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 제25회 창비신인평론상 당선작
황정은 다시
전기화 田己和
1990년 서울 출생. 서울대 국문과 박사과정 재학 중. 비평동인 점점 활동. octobervoice@naver.com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 대해 의례를 행함으로써 서로를 사람으로 임명한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87면
1. 얼굴과 절벽
올해 정식 개봉한 영화 「공동정범」(김일란·이혁상 연출, 2016)에는 2009년 1월 용산의 불타는 망루에서 살아 내려온 다섯 사람의 인터뷰가 교차 반복된다. 영화는 경찰과 검찰, 이명박정권은 희미한 배경으로 세워둔 채, 사건 이후 구겨진 사람들 사이의 균열을 끈질기게 들여다본다. 이들의 갈등은, 용산 4구역 철거민 대책위원장 이충연과 참사 당일 용산으로 연대투쟁을 온 다른 지역의 철거민들이 검찰에 의해 모두 ‘공동정범’으로 기소되어 동일하게 처벌받은 데에서 비롯되었다. 참사 이후 처음으로 모두가 한자리에 모인 좌담회(2015년 10월)에서, 연대 철거민들과 이충연 사이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한다. 연대 철거민들에게 원망은 본인이 알아서 해소하라고 쏘아붙이던 이충연은 망루 위 철거민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추궁당하자 거세게 반발하지만, 좌담회가 파탄에 이른 후 카메라를 앞에 두고 진행되는 인터뷰에서는 자신의 책임을 인정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경찰들 때문에 죽었고 그렇게 세상을 만든 위정자들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렇게 생각해야 저에게 더 편하니까.”
그것이 옳고, 또 사실이 그러하기 때문에가 아니라 더 편해서. 이 아연한 말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충연에게 동료들의 얼굴을 성의있게 들여다보며 진심을 전하는 일이 경찰 조직과 정부를 비판하는 것보다 더 큰 노력과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죄책감과 피해의식으로 무장된 이충연의 내면에 일정한 변화가 감지되는 순간은 그가 그 말을 마친 뒤 카메라를 앞에 두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보다는 두번째 좌담회(2016년 1월)에서 사람들을 앞에 두고 시선을 떨구는 장면인 것처럼 보인다. 다섯 사람이 다시 모여 기록화면을 돌려보고 서로의 기억을 확인하며 진상규명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자리에서, 이충연은 망루에서 가장 먼저 뛰어내린 사람이 자신이었을 가능성을 마침내 본인의 입으로 시인한다. 이에 연대 철거민 김창수는, 망루 위에 있던 사람들 모두 죽음에 대한 공포를 공유하고 있었으므로 “그걸 가지고 자책을 하거나 미안한 감정을 굳이 가질 필요는 없다”면서 이충연의 수치심을 덮어준다. 고통과 자책 위로 완고한 아집을 겹겹이 두르면서 이충연이 어떻게든 지키고자 했던 그 자신의 얼굴은 김창수에 의해 보존받게 된다.
그리고 2010년 발표된 소설 속에 항아리의 얼굴에 대한 의례를 행한 한 인물이 있다.1 「옹기전」의 화자 ‘나’는 “인적 없이 심란하게 부서진 집들이 즐비한 동네”(84면), 곧 사라져 평평하게 다져질 이웃동네의 어느 집 마당에서 항아리를 꺼내온다. ‘나’가 항아리를 주워 오게 된 것은 어떤 당위나 목적에 따른 행위의 결과가 아니었다. 삽이 꽂혀 있어서 삽질을 하다가 항아리를 발견하게 되었을 뿐. ‘재수없다’ ‘귀신이 붙는다’며 당장 버리라는 부모님 몰래 항아리를 숨긴 뒤로 밤마다 항아리가 말한다. “서쪽에 다섯 개가 있어.”(82면) ‘나’는 점점 항아리에서 사람의 얼굴과 같은 무엇을 발견해가고,2 “치워버리고 싶”어서 옥상에 항아리를 두고 돌아온 뒤에는 “일단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았으므로” 편히 잠든다. 그러나 눈 내리던 날 “독 터지는 소리”(88면)를 듣고 옥상으로 올라간 ‘나’는 결국 항아리의 말을 따라 서쪽으로 가보기로 한다. 나침반으로 방향을 확인하고, 우동을 사 먹고, 항아리를 끼고 이고 가던 중 ‘나’는 항아리들이 묻히는 구덩이를 마주한다. 구덩이에는 어제 버려진 항아리들 위로 오늘의 항아리들이 버려지고, 그 위로 내일의 항아리들이 쌓여갈 테지만, 항아리를 묻는 인부의 말마따나 “세상은 멀쩡하다. 당장 어떻게 되는 일 없다.”(100면)
항아리에 대해 “네 거냐?”(96면)고 묻는 우동가게 노인의 질문에 주운 것이라고 답했던 ‘나’는, 항아리를 대신 묻어줄 테니 “이리 내라”(99면)는 인부의 말에는 어느덧 “내 건데요”라고 응수한다. 마침내 항아리를 쥐고 도망쳐 ‘나’가 당도한 곳은 절벽 끝이다. 항아리의 얼굴을 보았을 뿐이고 항아리의 말을 따라갔을 뿐인데, “더는 갈 곳이 없”는(101면) 곳에 도착해버린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항아리를 곁에 내려두고 “아름답고 차갑고 무관해”(102면) 보이는 불빛이 반짝이는 도시를 향해 앉는다. 그리고 연이어 들려오는 독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삐걱삐걱 주저앉는 도시의 불빛들을 바라본다. 정말 그 순간 온 도시가 주저앉아버린 것일까. 아니, 그것은 오히려 ‘나’의 마음속에 박혀버린 세계의 비밀, 혹은 모두가 안다고 생각해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 진실, 요컨대 항아리가 가라앉은 자리에 또다른 항아리를 묻는 것을 가능케 하는 ‘언제나 가라앉고 있는 세계’에 관해 ‘나’가 가지게 된 심상에 가까울 것이다.
항아리의 목소리를 목소리로, 항아리의 얼굴을 얼굴로 인식한 단 한 사람, 그리하여 세계의 비밀을 간직한 채 절벽 끝에 앉게 된 「옹기전」의 화자 ‘나’는 그후 어떻게 되었나. 망루에서 내려온 다섯 사람이 반목하고 균열하고 다시 연결될 가능성을 힘겹게 모색하는 동안에도 항아리 위로 항아리는 끊임없이 쌓여갔다. 절벽 끝에 앉아 도시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서 서사를 마무리한 「옹기전」의 작가 황정은은 그후 무엇에 대해 어떻게 말해왔는가.
2. 되어버린 삶
슬럼이라는 추상적 명사 속에서 은교와 무재의 목소리를 건져낸 『百의 그림자』로 잘 드러나듯 황정은은 ‘없는’ 존재들이 자신들의 입으로 말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양각하는 소설을 써왔다. 보인 적이 없거나 혹은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으나 그렇다고 없는 것은 아닌, ‘아무도 아닌’ 이들에 관한 서사적 재현은 최근 소설집에서도 이어진다. 그러나 현실세계가 소설세계에 너무 가까이 다가왔다는 작가 자신의 말로 설명되듯이,3 황정은의 소설 속 화자들은 좀더 구체적으로 조건 지어진 채 특정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파씨의 입문』과 『아무도 아닌』에 실린 두 작품을 겹쳐 읽으면서 확인해볼 수 있다. 2011년 발표된 「낙하하다」의 화자는 삼년 전과 같은 속도로 “검은 공간을 하염없이 떨어져내릴 뿐”(61면)이다. 어째서 떨어지는지조차 모른 채, 어딘가에 부딪히거나 닿는 일도 없이 “밑도 끝도 없이”(62면) 떨어지는 중인 ‘나’는 “누가 누가 누가 없어요 나와 나와 나와 충돌해줘”(78면)라는 말을 공중으로 던지지만, 소설의 마지막까지 이
- 이 글은 2010년대에 발표된 황정은의 소설들을 주로 다룬다. 「누가」와 「양의 미래」, 단편 「웃는 남자」를 중심으로 『아무도 아닌』에 나타난 황정은 소설세계의 변화를 읽어내되, 해당 작품집 출간 이후 발표된 글에서 감지되는 황정은 소설의 운동성까지 논의에 포함시킨다. 본문에서 논의되는 작품은 다음과 같다. 『百의 그림자』(민음사 2010), 「낙하하다」 「옹기전」 「디디의 우산」(이상 『파씨의 입문』, 창비 2012), 『야만적인 앨리스씨』(문학동네 2013), 『계속해보겠습니다』(창비 2014), 「누가」 「양의 미래」 단편 「웃는 남자」(이상 『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2016), 중편 「웃는 남자」(『창작과비평』 2016년 겨울호), 「正午에 우리가」(『대산문화』 2017년 여름호),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문학3』 웹진, 2017년 10월~12월). ↩
- 동일한 작품에 관한 분석은 아니나, 권희철은 용산참사에 관한 황정은의 산문 「입을 먹는 입」과 『百의 그림자』에 나타나는 ‘입’에 주목한 바 있다. 권희철은 글의 말미에서 황정은의 소설과 편혜영의 소설에 나타나는 몰락의 추구가 벤야민이 말하는 정치이며, 그 정치가 우리의 신체에 자리 잡는 곳이 얼굴이라면서 아감벤의 논의를 제시하였다(권희철 「당신의 얼굴이 되어라」, 『창작과비평』 2010년 여름호). 이 글은 얼굴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권희철의 논의와 동일선상에 있지만, 얼굴을 얼굴로 인식하는 가능성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
- 황정은·신수정 「완전 소중한 정은씨의 삐걱삐걱 소설쓰기」, 『문학동네』 2017년 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