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화해의 장벽

2008 동아시아의 비판적 잡지 회의 후기

 

천 꽝싱 陳光興

대만 자오퉁(交通)대 사회문화연구소 교수, 『인터아시아 문화연구』(Inter-Asia Cultural Studies: Movement ) 주간. 우리말로 번역된 책으로『제국의 눈』이 있다.

* 이 글의 원제는「和解的路障: 二OO八東亞批判刊物會議後記」이며, 본지와 함께『대만사회연구』에도 게재될 예정이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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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2008년 5월 26일) 한 무더기로 대만대학 맞은편 베트남식당에서 오찬을 마친 후, 나는 직접 차를 몰아 손님들(『창작과비평』 주간 백영서, 『케시까지け-し風』 주간 토리야마 아쯔시, 『겐다이시소오現代思想』 주간 이께가미 요시히꼬)을 타오위안(桃圓) 공항까지 배웅했다.

그날 줄곧 그칠 듯 말 듯 비가 내려 사람들은 어디서 우산을 구해야 할지 몰랐다. 차에서 내린 오랜 벗 이께가미 요시히꼬(池上善彦)가 내게 말했다. 이 우산 두고 갈 테니 자네가 쓰게. 나는 웃으며 고맙게 받았다. 그는 대만이 세번째다. 이번에 사흘을 묵었는데 차에 탈 때 보니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뜻밖에도 그는 짐이 없다며 웃는 것이었다. 내가 옷은 어떻게 갈아입냐고 묻자, 그는 자신의 몸을 가리키며 입고 있는 게 다라고 말했다. 일본 좌파낭인의 전통인가. 발길 닿는 대로 살아가는. 그는 인간관계가 넓다. 엄숙한 학자에서 공원의 노숙자에 이르기까지, 토오꾜오에 가면 어느 업계의 사람을 찾든 이 친구만 통하면 문제없다. 그를 알게 된 것은 아마 1996년일 것이다. 그후 내가 토오꾜오에 갈 때마다 그는 자기 패거리들을 불러냈다.‘타께우찌 요시미를 읽는 모임’(竹內好を讀む會) 친구들을 불러내어 신주꾸역 근처 스시집에 모여 청주에 거나하게 취하면 떼지어 카부끼쪼오(歌舞伎町)를 돌아다녔다. 그는 17년 전부터 『겐다이시소오』 주간을 맡고 있다. 일년에 열두호를 내고 그밖에도 대여섯차례 특집호를 낸다. 일본의 소규모 회사들이 그렇듯 좀처럼 쉬는 날이 없다. 그런 그를 볼 때마다 안된 마음이 들던 차다. 타이뻬이로 불러낸 것도 이참에 그를 좀 쉬게 하려는 심사였던 것이다! 자신의 동아시아화를 한층 진일보시키기 위해 몇년 전 그는 한국어와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이번에 그는 특유의 액센트를 띤 푸퉁화(普通話)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늙었네. 우리 모두 늙었어!

이번에 타이뻬이에 온 오끼나와의 이웃 토리야마 아쯔시(鳥山淳)는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발언할 때도 적극적이어서 군소지역에서 온 사람의 주눅 든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원래는 『케시까지』의 또다른 주간 오까모또 유끼꼬(岡本有紀子)를 부를 계획이었지만, 임시로 그가 대신 왔다. 이전에 그의 아주 세련된 글을 읽은 적이 있어(영문으로 번역되었다) 그의 사유에 대해서는 익숙한 터였다. 개인적으로 나는 오끼나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두번 가봤을 뿐이다. 그러나 오끼나와에 나는 특별한 느낌을 갖고 있다. 그곳의 풍토와 인심은 일본과 다르다. 사람들은 모두 아시아 대도시에 사는 사람보다 자유롭고 진솔하며 그곳은 고향 같은 느낌을 주는, 경제가 발전하기 이전의 마카오 같은 데다. 야심을 품은 사람들은 홍콩, 대만으로 떠나갔고 남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상냥하고 친근한 이들이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온갖 방식(달걀 혹은 고기와 볶거나 얼린 뒤 썰어 쌜러드로 만듦)으로 요리한 오끼나와의 명물 고오야(苦瓜), 그리고 특이한 맛의 독주였다. 토오꾜오, 타이뻬이 등에서도 나는 적지 않은 오끼나와 친구들을 만났다. 『엣지』(EDGE)의 주간 나까자또 이사오(仲里効)는 그 지역에서 존경받는 사상가이자 작가이며 또한 사진가였다. 신조오 이꾸오(新城郁夫)는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인물로, 타이뻬이에도 온 적이 있었다. 전에 아베 코스즈(阿部小凉)를 불러 함께 샹하이에서 열리는 『인터아시아 문화연구』 회의에 참가한 적이 있다. 막 토오꾜오의 국제기독교대학으로 간 타나까 야스히로(田仲康博) 역시 문화연구 관련 회의에서 종종 만나는 친구다. 토리야마와는 처음 만난 터라 다소 서먹했다. 떠나는 날 아침식사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푸화원자오(福華文敎)회관 식당에서 몇마디 나눌 수 있었다. 일본,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언어소통 면에서 자신의 뜻을 완전하게 전달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의 소통은 늘 정신과 느낌 그리고 열정의 상호감염을 통해 진행되는 법, 마침내 서로가 생각이 통하는 친구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며칠간 같이 점심을 먹은 터라, 떠나기 전 그에게 대만 음식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오츠(好吃).” 듣자 하니 이께가미에게서 배운 말투다.

백영서(白永瑞)와는 2001년 전후로 알게 되었다. 당시 대만중앙연구원(臺灣中央硏究院) 방문학자로 대만에 반년간 와 있던 그를 내가 주관하는 아시아연대 심포지엄에서 만나 우연히 알게 되었고, 금세 친해졌다. 이번에 그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지난주 화요일(5월 22일) 백낙청(白樂晴) 선생과 함께 와서 인터뷰, 강연, 토론을 했다. 이께가미나 토리야마와 달리, 백영서는 대만의 오랜 손님이다. 6월초부터는 다시 한학쎈터(漢學中心)에 석달간의 일정으로 체류중이다. 그는 진정한‘동아시아인’이다.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에 능통할 뿐 아니라 늘상 동아시아 각지를 누비고 다닌다. 일본과 중국대륙 각지에서 비교적 오랜 기간 체류한 경험도 있다. 그의 폭넓은 인간관계의 도움을 받고자, 『대만사회연구(臺灣社會硏究季刊)』는 2004년부터 그를 정식 편집위원으로 영입했다. 서울에서도 그는 여러 곳에 몸담고 있다. 연세대 사학과 교수 외에도, 2006년부터 『창작과비평』 주간을 맡아 잡지 및 단행본 편집일을 하고 있으며, 연세대 국학연구원 원장이기도 하다. 글은 글대로 회의는 회의대로 감당하면서도 좀처럼 피곤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다. 일반적인 한국 남자들과 달리 격의 없고 자유로워 나의 학생들과도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노래 부르고 춤도 춘다. 요 몇년 그는 국제주의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인터아시아 문화연구』 격년간 회의는 늘 경비가 부족한 편인데, 그때마다 그가 나타나 힘이 됐다. 지난번 샹하이회의 때도 그가 동분서주하여 힘을 쓴 결과 비로소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서아시아의 친구들을 불러올 수 있었다. 대만에도 종종 오기 때문에 여기저기 맛있는 곳을 잘 안다. 그는 잘 먹고 술도 잘 마신다. 회의 첫날 밤 와인 세 종류를 섞어 마셔 다음날 두통으로 쩔쩔매던 나에 비해, 맥주로 시작하여 와인 그리고 얼꿔터우(二鍋頭)로 마무리한 그는 다음날 멀쩡하게 일어났다!

한참 이야기하고 나니 다 술 이야기다. 동아시아 남자들의 문화 같지만 사실 꼭 그렇진 않다. 나의 대만, 대륙, 한국, 일본 등의 페미니스트 여성친구들은 모두 남자들보다 술을 잘 마신다(욕먹을지 모르니 거명은 않겠다). 다만 말하고 싶은 것은, 술을 매개로 하는 교제의 역사는 종종 가려져 토론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식, 감정, 믿음, 서로에 대한 이해와 애정은 사실 어느 곳에서든 음주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성격의 회의가 조직될 수 있는 기초는 회의 내용이나 구조 자체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평소 바쁜 일상에 얽매여 이삼일의 시간을 내는 것조차 매우 힘든 이 편집자들에게 음주 역사의 정서적 연대가 없었다면 이번 회의의 동력은 찾지 못했을 터다. 회의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회의 주제와 관계를 맺게 되는 데는 서로 다른 역사가 있으며, 거기에는 불균형적이고 비균질적인 정서적 요소가 개입한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맞게 될 결과를 영원히 예측할 수 없다. 경험으로 보아, 분명한 목적을 가지려 하면 할수록, 전체 구조를 장악하려 하면 할수록 결과는 더 비관적이다. 틀은 갖되 느슨하게 유지하고 열어두면, 회의는 오히려 기대 이상의 효과를 얻게 된다. 이번 회의 역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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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웅을 마치고 신주(新竹)로 돌아오는 길에 한바탕 장대비를 만났다. 한주간의 피로가 말끔히 씻겨내려간 듯했다. 이번 학기의 가장 중요한 일을 마치고 나니 긴장이 풀어졌는지 머릿속이 뱅글뱅글 돌았다. 오후 내내 정신과 육체가 따로 노는 듯, 온몸이 나른했다. 그러나 대뇌의 휴식을 방해하기라도 하는 듯, 뇌리 한켠에서는 회의의 한막 한막이 마치 영화 장면처럼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두번째로 조직하고 세번째로 참가한 아시아간행물회의다.[1. 이밖에도 2005년 8월의 ICAS제4차 회의가 샹하이에서 열렸고, 싱가포르국립대학 아시아연구소의 미까 토요따(Mika Toyota)가 아시아간행물 원탁회의를 조직하여, The International Journal of Asia Studies(浜下武治), Asian Jou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