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박완서 朴婉緖

1931년 경기도 개풍 출생. 1970년 『여성동아』 공모에 장편 『나목』 당선. 소설집 『한 말씀만 하소서』 『너무도 쓸쓸한 당신』, 장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등이 있음.

 

 

 

후남아, 밥먹어라

 

 

공항엔 달랑 조카며느리 혼자 마중나와 있었다. 누구 팔에 먼저 안겨야 좋을지 모를 만큼 많은 일가친척들의 마중을 받은 삼년 전 귀국과는 딴판이었다. 삼년 전 귀국은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온 귀국이었고 앤이 미국으로 시집간 지 30년 만에 처음 한 친정나들이였지만 상중인 집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마중나올 줄은 몰랐다. 가족들말고도 조문객들까지 묻어나온 듯 누가 누군지 하나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앤은 오남매의 가운데여서 위로 언니가 둘 아래로 남동생이 둘이었다. 오남매에서 불어난 사촌간이 열넷이나 되었고 그중 앤이 낳은 삼남매를 빼도 조카뻘 되는 아이들이 열한 명은 될 터였다. 다 앤이 이민간 후 불어난 식구들이라 얼굴은 고사하고 이름도 모를 수 있었다. 그러나 앤은 열한 명 조카들의 신상을 환히 꿰뚫고 있었다. 누가 기혼이고 누가 미혼이며, 다니는 직장이나 학교가 어디라는 것 정도는 기본이고, 좋은 대학에 가 부모의 콧대를 한껏 높인 아이, 머리는 안 좋은데 집념은 강해 삼수까지 한 아이, 심성 좋고 학벌 좋은데 키가 작아 좋은 혼처가 안 들어와서 부모 속을 태우는 아이, 비만 치료중인 아이, 돈을 곧잘 벌다가 성형수술에 이골이 난 후 빈털터리가 된 아이, 준재벌급 집안으로 시집가면서 수준을 맞춘답시고 친정을 거덜낸 아이, 조카들에 대한 이런 시시콜콜한 정보와 그애가 뉘집 자식이고 이름이 뭐고 어떻게 생겼는지를 정확하게 꿰맞출 수 있는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동기간과 조카들의 생일까지 일일이 다 외진 못하지만 만약 그런 것들을 적어놓은 수첩을 어디다 놓고 찾지 못하면 식구들까지 동원해서 찾을 때까지는 그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은 못할 정도로 어쩔 줄 몰라 했다. 피붙이들의 기념될 만한 날엔 비록 작은 거라도 며칠 전부터 요모조모 궁리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고른 선물을 보내는 걸 잊어본 적이 없다. 남편은 자상하지는 않았지만 순한 사람이어서 너무 싼 물건을 부칠 때면 송료도 안되는 선물을 안 반기면 어쩌나 넌지시 귀띔을 한 적도 있다. 그럼 앤은 너무도 당당하게 미젠데 그럴 리가 없다고 남편의 걱정을 일축했다. 앤의 수첩은 고국의 피붙이로부터 잊혀질까봐 시시때때로 더듬고 확인해보고자 하는 집요한 촉수를 간직하고 있는 그녀의 일부였다.

피붙이 중한 걸 시집가기 전엔 몰랐다. 중하기는커녕 이를 갈고 앙심을 먹은 적도 있다. 셋째딸은 선도 안 보고 데려간다지만 앤은 언니들보다 공부도 잘 못하고 영악하지도 못했다. 순해빠져서 샘도 없었다. 언니들은 둘 다 대학에 갔는데 앤만 고졸로 학력을 마감했다. 언니들이 나온 정도의 대학은 그녀도 갈 수 있었건만 무슨 배짱인지 수재만 가는 대학에 응시해 낙방하고 이차는 보지 않았다. 실업학교 기술직 공무원인 아버지의 월급으로 자그마치 오남매가 다 대학에 가겠다는 건 아버지의 목을 조르는 것처럼 잔인하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술만 한잔 들어갔다 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계집애들을 대학에 보내야 하는 자신의 팔자를 저주했다. 전생에 무슨 죄를 많이 졌기에……로 시작하는 우울한 술주정을 듣고 있으면 자신이 아버지의 운명적인 재앙이란 생각이 들었다. 집안형편이 그런 중에 위로 딸 둘이 대학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생활력과 무식의 덕이 컸다. 어머니는 돈 될 만한 일이라면 체면이나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미제물건 장사를 화장품 장사로 전환했는데 다 보따리 장사였다. 한편 계도 여러가지 들기도 하고 스스로 오야노릇도 했다. 오야노릇을 하다가 계가 깨져 도망을 다닌 적도 있다. 아버지가 쪼들리는 살림살이를 타고난 팔자로 돌리고 체념한 것과는 달리 어머니는 원인을 분석하고 같은 실수를 자식에게는 물려주지 말아야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의 분석은 단순하고도 명쾌했다. 못 배운 여자가 최선의 선택으로 기술자하고 결혼할 때에는 이 정도의 고생은 각오했다는 투였다. 아버지가 죽지 못해 사는 사람처럼 남까지 우울하게 한 것과는 달리 어머니는 고생을 고생인 줄 모르는 사람답게 씩씩했다. 앤은 어머니가 사계절 씩씩한 것은 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여겼다. 앤은 언니들이 다니는 대학을 은근히 깔보고 있었다. 앤은 꼭 하고 싶은 공부가 있는 것도 아닌데, 순전히 간판을 따기 위해 그것도 남들이 알아줄 것 같지도 않은 시시한 간판 때문에 부모에게 못할 노릇을 시킬 만큼 모질지도 못했지만 부모 동기간을 위해 내 한몸 희생할 각오를 할 만큼 착하지도 않았다. 부모의 등골이 빠진 등록금으로 다니는 삼류대학은 금의(錦衣)가 아니라 남루였다. 남루는 교복까지 언니 것을 물려입어야 했던 고교시절로 끝내고 싶었다. 그래도 낙방은 낙방이니까 체면상 실의에 빠져 있는 그녀에게 어머니가 넌지시 고맙다, 네가 효녀다라고만 속삭이지 않았으면 머나먼 미국땅으로 시집 같은 거 안 갔을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그녀에게 비굴하고도 은근한 목소리로 고마워했을 때 그녀는 있지도 않은 희생정신을 들킨 것처럼 느꼈고 그 느낌이 여간 고약한 게 아니었다. 누가 누구를 위해 희생한단 말인가. 희생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들한테 속아서 희생당한 것을 빨리 만회하고 싶었다. 꼴도 보기 싫은 식구들한테 뭔가 본때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속에서 지글거릴 때 친척의 소개로 미국서 참한 신부를 물색하러 나온 신랑을 만나 단시일 안에 뜻이 맞아 혼사가 이루어졌다. 서로 맞아떨어진 건 뜻이라기보다는 조급증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어머니가 고맙다고 말하면서 한참이나 쥐고 있던 손의 거칠고 끈적한 습기를 잊지 못했다. 하루속히 떨쳐버리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조실부모한 신랑은 군복무를 마치자마자 미국에서 식당을 하는 누나의 초청으로 이민을 가 이제는 누나의 없어서는 안될 오른팔 노릇을 하고 있었다. 미국생활에 대한 허황한 꿈을 가진 여자만 아니라면 같이 안 벌어도 먹여살릴 자신이 있었다. 남자는 먼저 장모 마음에 들었다. 남자는 미국서 잘사는 것처럼 부풀릴 마음이 조금도 없었고, 장모의 그에 대한 평가는 안식구 밥은 안 굶기게 생겼다는 거였다. 전후 한때 밥이나 안 굶길 남자를 최고의 신랑감으로 친 적이 있었지만 그 정도의 궁상은 벗어난 70년대였다. 그런 촌스러운 소리가 미국물을 십년 가까이 먹고 난 남자에겐 오히려 시대착오적으로 들리지 않고 신선하고도 정답게 와닿았다. 그녀를 미국으로 시집보내기로 마음을 정한 어머니는 대학도 안 나온 딸이 그런 최고 인텔리 신랑을 만날 줄은 몰랐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어머니 눈에도 가식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소박한 청년이 영어도 할 줄 아느냐는 질문에 밥 벌어먹고 살 정도는 한다고 대답한 게 어머니에게 그런 비약적인 사고를 하게 했다. 어머니가 뭘 너무 몰라서라기보다는 시대가 그렇게 어수룩한 시대이기도 했다. 대학 나와 판판이 노는 큰언니하고 재학중인 작은언니까지도 그녀가 재미교포한테 시집가게 된 것을 집안에 신데렐라가 난 것처럼 질시할 정도였으니까. 피붙이들의 착각과 선망 때문에 신랑쪽 하객이 거의 없는 결혼식이 섭섭한 줄도 몰랐다. 헹가래질을 당하는 것만큼의 불안감도 없이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무중력감이 그냥 즐겁기만 했다. 신랑은 매우 미안해하면서 신혼여행은 생략하고 곧장 미국으로 데려가고 싶다고 했다. 친정붙이 중 누구도 그 사실을 섭섭하게 여기지 않았다. 신랑 신부를 비행장에서 전송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정신없이 들떠 있었다. 그건 여태까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신분상승의 황홀경이었다.

만약 누군가 한사람을 신나게 헹가래치던 사람들이 공중에 뜬 사람을 무사히 착지시키기 전에 일제히 그 자리를 떠나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헹가래질당한 사람은 아마 골통이 터지든지 척추가 부러지고 말 것이다. 김포공항을 뜬 지 거의 이십시간 만에 엘에이공항에 내려 시집식구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은 그녀의 기분이 꼭 그러했다. 척추가 부러진 것 같은 충격적인 착지감은 그녀가 두발 딛고 살아야 할 땅에 그녀의 피붙이는 한사람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공항이 떠들썩하게 마중나온 사람들은 다들 신랑과는 사촌 이내의 친척들이었다. 그건 그녀에게도 해당되는 촌수였지만 피붙이는 아니었다. 피붙이끼리의 관계망 속으로 복귀한 신랑은 한국에서 볼 때와는 달리 편안하고도 의젓해 보였다. 그녀는 그런 신랑이 의지가 되기보다는 달랑 외톨이라는 소외감만 더했다. 신랑은 오남매 중 막내였다. 큰누나가 먼저 와서 음식장사로 자리잡은 후 줄줄이 따라온 동기간들이 이제는 나름대로 독립해서 살 만한 듯했다. 독립을 못하고 큰누나 밑에 있는 건 그녀의 신랑밖에 없었다. 욕심이 덜하든지 큰누나의 신임이 특별하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신랑은 결혼식 올리기 전에 신부가 미국 가면 불가불 부대끼게 될 시집식구들에 대해 간략한 사전정보를 준 적이 있는데 표현을 조금씩 다르게 하긴 했어도 억척스럽지만 친절하다는 걸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개인적인 특징은 다 잊었는데 큰누나를 처음 대면하는 순간 퍼뜩 그게 생각났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살자가 생활신조라고 했던가. 여장부형의 당당한 몸집에 짙은 화장을 하고 알이 큰 준보석급의 장신구를 목에, 귀에, 팔목에 줄줄이 늘어뜨린 양이 난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산다, 어쩔래? 이렇게 시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 그녀가 큰누나한테 압도당한 건 그런 거침없는 생활력의 과시 때문만이 아니라 단신으로 미국땅에 건너와서 부모 없는 동생들을 다 끌어들여 거느리고 사는 그 강한 피붙이의 카리스마였다. 그녀를 환영하고 새 식구로 받아들이는 잔칫상이 큰누나 집에 차려져 있었다. 미국 내에서 치르는 또 한번의 결혼식이라고 볼 수 있는 자리니까 그녀는 미리 준비해가지고 간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곱고 얌전하단 칭찬의 소리가 쏟아졌다. 그들은 큰소리로 웃고 떠들고 조그만 의견 차이에도 으르렁거리며 덤벼들기도 잘했다. 점잔을 빼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먹는 건 또 얼마나 잘 먹는지, 푸짐하고 지글거리는 고깃덩어리를 소리내어 씹고 우거지처럼 아낌없이 먹어치우는 그들의 맹렬한 식욕은 맹수들의 향연을 연상시켰다. 새신랑이 그중 비실이로 보였다. 행여 그런 신랑이 색시에게 변변치 못해 보일까봐 걱정이 되는지 큰누나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쟤가 어려서 젖을 실컷 못 얻어먹어 저렇다니까. 워낙 노산인데다 왜놈들이 망해갈 때였으니까 우유는커녕 암죽도 변변히 못 먹였어. 쟤가 젖 달라고 마른 입술을 내휘두를 때 내 속이 다 바작바작 타들어가는 것 같았으니 우리 엄마 마음은 오죽했겠어. 또 그 소리, 신랑이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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