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홍콩시위를 보고 다시 읽은 ‘대화’

▶ 가을호에서 허 자오톈과 이남주 교수의 대화를 흥미롭게 읽었다. 최근 국내에서도 대학생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홍콩 프리’ 지지를 선언하는 일로 중국인 체류자들과 충돌하고 있어 이번 대담에 더 눈길이 갔다. 물론 중심 화제는 ‘근대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였고, 자본주의세계체제 안에서 적응과 극복을 동시에 진행하는 일은 우리나라가 더 시급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문화대혁명과 관련한 설명을 읽으며 내가 잘 모르던 중국의 일면을 본 것 같았다. 문혁은 단순히 ‘잘못된 과거’가 아니라 많은 이해관계와 배경이 얽힌 일이고, 깊은 곳에서 현재 중국의 한 부분을 이루는 사건이었다.

몇년 전 창비에서 출간한 『중국의 체온』(쑨 거, 2016)도 감명 깊게 읽었는데, 그 책이 중국의 문화 일반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면 이번 대담은 더 깊이 들어가 현재 중국의 심층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하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자본주의체제의 적응과 극복이라는 이중과제는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고민해야 하는 일이다. 허 자오톈의 말대로 ‘서구의 현대는 완전무결한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번 대화를 읽으며 서구 추구적인 태도가 비단 중국의 얘기가 아닐뿐더러 작금의 한국에도 시급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 말고 다른 해외의 지식인과 대담하는 자리가 더 많이 마련되면 좋겠다. 그러면 각국 국민들 간의 날선 대립이 이해와 화해 그리고 평화로 조금이나마 이어지지 않을까.

신동휘 henrimichaux0323@gmail.com

 

여자아이는 자라서, 어린 딸들은 자라서

▶ 전기화의 평론 「부풀어 오르는 모녀서사」는 다 읽고 나면 제목의 의미가 바짝 다가온다. 부풀어 오르는 것에는 풍선도 있고 기대하는 마음도 있겠지만, 이 글과 가장 맞닿은 것은 페이스트리 빵이라고 생각했다. 여러겹의 반죽이 부풀어 오르듯이, 모녀서사는 그렇게 부피를 키운다. 겹겹이 쌓여 바사삭 부서지는 틈새로 겪어본 적 없던 이야기들이 빼곡히 들어차며.

존재와 함께 필연적으로 시작되는 모녀서사는, 여태껏 평면적이고 상투적으로 다뤄져왔다. 지금은 어떨까? 요즘 한국 엄마의 대표격은 ‘김지영’(조남주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2016)일 것이다. 희생적인 어머니상을 재현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창비 2008)에 이어 8년 만에 다시 엄마 이야기가 파동의 중심에 서 있다. 김지영은 자신의 남편에게, 사실은 나라에,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165면) ‘맘충’이라는 꼬리표를 단 신세대 엄마들은 여러 가치가 번잡하게 교차하는 한국사회 속에서 쉽게 길을 잃는다. 전기화의 평론은 새로운 지평을 예견한다. 변화의 씨앗은 다름 아닌, 딸의 손이다. 조남주의 단편 「여자아이는 자라서」(『릿터』 2018년 8·9월호) 속 딸 주하는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남학생들의 성추행을 ‘그냥 장난’으로 넘기지 않고 다른 여학생과 연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딸은 엄마를 반복하지 않는다. 자신이 느꼈던 공포나 수치심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부정하면서 괜찮다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다.”(「부풀어 오르는 모녀서사」 326면)

여성서사는 이 시간에도, 예열된 오븐에서 부풀고 있다. 이야기의 틈 사이로 수십 수백의 감정들이 넘실댄다. 우리는 이제 충분히 멀어질 수도, 미워할 수도, 참지 않을 수도 있다. ‘선을 지키며’ 각자의 인생을 지켜낼 수 있다. 서로를 견뎌내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의 인생을 다시 산다는 부채감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사랑하는 그 모든 시간이 서로를 좀먹게 했을 수도 있으니까.

이세현 kindaw@naver.com

 

허파에 가을바람 들어오기 전에

▶ 가을호에서 시란을 가장 즐겁게 읽었다. 열두명의 시인이 보여주는 제각기 다른 이야기들은 퍼즐처럼 마음의 조각 하나하나를 담당하며 내 마음을 완성해줬다. 본래부터 마냥 사랑스럽거나 행복한 시를 좋아하진 않는다. 그리고 그런 시들은 어째 가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가을바람이 허파에 들어올 때, 우리는 이유 모를 외로움이나 슬픔, 쓸쓸함과 싸워야 한다. 그래서 알 수 없는 우울에 빠진 지인에게 ‘허파에 가을바람 들어오지 않게 마음 단속 잘해라’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마음을 단속하는 방법 중 하나는 이렇게 문장을 찾는 것이다. 시의 한 문장은 간단해 보이면서도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렇게나 멀구나 우리는 멀리서 무사하구나”(박소란 「낙석 주의」)는 언젠가 안부를 묻고 싶은 사람을 향하는 말 같았다. 대답이 들려오리라 기대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당신이 무사하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은 문장. 그 뒤를 이은 「간장」은 이미 허파에 들어와버린 가을바람에 대한 감상 같기도 했다. 간장처럼 짜고 컴컴한 불행의 맛. 가을이 왔다는 것은 한해도 다 저물어간다는 뜻인데, 그래서인지 송승언의 「재의 연대기」 또한 와닿는다. 올 한해도 잘 보냈나, 하는 의심이 들고 그 질문에 당당히 대답할 자신이 없을 때 슬쩍 도피하기 좋은 시다. “우리가 하려던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라는 구절을 읽으면, 아무것도 아닌 걸 굳이 왜 하려 했을까 하는 마음과 동시에 그 아무것 아닌 것조차도 해내지 못한 자괴감이 동시에 든다. 자괴감에 이어 외로운 마음이 될 때면 강지이의 「망원경과 없는 사람」도 좋다. “잠시 왔다 갈 수 있는 마음은 저런 빛이구나”라고 말하는 화자는, 꼭 내게 왔다 떠나간 사람 혹은 떠나갈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이야기하는 것 같다. 혼자서 견뎌야 하는 밤이 추워졌음을 느낄 때 괜히 기대어 응석 부리기 좋은 시다.

시집 한권을 사면 그 시인 한명만을 보지만, 계간지에서는 여러 시인들의 다양한 시들을 접할 수 있어 좋았다. 그건 곧 그만큼의 세계와 마음을 빌려올 수 있음을 뜻하니까.

김성원 realfantazia@naver.com

 

평범함의 백스토리를 밝히는 소설가

▶ 윤성희는 내가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갈증을 해소해준 작가이다. 지난호 작가조명을 읽고 내가 윤성희를 좋아하게 된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이 겁쟁이이기 때문이었다. 대개 겁쟁이의 삶은 아주 비범하지도, 대놓고 절망적이지도 않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속할 텐데, 이런 겁쟁이들이 겪는 삶의 순간들을 특별하게 다뤄주는 훌륭한 이야기꾼이 윤성희다.

“평범한 사람의 백스토리엔 아름다움이 존재한다”(369면)고 한 작가의 믿음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말을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람에게 다가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 이의 마음은 얼마나 고마운가. 세상이 괴짜 영웅이나 난폭한 문제아에게 관심이 쏠려 있을 때, 윤성희는 그 언저리에 서성이는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를 쓴다. 이를테면 상냥한 사람들 말이다. 문제없어 보이는 그들의 상냥함이 작가에게 포착되면 숨죽여 있던 서러운 내면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러면 이제 무언가 바뀔 수 있는 희망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윤성희식 희망이 빛을 발한다. 그 희망은 인간의 생존을 감히 앞서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을 받아들이고 난 후에 ‘가능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변해야지,가 먼저면 안 돼. (…) 사는 것이 먼저고 나중에 변해야지. 변해서 살아야지,는 아니야.”(374면) 이것이 그가 말하는 희망의 분수(分數)이다. 변화와 성장이라는 숙제에 인물을 묶어두지 않는다.

내년에는 부지런히 단편을 쓸 것이라는 다짐을 읽으니 그가 선보일 작품들이 벌써 기대된다. 또 어떤 평범함의 뒷이야기가 특별함으로 밝혀질까. 평범해서 지루하게까지 보였던 인물들이 누군가의 따스한 시선 속에 재조명되는 순간은 위대하다. 마침 누구나 빛날 거라 했던 청춘이 지루해지고 있었다. 윤성희의 시선을 빌리면 다시 특별해질 수 있지 않을까.

박한비 phb9651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