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혜강 최한기의 시간관과 일통사상

 

 

임형택 林熒澤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 저서로 『한국문학사의 시각』 『실사구시의 한국학』 등이 있음.

✽ 일전에 「개항기 유교 지식인의 ‘근대’ 대응논리: 惠岡 崔漢綺의 氣學을 중심으로」(『大東文化硏究』 제38집, 2001)라는 논문을 작성하고 끝은 “기학적 논리는 인간과 우주와 자연,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일통사상에 도달하고 있는 점이 주목되는바, 이에 관해서는 후일의 과제로 남겨둔다”고 맺었다. 이 과제의 해결로서 지금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본고는 이론이나 개념을 위 논문과의 중복을 피하느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넘어간 곳이 더러 있다. 관심을 가진 독자들은 위 논문을 참고하시기 바란다.─필자

 

 

1. 머리말

 

나의 개인적인 소견으로 21세기의 인류적 과제는 일통(一統), 즉 하나로 화합하는 일이다. 남북통일이 지난 세기의 미해결 과제로 이월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세계화’가 피하기 어려운 대세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둘러볼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일통’을 성취하는 대업이 전지구적 과제로 제기된 것이다. 그리고 생태환경의 오염·파손이 벌써 위험수위를 넘어선 상황을 둘러볼 때 인간과 대자연의 일통이 실로 요망되고 있지 않은가. 남북통일이란 민족문제 또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식으로 당위성을 부르짖는다 해서 해결될 사안이 아니요, 신세기가 요구하는 새로운 사고의 패러다임으로 접근, 실천해야 할 단계에 당도한 것이다.

한국의 역사에서 일통사상의 정신전통은 없었을까? 분열과 통일의 역사가 있으니 사회적 통합을 위한 사상이 어떤 형태로든 없지 않았을 듯싶다. 신라의 통일과정에서는 불교가 그 기능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경주 황룡사의 9층탑은 ‘삼한일통’의 표상이었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황룡사 9층탑을 세운 이후 태평성대가 열리고 삼한이 하나로 되었다고 예찬하는 말을 남기고 있다.1 다시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옛날 신라는 9층탑을 조성하여 마침내 일통의 대업을 이루었다”고 되새기면서 “지금 개경(開京)에는 7층탑을 세우고 서경에는 9층탑을 세워 그 공덕을 빌려 복속하지 않은 무리들을 없애고 삼한을 합해서 하나로 만들겠다”(『高麗史』 「列傳」 崔凝傳)고 다짐했던 것이다.

저 하늘에 우뚝 솟은 9층탑은 과연 기존의 국경 너머까지 공덕의 그늘을 드리웠을까? 지금 나로서 확인할 도리는 없지만, 아마도 망국의 한을 달래주는 효과는 없지 않았을 터요, 항시 고달픈 백성들의 육신에 마음의 위안을 주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현실적 의미가 있었을까? 당초 문제에 대한 합리적 접근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에 비판의 칼날을 세운 것은 유학의 지식인들이다. 『표해록(漂海錄)』으로 알려진 학자 최보(崔溥, 1454〜1504)는 왕건의 이 정치적 태도를 식견이 좁은 것으로 보고, 난세를 바로잡아 대업을 이루는 도리는 어디까지나 응천순인(應天順人, 하늘의 뜻에 호응하고 인심이 돌아오도록 하는 것)에 있음을 역설하였다.2 ‘응천순인’은 합리적으로 진일보한 길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이 역시 따지고 보면 ‘응천’은 중국중심적 세계질서에 순종하는 자세요, ‘순인’ 또한 뜻은 좋으나 실상은 애매하다. 우리의 역사상에 일통의 사상적 진폭은 대단치 못했던 듯하다. 이런 측면에서 최한기(崔漢綺, 1803〜77)라는 인물이 비상하게 떠오른다.

한국의 19세기가 배출한 대학자 혜강(惠岡) 최한기는 일찍이 “중국을 배우는 자 서법(西法)을 배우려 하지 않고 서법을 배우는 자 중국을 배우려 하지 않는데, 이 모두 치우치고 막혀서 두루 통하는 학문을 이룰 수 없다”(『人政』 권12)고 설파하였다. 그는 지구가 하나로 통하는 시대를 전망하면서 동서의 학문적 회통을 제창한 것이다. 나아가 자신이 몸소 그 방향으로 강구하여 거대한 학문체계를 수립한다. 그것을 일컬어 혜강학이라고 부르는바 곧 기학(氣學)이다. 다시 말하면 최한기는 기학으로 동서의 학문적 회통을 이룩한 것이다.

최한기는 학문연구를 통한 저술이 세상에 끼칠 공덕을, 태양이 떠올라 사해를 밝게 비추고 단비가 대지를 골고루 적셔 만물이 소생하는 데 비유하고 있다. 인간 주체를 고도로 각성한 자세로서, 계몽이성의 무한한 자신감이 표명된 듯 보인다. 학문이 기대하는 극대치를 그는 ‘만국일통 우내녕정(宇內寧靖, 온누리의 안녕)’으로 설정한다. 즉, 기학의 목적점을 일통에 둔 것이다. 요컨대 최한기는 동서의 문명적 만남의 시대에서 일통에 착안하였다고 보겠다.

혜강학—기학은 세계사적 시야에서 이루어진 유교 지식인의 근대기획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시간관에서 근대성이 선명하다. 최한기의 일통사상을 주목한 이 글은 먼저 기학적 시간관으로 들어간다.

 

 

2. 기학적 시간관

 

1. 「중국과 서구에서의 시간과 역사」라는 제목으로 우리에게 소개된 조셉 니덤(Joseph Needham)의 글(민두기 편 『중국의 역사인식』 상, 창작과비평사 1985 수록)이 있다. 과학문명이 서구에서 발생하고 동양세계에서는 왜 발생하지 않았는가를 시간관의 시각에서 물은 내용이다. 인간이란 됨됨이 자체가 지상에서 생로병사를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존재이므로, 시간관이 그 삶의 양식에 지대한 관련이 있으리라는 데 얼른 수긍이 가진다. 중국과학사에서 세계 독보로 인정받은 니덤의 발언은 이러하다.

“유대-기독교의 세계에서는 시간이 공간보다 우선한다. 시간의 움직임은 일정한 방향을 가지고 흐르며 의미심장한 것이다. 또 시간이 흐르는 동안 신과 악마 사이의 기나긴 전투가 벌어지고(…)그중에서 선이 악에 대해 승리할 것이기 때문에 현세는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선한 것이 된다.(…)세계는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이며(…)이러한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낙관적인 것이다.”(31면) 반면에 인도-헬레니즘 세계에서는 공간이 시간보다 우선하며 시간은 순환적이고 영원한 것이어서, 현재의 세계는 시간을 초월한 세계보다 덜 현실적이며 궁극적 가치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 윤회의 고리에 얽매인 인간은 오직 초시간적 해탈만을 환상하게 되므로, 그 시간관은 근본적으로 비관적인 것이라고 한다. 서구인의 ‘직선적인 시간관’이 과학문명의 배경을 이룬 것으로 보기에 순환론으로 현실적 삶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관념이 지배하는 그런 사회에서는 과학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논리이다.

그렇다면 돌이킬 수 없는 직선의 서구적 시간관과 ‘영원한 순환의 고리’인 인도적 시간관, 이 양극 사이 어디에 중국인의 시간관은 놓여 있을까? 니덤은 “중국문명에 양자의 요소가 다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임을 전제하고 나서 조심스럽게 “내 생각으로는 직선적인 시간관 쪽이 주류였던 것 같다”(35면)고 자기 견해를 밝혔다. 중국과학사를 풍부한 내용으로 구성한 니덤의 경험론적인 답변이다. 이는 중국에서 근대과학이 발전하지 못한 역사적 사실의 원인을 그들의 시간관에서 찾는 통설에 대한 반론이었다. 니덤의 이 문제제기는 사계의 관심을 끌긴 하였지만 지지를 받지 못한 것 같다. 고(故) 민두기(閔斗基) 교수는 『중국의 역사인식』이란 책을 편집하며 위의 글을 서두에 올리면서도 “중국의 역사의식에 직선적 사고가 분명 있었음을 밝히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이 중국 역사의식의 전체상인가? 직선과 순환의 복합관계라고 볼 수는 없는가?”(상권 11면)라고 다분히 회의적인 단서를 붙였던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역사인식』에 실린 편자 자신의 「중국에서의 역사의식의 전개」라는 논문에서는 “금(今)에서 미래 건설의 활력을 찾는 역사관”(상권 56면)의 결여로 중국인의 역사의식은 고질적인 상고주의(尙古主義)의 늪에서 끝내 헤어나지 못한 것으로 결론을 짓고 있다.

방금 거론한 두 논조를 통해서도 대략 짐작이 가듯, 중국인의 시간관은 착잡(錯雜)하여 하나로 귀결되지 않고 있었다. 종교가 귀일(歸一)하지 않았던 것과 유사한 현상이라고 할까. 노장(老莊)사상의 원시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회귀적 관념이 뿌리깊게 작용했는가 하면 인도에서 유입된 윤회사상이 또 만만찮은 영향을 끼쳤다. 그런 가운데서 유교적 시간관은 대체로 사고의 중심에서 멀리 떠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모두 우리 한국인들도 역사적으로 공유한 부분이다.

시간은 눈에 보이진 않으나 인간과 함께 현재하고 있다. 인간은 ‘금(今)’에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바라보지 않는가. 한비자(韓非子)는 당대를 ‘근세’로 설정한 다음, 과거를 ‘상고(上古)’와 ‘중세’로 구분하였다. 이 시대구분법은 고정적이 아니어서 ‘상고’ ‘중고(中古)’ ‘근고(近古)’ ‘당금(當今)’으로 나누어 인류사를 논하기도 한다. 한비자에 있어 ‘중세’와 ‘중고’는 같은 개념이니 시간관으로 보면 4분법의 시대구분을 한 셈이다.3 한비자는 중국사상사의 좌표에서 맨 왼쪽에 속한다. 그런만큼 그의 시간관은 직선적이어서 진보적 성격이 선명하다. 따라서 유교가 정통으로 자리잡자 그의 사상은 반역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한비자는 성인에게 모반을 감행한 것이다. 옛날의 정치를 지금에 부활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한비자는 단호해서 요·순(堯舜)이건 탕·무(湯武)건 아무리 성인의 거룩한 정치라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거지사일 뿐이다. 그는 이 주장을 세우기 위해 수주대토(守株待兎)라는 우리들 귀에도 익숙한 고사를 쓰고 있다. “지금 선왕(先王)의 정치로 당대의 인민을 다스리려 드는 자들은 하나같이 토끼가 다시 걸리지 않을까 기다리고 있는 부류이다.”(『韓非子』 五蠹) 유교의 관점은 이와 다름이 있다. 선왕=성인은 인류에게 문명을 가져다주고 도덕적 삶을 열어준 존재라고 보는 점에 있어서는 유교나 한비자나 다 같이 생각한다. 다만 유교는 성인의 현재적 부활을 항시 희구하며, 그들의 고뇌는 궁극적으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세계사의 전개과정은 단 하나의 무대 위에서 재상연됨이 없이 한번만 공연되는 신의 연극이었다.”(니덤, 앞의 글 27면) 서구인의 역사관에 대한 니덤의 수사적 표현이다. ‘연극의 총감독’, 즉 세계사의 주재자인 ‘신’에 괄호를 치면 이 말은 유교적 관념에도 적용될 듯싶다. 신에 상응하는 존재를 유교에서 들어보라면 성인이다.

원시의 인류에게 농사짓기를 가르쳤다는 신농씨(神農氏), 불의 사용을 가르쳤다는 수인씨(燧人氏), 문자를 창조했다는 복희씨(伏羲氏) 등이 상고시대의 성인 아닌가. 인류에게 불을 훔쳐다 주었다는 프로메테우스의 역할을 수인씨가 맡은 셈이다. 만약 불의 의미를 문명의 시원으로 해석한다면 수인씨가 크게 부각되었겠으나 문자에 기반한 동양적 문명 개념에서 그 개창자로는 복희씨가 부상할밖에 없다. 그렇기에, 다음 단계에서 인류를 정치와 도덕으로 지도한 요·순으로부터 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을 거쳐 공자(孔子)에서 종합되는 위대한 성인의 계보가 성립한 것이다. ‘신화의 역사화’를 중국적 현상으로 지적하는 것은 일리가 없지 않다.

다시 말하거니와 성인들 자체의 역사적 공헌을 평가하는 점에서는 한비자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금’이다. 한비자는 현체제를 옹호하고 발전시키려는 입장이다. 법치(法治)를 주장하는 그에게 덕치(德治)는 그야말로 흘러간 물이었다. 성인이 부활하여 덕치를 펴기를 지금 기대하는 것은 ‘토끼가 다시 와서 부딪혀 죽기’를 바라는 만큼이나 부질없는 짓이라고 한비자는 비웃었다.

반면, 유교적 관점에서 ‘금’은 잘못된 상태이다. 그 오도되고 타락한 현실은 바로잡아야 옳다. 그런데 지향하는 경지는 언제고 성인이 기획했던 그곳이었다. 태도가 분명히 과거 회귀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단정하고 말 것인가? 조선왕조 연산군 때의 어무적(魚無迹)이란 시인은 책력을 바라보며 자연의 3만 6천 날이 인간에서 24시간으로 단축되기를 기원한다. 시간의 진행이 한없이 정체하여 100년의 세월이 1일로 되었으면 하는 공상이다. 그렇게 되면 “요·순은 지금도 얼굴이 젊으시고 주공은 아직 머리가 검으시리”(「新曆歎」)라고 하여, 성인의 태평성대를 우리들 앞에 펼쳐놓고 있다. 타임머신을 이용한 시간여행을 꾸며내지 못한 대신 가상적 시간변조를 통해 유토피아를 현재화한 형태이다. 어무적은 천인의 신분을 타고 나서 시인이 된 인물이다. 자신과 백성들이 함께 겪는 고통과 질곡에서 벗어날 길을 찾지 못한 나머지 그는 복고적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옛날로 돌아가자’는 르네쌍스가 문자 그대로 과거 회귀가 아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고문(古文)운동을 선도한 한유(韓愈)의 경우에도 ‘복고’의 구호는 “8대에 걸쳐서 쇠퇴한 문을 다시 일으킨다〔文起八代之衰〕”는 혁신을 의미하지 않았던가. 정약용(丁若鏞)이 필생의 사업으로 경학(經學)에 심혈을 기울인 것은 오직 성인의 정치를 ‘오늘’ ‘이땅’에 부활시키고자 하는 뜻이었다. 정치·사회 및 문화의 개조를 위한 이론적 토대를 경학으로 마련한

  1. 『三國遺事』 卷3 「興法」 黃龍寺九層塔.
  2. 『錦南集』 卷1 「東國通鑑論」 麗王嘗謂崔凝條.
  3. 『韓非子』 五蠹(『韓非子翼毳』 第19, 漢文大系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