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형상과 그 너머

시적 사유와 형상의 관계에 대하여

 

 

정남영 鄭男泳

문학평론가, 경원대 영문학과 교수. 평론으로 「살아있는 언어, 살아있는 삶」 「시와 언어, 그리고 리얼리즘」 등이 있음. nychung58@hotmail.com

 

 

1

 

예술작품과 형상(이미지)이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다. 예술작품에 구현되는 사유를 ‘형상적 사유’라 부르기도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에 주목한 것이리라. 그런데 ‘형상적 사유’의 핵심이 형상 혹은 이미지의 존재 자체에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만일 그렇다면 그림은 문학보다 우월한 예술이 되어야 하고 사진은 그러한 그림보다 우월한 예술이 되어야 하는데, 예술 부문간에 이런 기준으로 서열을 매기는 것처럼 우스운 일은 없을 것이다.

‘형상적 사유’가 적실한 말이 되려면 ‘형상과 관계가 있다’라는 단순한 진술이 아니라 ‘형상과 특수한 관계를 맺는다’는 더 구체화된 진술이어야 할 것이다. 실상 현실에 대한 모든 앎의 출발점은 이미지가 아닌가. 우리는 이미지의 조각들을 받아들이는 데서 지적(知的) 여정을 시작하지 않는가. 물론 우리는 출발점에서 머물지 않고 그로부터 현실에 대한 적실한 앎을 만들어내는 데로 나아간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적실한 앎을 만드는가? 그 방식은 무한히 다양하다. 이 다양함을 몇개의 유형으로 나눌 때 그중에 예술작품에 공통적이라고 판단되는 것에 대해서 ‘형상적 사유’라는 말을 붙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그리고 시는 이미지의 조각들로 더 큰 형상을 짓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1 분석적 능력이나 추론적 능력보다는 ‘상상력’을 예술적 사유의 바탕으로 보는 견해가 많은데, 영어의 ‘imagination’이나 한자의 ‘想像’이나 공히 상을 짓는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상상력을 다르게 보는 견해도 있다. 예컨대 벤야민은 “실상 상상력은 형상들과는 혹은 형상화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상상력이란 “이미 형상이 지어져 있는 것을 탈형상화(de-formation, Entstaltung)하는 것” “형상을 가지고 용해(溶解)의 놀이를 하는 것”이라고 한다.2 다시 말해서 상상력의 본령은 상의 형성(고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변화하는 이행”(constantly changing transitions)에 있다는 것이다.3

벤야민의 견해는, 그것이 상상력에 관해서 얼마나 만족스런 설명인가와는 별도로, 시에서 형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관하여 생각해보는 데 좋은 참조 혹은 단서가 될 수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이 ‘늘 변화하는 이행’의 구체적 존재를 세 편의 시에서 추적해볼 것이다. 나는 시 전체에 대한 어떤 거대한 이론적 결론을 내리는 데 치중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 세 편을 분석해 이런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다만 중간중간에 혹은 글의 말미에 그렇게 보이는 대목이 존재할 수는 있다. 이것은 결론이라기보다 작업가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2

 

가로수들이 촉촉이 비에 젖는다

지우산을 쓰고 옛날처럼 길을 건너는 한 노인이 있었다

적막하다

–「사이」 전문

 

처음 이시영의 이 시를 읽으면 이미지의 간결한 포착에 그 묘미가 있는 시인 듯하다. 그런데 이 시를 두번, 세번 읽으면 2행의 “옛날처럼”과 3행 “적막하다”가 처음과는 다르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두 구절로 인해서 이 시가 ‘비에 젖은 가로수길을 한 노인이 건너는 풍경의 간결한 묘사’라고 말하기 어려움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이러한 묘사가 아니고 무엇일까? 이 두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자.

“옛날처럼”이라는 구절은 결코 단순한 비유로 다가오지 않는다. “옛날처럼”이 놓여 있는 묘한 위치도 이것을 뒷받침해준다. (아마 사실의 차원에서 말하자면, 지우산은 옛날에 많이 쓰던, 당시로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 우산이라는 말이리라. 그러나 시 구절은 ‘옛날에 쓰던 지우산을 쓰고’가 아니다.) “옛날처럼”은 문법의 차원에서 보자면 “건너는”을 수식하는 부사구이다. 옛날처럼 건너는 방식이 있고 요즘처럼 건너는 방식이 있던가? 그게 아니다. 그런 수식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가만히 시를 다시 읽어보자. 그렇다. “옛날처럼”은 ‘옛날’을 시로 불러온다. 물론 어떤 형상을 가졌는지 알 수 없는 그러한 ‘옛날’이다. 형체없는 그림자처럼 다가오는 그러한 ‘옛날’이다. 불려와진 ‘옛날’은, 마치 비가 거리 전체를 적시듯이, 시 전체로 번지기 시작한다. 요컨대 “옛날처럼”이라는 구절은 “건너는”을 꾸미는 문법적인 기능을 뛰어넘어서 시의 현재 속에 과거라는 무형의 시간성을 끌어들이는 일을 하는 것이다. 2행의 동사 “있었다”가 과거시제로 되어 있는 것도 이러한 효과를 묘하게 돕는다.

이것을 일단 ‘현재라는 시간에 과거라는 시간을 중첩시킨다’라고 말하기로 하자. 그런데 우리에게 아주 낯익은 시간개념에서는 이렇게 두 시간의 중첩은 회상의 형태로 말고는 불가능하다. 나중에 오는 ‘현재들’이 선행하는 ‘현재들’을 끊임없이 과거로 밀어내어 사라지게 하는 일련의 과정–시간의 점들의 사라짐이 무한히 지속되는 과정–이 바로 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의 어디에나 존재하는 시계가 가리키는 바의 시간이 바로 이러하다.[4. 이것을 벤야민은 “동질적인, 빈 시간”이라고 부른 바 있다. 벤야민의 이것에 ‘지금 시간’(the now-time, Jetztzeit)을 대립시킨다. ‘지금 시간’이란 “동

  1. 이미지와 형상을 개념상으로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다. 다만 편의상 이 글에서 나는 시의 요소들로 작용하는 작은 규모의 감각적 상들을 이미지로 부르고, 형상이라는 말은 이미지와 동의어로 사용하거나 아니면 이미지들로 이루어지는 전체 상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기로 한다.
  2. 이상 Walter Benjamin, “Imagination” in Selected Writings vol. 1: 1913~1926, ed. Marcus Bullock and Michael W. Jennings(Cambridge: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P 1996), 280면. 여기서 용해(dissolution)가 파괴는 아니다. 상상력의 “최고의 법칙은 탈형상화하면서도 결코 파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같은 곳) 벤야민이 인용되는 경우 번역은 모두 필자가 한 것이다.
  3. 같은 책 28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