머니의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눈물을 글썽이며 아파? 하고 물었다. 어머니가 일흔일곱이 되도록 나는 그 손 한번 어루만져본 적이 없었다. 이번 여행의 추억은 빈 위장에 들이켜는 새벽의 소주처럼 지독히도 씁쓸할 듯싶었다.

남편은 차창을 연 채 고속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햇볕에 후끈 달아올랐던 차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유난히 추위를 타는 어머니는 창문을 닫으라고 말하는 대신 벗어놓았던 점퍼를 어깨 위에 걸쳤다.

“폴쎄 가을인갑다. 코스모스가 다 피었그마이.”

어머니는 고속도로변에 드문드문 피어난 코스모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학입시에 실패한 후 고향마을에서 공부한답시고 소설책이나 펼쳐보며 빈둥빈둥 시간을 보낼 때였다. 잠시 바람을 쐬러 마당에 나왔는데 참깨 두드리던 어머니가 멍하니 화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이 심고 거두지 않아도 철따라 봉숭아며 맨드라미, 백일홍, 채송화, 코스모스 따위가 잡초처럼 무성하게 피어나던 화단에는 늦가을이라 시든 코스모스 꽃잎 몇개가 앙상한 대궁에 붙어 찬바람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화단을 향했던 시선이 먼산으로 옮겨지는가 싶더니 어머니는 반쯤 풀어져 있던 머릿수건의 끝자락을 당겨 눈께를 닦아냈다. 내가 멍석에 널린 마른 참깨단을 바삭바삭 밟고 다가갈 때도 어머니는 눈치채지 못했다. 한번도 어머니의 눈물을 본 적이 없던 터라 당황한 나는 어머니의 어깨를 무작정 잡아흔들었다. 엄마, 왜 그래? 눈물로 부옇게 흐려진 시선이 나를 향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어머니의 어깨를 움켜쥐었던 손을 풀고 한발짝 뒤로 물러났다. 촛점 없는 어머니의 멍한 눈빛이 너무도 낯설었던 것이다. 객사 직전의 떠돌이에게나 가능할 것 같은 섬뜩하도록 막막한 그 눈빛은, 남편도 돈도 없이 심지어는 세상의 작은 동정도 없이 혼잣몸으로 어린 자식을 그러안고 십년 세월을 꼿꼿이 버텨냈던 어머니, 사십 킬로도 되지 않는 가녀린 체구로 열 마지기 농사를 혼자 지어내던 어머니, 그 독한 어머니에게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달빛 아래 피를 뽑고 걸어올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아 어두컴컴한 자갈투성이 신작로를 네 발로 기어왔던 어머니, 다른 여자들은 화장을 지우는 데나 쓸 가제수건으로 피가 줄줄 흐르는 무릎을 동여맨 채 식은 밥 한덩이를 찬물에 말아 아궁이에 장작을 집어넣듯 꾸역꾸역 쑤셔넣던 어머니의 눈에서는 호랑이눈 같은 불덩이가 이글거렸고, 내가 아는 한 어머니의 눈빛은 그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어야 했다. 마른 감잎이며 은행잎 따위가 바람에 쓸려 나뒹구는 마당 한가운데 우두커니 선 채 좀처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내 앞에서 어머니는 무안한 듯 먼지가 보얗게 내려앉은 머릿수건을 무릎에 대고 탁탁 털었다. 물기가 채 가시지 않은 눈으로 어머니는 배시시 웃음까지 흘리며 참깨타작을 계속했다. 낙엽이 진 걸 봉께 맴이 어째 좀 그래야. 타닥타닥, 참깨를 털며 어머니는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어머니는 등받이에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껏 내 뇌리에 각인된 그 가을날의 눈빛은 아니다. 어머니의 시선은 그저 밖을 향해 무심히 열려 있을 뿐이다. 후면경으로 잔뜩 웅크린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는지 남편은 창문을 닫았다. 차 안이 이내 후끈 달아올랐다. 아직 한낮의 태양은 뜨거웠다. 후텁지근한 공기 탓에 졸음이 밀려들었다. 차의 움직임에 따라 머리가 흔들리고 있는 걸 보니 아버지는 진작부터 졸고 있는 모양이었다.

“장모님, 음악 틀어드릴까요?”

낯선 목소리가 ‘돌아가는 삼각지’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자기는 잘 듣지도 않는 트로트였다. 이번 여행을 위해 일부러 산 게 틀림없었다.

“배호 좋아하신다면서요.”

애 어른 할 것 없이 ‘저 푸른 초원 위에’를 흥얼거리고 다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남진이 좋냐, 나훈아가 좋냐고 묻는 내게 일에 치여 라디오 들을 짬도 없던 어머니는 잠시 생각하다가 좋기야 배호제,라고 대답했다.

“젊을 때 좋아했제. 오랜만에 들응께 좋네.”

말은 그렇게 했으나 어머니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두번째 곡이 채 끝나기 전에 어머니의 어깨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새벽부터 이것저것 챙기느라 부산했을 것이다. 조금 당겨앉아 어머니의 머리를 내 어깨에 얹어놓았다. 어머니는 입을 벌린 채 잠들어 있었다. 대학 입학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가던 기찻간에서 내가 몇번이나 자세를 바꾸는 동안 어머니는 초상화의 모델이라도 되는 양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머니가 입까지 벌리고 잠든 것이다. 남편 말마따나 늙은이 냄새도 나는 듯했다. 지난 구정 무렵 남편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향수를 사들고 왔다. 나는 몇달이 지나도록 그것을 보내드리지 못했다. 구정 선물은 약간의 돈을 송금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아이, 느그 아부지한테서 늙은내가 나야. 얼마 전 어머니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은 후에야 남편의 선물은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었다. 어머니 몫의 향수는 아직 내 책상서랍에 남아 있다. 어머니에게 향수를 내민다는 것은 당신에게서도 냄새가 난다는 의미일 것만 같아 차마 건네지 못한 것이다.

희미하게 코끝을 스치는 냄새는 지난 학기말 회식자리에서 나를 옆에 불러앉혀 한바탕 사설을 늘어놓던 늙은 교장에게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냄새와 흡사했다. 송선생은 교사가 된 목적이 뭔가, 목적이. 비싼 등록금 내며 귀동냥으로 주워들은 약간의 지식이 아까워서였는지 돈이 필요해서였는지, 대답이 궁색해서 머뭇거리고 있던 내게 교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교사는 학생을 대학에 진학시키는 것이 제일의 목적이요. 그 외에는 말짱 도루묵이야.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지요? 알고말고였다. 지난 몇년 동안 내가 담임한 반의 성적이 늘상 하위권이었기 때문일 것이고, 더 직접적으로는 학교 이사회의 뭐라나 교장과도 각별한 사이라는, 내 반 아이 한 녀석의 어머니 때문일 것이었다. 전교 일이등을 다투던 녀석은 도무지 인간미라고는 없어 성적을 최우선으로 아는 공부 잘하는 애들 사이에서도 이른바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집에 털어놓았는지 한 번은 이사회에 참석했던 녀석의 어머니가 교장실로 나를 불렀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교장과 시시덕거리고 있던 그녀는 인사랍시고 고개를 까닥이고 나서는 불쑥 봉투를 내밀었다. 전에도 몇번 그녀의 봉투를 거절한 적이 있었다. 남달리 청렴해서나 철저한 교육관을 갖고 있어서는 아니었다. 작은 선물 하나 건네지 않는 학부모에게는 서운한 느낌도 없지 않을 정도로 어찌 보면 나는 닳은 선생이었다. 봉투를 받은 적은 없지만 자의적으로 내가 정한 기준에 따라 오만원 안쪽의 선물은 기꺼이 받는 편이었다. 나에 대한 기본 정보가 있었는지 봉투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내게 그 어머니는 교양있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 돈 아니에요. 물론 현금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고액의 백화점 상품권일 테지. 무슨 일이십니까? 저희 애가 친구들과 잘 지내지 못하는 것 같아서요. 그러지 않아도 그 문제로 상현이 어머님을 일간 뵈려고 했습니다. 상현이가 다소 이기적인 편입니다. 친구들에게 노트 필기 한번 보여주는 법이 없고, 제 물건 하나 빌려주는 법이 없습니다. 성적이 좋지 않은 아이들과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저도 몇차례 타일렀지만 소용이 없더군요. 부모님께서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그렇게 말하면서 무슨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 상현이는 어려서부터 공부 못하는 애들하고는 놀지 말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상현이의 문제는 고스란히 제 아버지나 어머니의 문제이기 십상이었다. 아니나다를까, 그녀는 내 말에 발끈해서 아들과 별 다르지 않은 인생관을 한참 늘어놓았다. 결국 자기애에게는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었다. 그런 사고방식으로도 지금까지 남부럽지 않게, 아니 외려 남 부러워하게 잘 살아왔을 그녀를 상대로 토론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상현이 녀석에게 별다른 애정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성공학 서적깨나 읽은 듯한 그녀의 달변을 별 하나 나 하나, 어린시절 잠 못 이루던 밤처럼 천 넘게 헤아리며 간신히 견디고 있던 나를 결정적으로 한방 먹인 것은 교장이었다. 상석에 앉아 팔짱을 낀 채 이십분 넘게 이어진 그녀의 성공학 강의를 듣고 있던 교장이 자기도 지겨웠는지 불쑥 다가와 봉투를 집어들고는 내 호주머니에 쑤셔넣었던 것이다. 이봐 송선생, 상현이 성적 좋잖아.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이야? 공부를 열심히 하다보니 친구들하고 놀 시간이 없는 것뿐이지. 공부하려는 애들이 공부에 전념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선생의 본분 아니요? 본분에만 충실해요, 본분에만. 봉투를 꺼내놓고 말없이 돌아선 것은 할말이 궁색해서가 아니었다. 바싹 붙어선 교장의 몸에서 풍기는 늙은이내를 도무지 참기 어려웠을 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냄새가 내 부모에게서 풍기고 있는 것이다. 젊을 때는 사람마다 다르던 체취가 왜 늙어지면 누구랄 것 없이 똑같아지는 것인지, 그것은 어쩌면 한 인간이 평생 자신만의 무엇을 찾기 위해 발버둥쳐보았자 생물학적 한계 앞에서는 망망대해의 한점 시든 잎사귀에 불과하다는 무서운 자연의 전언은 아닌지.

배호의 목소리는 더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테이프를 남편이 꺼버린 모양이었다. 오른쪽 미등을 깜박이며 차가 휴게실로 들어서고 있다. 시동이 꺼진 후에야 어머니는 눈을 떴다. 눈가에는 질척한 눈곱이 끼어 있었다. 기차로 다섯 시간 달려온 서울행만 해도 노인네에게는 힘에 부칠 터였다. 아무래도 무리한 일정이었다. 서울에서 며칠 쉬다 여행을 가자고 했건만 여행 당일에야 올라온 것은 올밤 수확을 끝내고 오겠다는 부모님의 고집 탓이었다. 인건비, 비료값 제하고 나면 오십만원이나 남을까. 늘그막에까지 그토록 악착을 떨어야 하는 부모님의 고단한 생이 안타깝기보다 짜증스러웠다.

“가락국수 드실래요? 여기 국물맛이 일품이에요.”

승원이가 걸음마를 시작한 이래 거의 주말마다 전국을 누비고 다닌 남편은 휴게소 음식까지 죄 꿰뚫고 있었다.

“기차 안에서 점심 묵었는디 국시는 멀라고. 권서방이나 묵고 오소.”

어머니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럼 내려서 다리라도 푸시죠.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힘드실 텐데요.”

남편이 뒷문을 열고 팔까지 붙들었지만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차가 멈춘 것도 모른 채 잠에 취해 있었다. 나 역시 가락국수 생각은 없었으나 혼자 먹게 하기가 뭣해서 따라내렸다.

“맛있지? 여기 국물맛이 내가 먹어본 중에 최고야. 나와서 바람도 쐬시고 국물이라도 좀 드시면 좋을 텐데. 점심이래야 기차 안에서 고작 김밥으로 때우셨을 거 아냐?”

남편 말대로 얼큰한 국물맛이 제법 개운했으나 입맛은 당기지 않았다. 삼천원을 헛되이 쓰지 않을 생각으로 차에 남아 있는 어머니가 가슴에 얹혀 국물조차 시원하게 내려가지 않았다.

“왜 그래? 어제 밤늦게까지 음식 장만하느라 무리한 것 아냐?”

나는 내 몫의 국숫가락을 남편 그릇으로 옮겼다.

“좀 맛있게 먹을 것이지, 아침에 토스트 한쪽밖에 먹지 않아놓구선……”

“음식 만들면서 이것저것 집어먹은 게 속이 더부룩해서 그래요. 국물 마실게. 맛있네.”

남편에게 미안해서 억지로 국물을 몇 숟가락 떠넣었다. 나는 남편에게 왠지 늘 미안한 느낌이었다.

차가 달리자마자 어머니는 다시 졸기 시작했다. 이제 막 여행을 시작했다기보다 힘든 여정을 끝내고 귀향길에 오른 풍경이라는 편이 더 적확할 듯했다. 이걸 과연 나들이라고 할 수 있을지, 첫 나들이치고는 참 스산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 역시 운전하는 남편만 아니라면 좀 자두고 싶었다. 온몸이 비에 젖은 청바지처럼 무거웠다. 남편이 도와준다고는 하지만 대개 내 몫일 수밖에 없는 살림과 직장일과 병행하는 탓만은 아니었다. 승원이가 갓난애던 시절에 비하면 일은 한결 수월했다. 걸을 때 자연적으로 흔들리는 팔조차 거치적거린다고 느껴지는 것은, 때로 숨쉬기조차 귀찮아지는 것은, 나이 먹어간다는 징조일지도 몰랐다.

식후인데다 차창으로 제법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 때문에 졸리운지 남편이 창문을 내렸다. 깊은 잠에 취한 채 어머니는 양팔을 쓸어내렸다. 추운 모양이었다. 흘러내린 어머니의 점퍼를 끌어올렸다. 뒤창으로 스며든 햇살을 반짝반짝 튕겨내는 화사한 오렌지색 점퍼만이 지금 우리가 여행지를 향해 질주하는 중임을 말해주는 듯했다. 요즘 노인들 사이에서 오렌지색이 유행이라나 뭐라나, 점원이 뭐라고 꼬드겨도 늘 사던 베이지색이나 검자주색으로 골랐어야 했다. 주름진 고랑마다 지난 삶의 행적이 고스란히 새겨진 어머니의 얼굴을 배경으로 오렌지색 점퍼는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지난해 이맘때. 어느 학생의 질문이 불쑥 떠올랐다. 수업시간에 백석의 짧은 수필을 막 읽어준 후였다. 이 좀말로 할까고 머리를 기울여도 보았으나 그래도 나는 그 처량한 당나귀가 좋아서 좀더 이놈을 구해보고 있다, 마지막 구절의 여운으로 잠시 침묵하고 있던 참인데 한 녀석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묻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몇년을 살고 왔다는 녀석은 애널리스트인지 뭔지 나로서는 이름도 생소한 직업을 갖는 게 꿈이라고 했다. 돈을 잘 벌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 사람 가난했죠?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녀석은 말을 이었다. 그렇게 비효율적인 생각을 하는데 잘살 리가 없죠. 선생님, 사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문학 따위를 우리가 왜 알아야 되죠? 누군가 냉큼 말을 받았다. 그걸 몰라서 묻냐? 수능을 잘 봐야 되니까 그렇지. 작년에는 이용악이 출제되었으니까 올해는 백석이 나올 확률이 높다고. 질문을 한 녀석에게는 매우 만족스러운 대답인가보았다. 출제확률이 높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부분의 학생들이 나를 주시했다. 역시 공부 잘하는 외국어고등학교다웠다. 아이들이 원한 것은 출제 가능성이 높은 백석의 시를 샅샅이 분해해주는 것이었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예전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시나 소설을 읽어야 하는지 한바탕 사설을 늘어놓지도 못했다. 등골이 서늘한 채 멍하니 서 있었을 뿐이다. 어느 학부모가 기증한 에어컨이 쌩쌩 잘 돌아가고 있었는데도 두꺼운 백석전집을 든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처량한 당나귀라도 된 기분이었다.

녀석에게 내 부모의 삶이란 돌아볼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실패자의 삶일 것이다. 초등학교 일학년 담임만 삼십년 하면서 긁어모은 돈을 부동산에 투자해서 돈푼깨나 만지게 된 사촌이 아버지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거드름을 피우기 시작했을 때, 구멍가게를 하는 먼 친척이, 그래도 아는 사람 물건 팔아줘야 한다며 십분씩이나 자전거를 타고 가서 솔 한 보루를 찾는 아버지에게 요즘 누가 솔을 피냐며 타박을 할 때, 명절날 모인 사촌들이 그렇게 된다면야 좋제만 누가 그러고 삽디여, 요새 세상에야 돈이 최고제,라며 아버지의 말을 잘라먹을 때, 내 가슴속에서는 불덩이가 치솟았다. 그러나 그 불덩이는 입밖으로 터져나올 만한 힘도 없이 저 혼자 맥없이 사그라들곤 했다. 뜨거운 불덩이를 식힌 것은 어쩌면 대상이 내 부모여서 무시나 경멸이 담겨 있지 않을 뿐 남과 다르지 않은 내 시선이었는지도 몰랐다. 영웅까지는 아니어도 시대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던 아름다운 인간으로 내 부모를 바라보았던 적도 있었다. 이상을 위해 목숨도 내걸었던 부모님은 내 삶의 지표였고, 고난에 찬 두 분의 인생은 감히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위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서 피곤을 이기지 못해 깊은 잠에 취해 있는 부모님은 억압과 착취가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목숨을 걸고 전장을 누비던 혁명가가 아니라 다만 가난하고 볼품없는 늙은네일 뿐이었다.

탄 사람이 들뜬 여행객이든 휴식이 필요한 지친 영혼이든 차는 애초의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저녁때가 가까워지면서 햇살이 누그러들자 굳이 창문을 열지 않아도 차안 공기가 서늘해졌다. 산중턱으로 뚫린 길이라 평지보다 기온이 더 낮은 듯했다. 답답하게 막아서던 산이 멀찌감치 물러나더니 낮은 구릉지대가 나타났다. 먼 초원 위로 소떼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멀리 펼쳐진 구릉은 푸르렀지만 가을 문턱의 푸르름은 한여름의 맹렬한 기세를 잃은 채 쇠락의 싹을 품고 있었다.

“여그가 워디다냐? 우리나라에 이런 디도 있다냐?”

두 시간 가까이 깊게 잠들었던 어머니가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켜더니 차창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삼양목장 아니다고. 우리나라서 방목이 가능한 디는 여그뿐이여. 것도 모르고 5공 때 멀쩡한 나무 베내고 사방디다 초지 만들었다가 낭패만 안 봤능가. 여그는 한여름에도 기온이 낮아서 풀들이 웃자라들 않는다등만.”

자는 줄 알았던 아버지가 잠기라고는 조금도 묻어 있지

저자의 다른 글 더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