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 제28회 창비신인평론상 수상작

 

 

휴머니즘의 외부와 열림의 존재론

신해욱의 시에 대하여

 

 

김주원 金周源

1981년 충북 충주 출생.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졸업.

 

 

그러나 언제, 이 모든 삶들 중 그 어느 삶 속에서

우리는 마침내 기꺼이 받아들이기 위하여 열리는 존재들이 될 것인가?

—릴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중에서

 

 

1. 다른 삶과 시

 

문학은 우리에게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흔히 시를 가리켜 언어의 예술이라고 하지만 이 말은 시가 언어를 특별한 용법으로 사용한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시는 경험세계 너머를 향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삶을 산다. 삶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삶을 사는 것, 자동화된 우리의 감각을 다른 방식으로 열리게 하는 것. 그리하여 시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변용시킨다. 문학을 창조하는 것은 다른 삶을 창조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신해욱의 시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넘어 어떻게 다른 삶이 가능한지를 묻는 질문의 형식이자 탐색이다.1 물론 이것은 신해욱 시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2000년대 이후 시 비평의 주요한 주제 중 하나는 자아의 동일성을 의심하는 시적 화자에 관한 것이었다. ‘나’에게서 다양한 타자를 쏟아내게 하고, 감각적인 사건들을 포착해 우연적인 ‘나’를 발명하는 방법들은 2000년대 이후 시를 접한 독자들에게 아주 낯선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2 황병승을 비롯하여 김행숙, 진은영 등 이 주제와 관련된 신해욱 시의 동료들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배경으로 한국사회의 마이너리티 문화나 국가·민족·가족적 정체성의 약화를 언급하거나3 나아가 ‘나’라는 복수적 자아의 출현을 두고 자신의 정체성에 답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과 결부 짓는 것은 시에 관한 사회학적 분석은 될 수 있지만 신해욱의 시가 보여주는 존재론에 비하면 지나치게 협소한 논의이다.4 그렇다고 해서 신해욱 시의 화자가 사소한 금기에 강박적으로 구속되어 있다고 보거나5 ‘나’라는 화자로부터 속수무책인 마음과 진정한 ‘나’에 대한 고민을 읽어내려 하는 것6은 신해욱 시가 해체하려는 ‘자아’를 오히려 완고하게 되돌려놓는 관점일 수 있다.

신해욱의 시를 일컬어 ‘나’ 또는 자아의 동일성을 해체하는 시라고 설명하는 것은 쉽지만 그것의 의미, 그리고 이 해체가 제안하는 존재론에 관한 논의는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 신해욱의 시는 인간이 이성적 주체라는 휴머니즘의 오래된 믿음을 다시 질문하고 인간 이외의 세계로 눈을 돌린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나 인간에게 부여된 특권적 위치 때문에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신해욱 시를 다른 시들과 구별되게 하는 것이 있다면 휴머니즘의 외부를 향해 밀고 나아가는 다른 사유와 감각일 것이다. “나는 나의 장르를 바꾸어야 하거든.”(「괄목」, 『syzygy』)이라고 말하는 신해욱의 시는 인간중심적 사고를 넘어 사물의 편에 서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 점에서 신해욱의 시는 잘 이해되지 않는 좋은 글이다. 신해욱의 시는 뭔가를 전달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기보다 감지하기 어려운 세계를 읽을 수 있는 방법을 만든다. 좋은 글이 그런 것처럼 분명한 메시지나 익숙한 감정을 읽고 싶어하는 마음을 배반하고 지각 불가능한 것들을 전달할 가능성을 창안한다.

 

 

2. 사실의 바깥

 

신해욱의 첫 시집 『간결한 배치』에는 질문이 있다. 시의 화자는 “나를 감싸는 건/다른 것.”이라고 말하며 “보았다고 믿었던 것들을/지금 다 보는 걸까.”(「밀실」)라고 자문한다. 변경과 이동에 따라 “조금씩 부드러워지는 얼굴들”을 가진 이방인의 모습이나(「이방인」) “어느 쪽에서 보아도 뒷면뿐이지만/갈 곳은 명백하게 삼차원”인 “등뒤의 축축한 세계”(「안내인」)는 어떤 존재의 상태를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게 만든다. “생각 속에서 어떤 손이/불쑥 나타나/이유 없이/오래도록/내 얼굴을 만진다.//나는 자꾸 사실 바깥으로/벗어나고 있다.”라고 말하는 「벽」을 보면 ‘나’는 생각의 주체도 되지 못한다. 이 시의 부제인 ‘B110호/B111호’에는 같은 층의 인접성보다는 명백하게 구분되는 빗금의 벽이 있음에도 ‘나’는 단일하게 구성된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단일성을 흩트리는 “어떤 손”의 돌연한 출현은 ‘나’의 생각들을 ‘나’의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게 만든다. “나는 자꾸 사실 바깥으로/벗어나고 있다.”라는 문장은 진행형으로 쓰여 있다. 처음부터 ‘나’라는 실체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사실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에 대한 불확정성이 아니라 바깥이라는 규정할 수 없는 세계와 시적 화자가 접한다는 점이다. 신해욱의 시적 화자는 이러한 순간을 자주 포착해낸다. ‘나’의 한쪽 어깨를 지우고 “쓱 웃으며 나를/나의 의미를 미리 지워버”리는 「느린 여름」의 풍경은 어떤가. 자아가 고유하다는 믿음, 그 “의미”를 쓱 웃으며 지워버리는 “그”가 누구인지 우리는 알 수는 없다. 다만 “그를 벗어나는 자세로만 나는/그에게로 기울 수 있”을 뿐이다. ‘나’의 의미를 지우고 나서야 만나게 되는 다른 존재가 있는 것이다. 신해욱의 시에서 ‘보는 사람’이란 “두 눈을 크게 감고/이제는 핵심(核心)만을 보는”(「보는 사람」)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벗어나는 자세로만 뭔가에 닿을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이에게 ‘보는 방법’은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본다는 행위에 대한 불신과 ‘나’가 지워지는 방식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 신해욱의 두번째 시집 『생물성』과 그 이후의 시집에서도 일관되는 특징이 있다면 기존의 개체화된 자아의 방식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와 접속하게 만드는 사건의 발생일 것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시각은 근대적 세계에서 특권적 지위를 부여받은 감각이다. 대부분의 지각과 판단, 분별은 시각을 통해서 이뤄진다. 사물들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가려내는 것은 근대적 인식체계와 맞물린 시각체계에 기반한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신해욱 시의 화자에게 시각은 특별한 감각이 아니다. 기껏해야 그것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게 하고 기존의 믿음과 판단을 강화하기만 할 뿐이다.

 

목성에서 물이 떨어지는 속도

이름 없는 혹성에 대한 자유 연구

그런 것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상상력이 너무 빈곤해서

손가락을 잘라도 가루가 날릴 것이다.

 

어떤 물에도 녹지 않을 것이다.

—「지구의 끝」 부분

 

‘자아’라는 관념에서 ‘나’는 개체에 불과하다. 그것은 ‘나’와 세계가 그만큼 동떨어져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나’에게 ‘지구의 끝’을 상상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개체적 자아에게는 벗어날 수 있는 ‘바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아’라는 관념은 “어떤 물에도 녹지 않”는 세계와의 경계선을 만든다. 이 자아의 한계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생물성』의 화자는 “몇 번씩 얼굴을 바꾸며/내가 속한 시간과/나를 벗어난 시간을/생각”(「끝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하고 “생각을 기울여본다.//귀를 조금 찢어 소리 쪽에 던져주는 것으로/그것을 대신해볼까 한다.”(「소리」)라고 말한다. 자신의 위치를 교차시키는 것은 기존의 감각을 바꾸는 행위일 텐데, 소리를 듣기 위해 “소리 쪽에” 귀를 던져주는 전환이 일어난다. 이때 ‘귀’는 ‘나’가 소유한 감각 기관이 아니라 소리의 일부가 된다.

신해욱의 시의 화자는 모호함을 허용하고 지각 불가능성을 수락함으로써 무한한 관계들의 교차점에 서게 된다. 이 지점에서 신해욱 시는 인식론을 넘어선 존재론에 가까워진다. 인식론은 주체와 대상을 나누고 대상이 무엇인지를 식별하여 저기 있는 존재자를 명료하고 뚜렷하게 규정된 대상으로 바꾸려 하지만, 존재론은 대상이기 이전의 존재에게, 혹은 대상적 규정을 벗어난 존재에게, 그저 ‘있다’고만 말할 수 있는 존재에게 다가가려 한다.7 신해욱 시는 ‘사실의 바깥’, 즉 재현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지각 불가능한 ‘존재’에 관해 더 많이 열려 있다. 우리의 통념과 감각을 넘어서는 우연하고 낯선 세계로 한발 더 밀고 나아가는 것이다. 일찍이 김수영이 「절망」에서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고 썼던 것처럼, 신해욱의 시에서 “생소한 울음은 그러나/여전히 딴 데서만 온다.”(「검은 고양이」, 『간결한 배치』)

 

 

3. 이물감이라는 감응

 

세번째 시집의 제목 ‘syzygy’는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상한 조합의 단어다. 이 말은 삭망(朔望)과 연접(連接)이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시집 뒤표지에 실린 시인의 설명대로라면 이 단어는 천문학에서는 해와 달과 지구, 세 천체가 일직선에 선 상태를, 생물학에서는 원생동물의 생식법을 가리킨다고 한다. 시인은 “닿을 듯 닿을 듯 소리는 혀에 닿지 않고 뜻은 뇌에 닿지 않는다. 해와 달과 지구의 일직선은 나의 시야에 닿지 않고 원생동물의 생태는 나의 삶에 닿지 않는다”고 쓴다. 언어는 편의적인 표현수단이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syzygy’라는 단어가 주는 이상한 감응 앞에서 우리는 혀와 뇌에 직접적으로 작용하지 않는 언어가 지닌 이물감을 만나게 된다. 단일하고 자명하다고 여겨지는 ‘나’의 불확실성만큼이나 언어에는 이물감이 존재한다. 이러한 이물감은 낯선 단어에서만 생겨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손에서 비린내가 났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밀크」(『생물성』)를 보면 혼란스럽다. 이 시에는 우유라는 단어가 나오지만 ‘밀크’가 곧바로 ‘우유’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시는 “젖은 손이었다면/손목을 잘라 냉장고 속에 차갑게/식힐 수도 있었겠지만.//뜨거운 손이었다면 혈서를 써서/대신 냄새를 맡아볼 수도 있었겠지만.”으로 끝난다. ‘밀크’라는 단어가 유발하는 ‘비린내’는 우유와 피의 성질을 복합적으로 지니며 ‘밀크’는 우유와 피 사이 어디쯤에 있는 아주 다른 단어처럼 느껴진다. 『무족영원』의 「파훼」 「옥텟」처럼 낯선 제목의 시들도 비슷한 계열에 속한다.

예술작품은 감각들의 집적, 말하자면 지각들과 감응(affect)들의 복합체이다.8 감응은 여러가지 정서적 반응들이 혼합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모호하고 다의적이다.9 ‘밀크’가 우유인지 피인지 말할 수 없게 될 때, 그 말의 익숙함은 이물감이 된다. 이처럼 익숙한 말이 품고 있는 이질감이 드러날 때 혹은 익숙한 감각을 변형시킬 때 다른 감응이 만들어진다. ‘syzygy’라는 시집 제목이 말해주듯 단어는 우리의 지각으로 알 수 없는 이물감을 발산한다. ‘밀크’와 ‘우유’처럼 똑같다고 말할 수 없는 단어 사이의 이물감을 통해 ‘밀크’도 ‘우유’도 아닌 제3의 지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는 중간보다 키가 작다.

 

발뒤꿈치를 들어도 마이클 잭슨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손을 힘껏 뻗어도 시간의 끝에 닿지 않는다.

 

이봐, 정신을 차려라.

마이클 잭슨은 이미 죽었어.

 

*

 

지금껏 숨 쉬어왔던 것들을 뱉으며

나는 박자를 놓치고 있다.

 

지그재그의 걸음으로

제자리에 가까워지려 하고 있다. 제자리에.

 

달에.

 

*

 

달에 가자. 달에 가면

키가 두 배로 크니까.

 

마이클 잭슨의 발에 맞춰

왈츠보다 심한 춤을 출 수 있으니까.

—「문워킹」 부분

 

‘문워킹’은 여러 의미가 중첩된 단어이다. 문워킹이 앞으로 가는 자세로 보이지만 뒤로 가는 춤이고 마이클 잭슨의 특기였다는 사실을 이 시는 재치 있게 활용하고 있다. 화자는 발꿈치를 들어도 마이클 잭슨의 뒷모습을 보지 못하고, 손을 힘껏 뻗어도 시간의 끝에 닿지 못한다. 달을 보지 않고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본다는 불교의 유명한 공안(公案)처럼 마이클 잭슨이 이미 죽었는데도 그의 뒷모습을 보려고 애쓰는 상황인 것이다.

이 시의 화자가 자신을 중간보다 작다고 한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다. 크기는 근대적 이성의 명확한 시각체계에 의존한 사물의 이해 방식이다. 가령 「마이크로코스모스」의 “나의 인생이 짧아지게 된다면//조용히 다가와 손을 쬐며/너는 너의 육안을 시험해봐.//줄자를 들고 나의 사이즈를 재어봐.//몇 센티인가./몇 밀리인가.”라는 대목은 인간 존재가 ‘미생물 우주’에 소속된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비둘기와 숨은 것들」의 화자 역시 공기의 내부에서 “미생물들이 숨을 쉰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현대 생물학은 인간이 우월하거나 완전한 독립체가 아니라 공생의 산물이며, 다른 생물보다 고등한 존재가 아니라 대등한 존재라는 사실을 밝혀냈다.10 인간이 무수한 미생물과 박테리아의 공조체제 속에서 생명을 유지한다는 이러한 사실은 다른 생물체를 명명·동일시·분류하는 분류학을 넘어 인간의 필연적인 공생관계 속에서 동료 생물체에 관해 다르게 말할 수 있도록 방식을 바꾸게 한다.11 「휴머니티」(『무족영원』)에서처럼 인간은 “많은 염색체가 같은 색깔로 물들”여진 종(種)이며 “색맹의 리얼리즘”을 보여주는 개체일지 모른다. 많은 이질성과 다양성을 제거하고 “순수한 인간성만을 추출하여/정제된 의인화를 시도”한 결과가 인간, 인간의 감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신해욱의 시에는 자리하고 있다. 「메아리」의 “저 안에 아는 얼굴이 있니.//아는 얼굴이 있니.”라는 질문에서 중요한 것은 얼굴이라는 눈에 보이는 표상이 아니라 ‘있음’을 감지하는 새로운 감각인 것이다.

신해욱의 시에서 사물의 실체나 속성에 대한 규정화된 사실은 사실이 아니거나 다르게 표현해야 할 질문의 대상일 뿐이다. 「문워킹」에서 ‘중간보다 작다’는 말은 화자가 작은 시야로 세계를 판별하고 있음을 뜻한다. ‘중간’은 신해욱의 시에서 이쪽과 저쪽을 명확하게 구분 짓지 않는 지점인데(「다음에는 중간에서」) 그보다 ‘작은’ 상태로는 “손을 힘껏 뻗어도 시간의 끝에 닿지 않는” 한계만 확인할 수 있다.

화자는 어딘가로 가지 않고 단지 제자리에 가까워지기 위해 춤을 춘다. 문워킹이 향하는 달은 사실 원래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손가락에 현혹되어 손가락 끝만 보면 달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 가지 않아도,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도 새로운 춤(“왈츠보다 심한 춤”)을 출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지금껏 숨 쉬어왔던 것들을 뱉으며” 기존의 인식과 질서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4. ‘무족영원’의 순간

 

신해욱 시인의 근작 『무족영원』은 지각은 가능하지만 무엇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경험을 통해 기존의 인식과 분별에서 멀어지는 방식을 보여준다. ‘무족영원’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살아 있는 생물군으로 도롱뇽이나 지렁이처럼 생겼지만 척추가 있고, 뱀보다 먼저 지상에 출현했다고 한다. 땅속에 살아 눈이 퇴화된 이 생물들은 ‘은둔의 양서류’라고도 불린다. 양서류의 경계성을 지닌 무족영원처럼 무엇인지 설명하기 어려운 모호함을 시인은 ‘무족영원의 순간’이라 부른다.

 

깊은 잠을 자는 개의 규칙적인 숨소리 옆에는

음을 영원히 놓친

가수의 표정만이 허락된다고 하지.

 

그런 표정을 연습한 적이 없으니

나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애국가보다 재미있는 노래를 하나라도 떠올리기 위해

애를 쓰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족영원의 순간이라 중얼거려봅니다.

 

열대에 서식하는 백여 종의 눈먼 생물이

양서류 무족영원목 무족영원과에 속한다고 합니다.

—「무족영원」 전문

 

삶은 심장박동의 규칙적인 반복 속에서 “음을 영원히 놓친/가수의 표정”과 같은 순간을 새겨놓는다. “숨소리”처럼 지속적인 리듬 속에서 하나의 음은 삶을 이루는 순간순간이다. 음 하나를 영원히 놓치게 되는 순간들이 있어 삶은 소중한 것인지 모른다. 적어도 이 시의 화자에게는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음을 놓치는 표정은 연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순간을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삶은 연습이 아니라 그때그때가 불러야 할 노래이자 살아야 할 리듬이기 때문이다.

신해욱의 시는 “이야기를 잃은 사물들”(「주사위 던지기」, 『syzygy』)과 대상을 규정하려는 “진정성의 얼룩”이 “무던히도 지워지지 않”(「채색삽화」)은 채 남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는가? 살아 있는 순간순간을 어떻게 노래해야 하는가. 이 시는 그 질문의 시간을 ‘무족영원의 순간’이라 부른다. 그것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애국가보다 재미있는 노래를 하나라도 떠올리기 위해/애를 쓰는 수밖에 없”는 시간이다. 땅속으로 들어가 눈이 보이지 않게 된 무족영원처럼 그의 눈도 무릎을 향해 있다. 그것은 암흑의 시간이 아니라 기존의 판단과 분별을 내려놓는 자세이다. 그 노래는 애국가처럼 메시지나 의도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직 느껴보지 못한 즐거움, 음색이나 리듬조차도 익숙하지 않은 미지의 노래는 새로운 감각을 통해서 올 것이다. 그 노래의 음을 하나라도 떠올리기 위해 애쓰는 것, 무엇인지 모르지만 아직 불리지 않은 노래를 떠올려보는 것이 ‘무족영원의 순간’이다. 어떤 계통이나 계보에 속하지 않은 무족영원처럼 신해욱의 시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존재론의 세계, 확실하다는 믿음 저편에 관심을 둔다.

현대 철학에서 뚜렷한 형상을 지닌 개별적인 개체로서 ‘존재자’와 그가 존재하는 상태 또는 그 존재함 자체를 뜻하는 ‘존재’는 구별되어왔다. ‘존재자’는 그 개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경계를 방어한다. 인간을 비롯한 대부분의 생물체는 피부와 점막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명확한 외부와 내부의 구분을 갖는 존재자이다. 그렇다면 그런 개체적 ‘존재자’가 아닌 ‘존재’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지닌 감각의 용법을 바꿀 수 있을까. 「터치」(『syzygy』)를 보자.

 

내가 만지작거린 건 생각의 모서리였을까.

미물의 더듬이였을까.

 

아니면 그저 이불 바깥으로 삐져나온 나의 발을

가만히 잡고 있었던 것일까.

 

표절을 할 겨를도 없이 허락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식으로 공기에 속하게 되다니

가짜 비에 젖고 있는 것만 같다.

—「터치」 전문

 

‘터치’(touch)는 촉각이다. 이 시는 분명한 시적 대상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어떤 대상을 특정한 의미로 환원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터치의 대상이 무엇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 시가 처음부터 끝까지 시각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이성을 바탕으로 한 근대적 질서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다. 우리가 사물을 경험하는 방식은 주로 눈을 통해서이고 인간의 인식 과정에는 이름이 필수적으로 수반된다. 대상을 본 후에야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 화자는 눈으로 대상을 인식하는 게 아니라 “만지작거”리고 “가만히 잡고 있”다. “생각의 모서리”이거나 “미물의 더듬이” 혹은 “나의 발”이라고 짐작할 수 있어도 그것이 무엇인지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사물을 눈으로 판별하는 자동화된 인식 과정을 벗어나면 완전히 다른 순간과 만난다. “표절을 할 겨를도 없이 허락받”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눈을 통해 무엇을 안다고 믿는 주체는 이미 이름이라는 경험의 꼬리표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며 상대적으로 다른 감각들에 무지한 상태가 된다. 이 시에서 “표절”은 그런 식으로 자동화된 언어 행위를 비판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터치는 즉각적으로 대상에 다가가는 행위이다. 본다는 행위가 사물을 보려는 주체의 의지와 욕망을 반영한다면, 터치는 몸을 통한 감각과 교감의 경험이다. 시각이 지닌 일방향성에 비하면 터치는 상호적인 수용과 연결로 이뤄지기 때문에 “허락받았다”는 말과 어울릴 수 있는 것이다. 시각을 통해 대상을 규정하는 것은 근대 이성의 원리지만 터치는 그것과는 정반대편에 있다. 이 점에서 「터치」는 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ay)가 말한 서구 이성의 남성중심성과 구별되는 여성의 촉각성과 서로를 포개는 두 입술(성기)의 복수성을 연상시킨다.12 남성과 달리 여성은 다수의 성 기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중재자 없이 스스로 자신을 만질 수 있다. 어느 것도 소유하거나 정복하지 않는 유동적인 여성성을 「터치」는 인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런 식으로 공기에 속하게 되다니/가짜 비에 젖고 있는 것만 같다.”라고 말하는 화자를 보라. “공기”는 터치의 궁극적인 목적이나 결과가 아니다. 이 여성적 세계에서는 목적이 필요하지 않다. 터치는 경계를 무화시킨다. ‘공기’야말로 모든 것을 평등하게 포용하는 이미 허락된 ‘터치’이며 견고한 물질성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는 바탕이다. 이 지점에 이르면 개인적 자아마저도 공기에 “속하게” 된다. 어떤 것도 특정한 개별성을 드러내지 않는 무한한 열림으로서 공기〔空〕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가짜 비에 젖고 있는 것만 같”은 희열이 있다. ‘터치’는 모든 것을 연결하는 생성의 과정이다. 이리가레는 끝없이 열리는 여성의 복수적 성애를 말했지만, 「터치」는 촉각을 통해 경계 없는 세계로 나아간다.

 

 

5. 전체를 향한 열림과 섞임

 

『무족영원』에서 화자는 인간이 속한 세계를 비롯해 다른 존재들을 경험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해욱의 시는 인간의 단독성이 아니라 세계의 다양성을 탐구하는데, 인간 이외의 존재나 사물들은 이미 지워졌거나 흔적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인간의 문화와 대척점에 있는 자연은 낭만이나 동경의 대상도, 그렇다고 해서 회복해야 할 추구의 대상도 아니다. “우주자석/사슴벌레/파리지옥/코스모스”는 “네 글자로 이루어진 고독의 목록”(「화훼파」)이며 자연을 측정하려는 “경험론자의 경험”은 찢어지고 “경험의 틈이 벌어”(「파훼」)진다. 그 “벌어진 틈으로 미지의 액체가 콸콸 흘러 흙이. 숲이. 습함이. 병듦이.” 드러난다. 「파훼」에서 자연은 깨지고 헐어버려지는 행위 속에서 발견된다. “향토색에 찌든 자연”은 “부러진 삼각자에 찔려. 흥청망청 쏟아지는 것들. 곤드레만드레 흘러내리는 것들.”을 보여준다. 화자는 이 상황을 “삼복염천에. 누가 잡초를 움켜쥐고. 통곡을 하는 것 같”다고 쓰고 있다. 자연은 타자의 표상으로 대상화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하는 주어의 자리에 있다. ‘파훼’ 속에서 통곡하는 누군가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죽은 닭을 먹었다.”로 시작하는 「말복 만찬」은 죽은 닭을 먹는 것과 인간의 관계를 “혈맹으로 맺어진 우리”로 바라본다. 닭을 먹었지만 “아직” 닭의 어떤 특징도 화자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이 시의 발상은 포식자로서 인간이 자신이 먹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낯설게 만든다.(“위 아 더 월드. 혈맹으로 맺어진 우리는/모든 영물의 에너지를 모아/날 수 있게끔 모으고 또 모아”보려 하지만, “필라멘트가 끊어졌다.”) 인간과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은 자연만이 아니다. 사물도 마찬가지이다. “저기에 저렇게 있는/묘목들의 연약한 그림자//저기에 또 저렇게 있는/누적된 사물들의 단단함”(「어디까지 어디부터」)이 있다. 이렇게 자명하게 구분된 세계는 어떻게 공존하고 있는 것일까.

 

눈이 그치고. 하늘은 맑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

 

나무는 크다. 나무 옆에는 웅덩이. 웅덩이의 살얼음을 밟는 소리는 즐겁고 눈덩이는 가파르게 굴러오고 얼얼한 미래의 집에는 남은 선율이. 남은 사람이

 

망가진 피아노에 엎드려 흐느낌으로 건반을 두드리며

 

낮은 도. 또 낮은 도. 남은 옥타브에서. 활활 타는 난로에서. 때로는 예감. 때로는 반감. 때로는 소망. 음악은 무한.

 

랑데부는 어땠어?

 

눈이 그치고. 눈덩이가 굴러온다.

 

나무는 크고. 나무보다 더 큰 나무의 흔들림. 창문의 떨림. 조금 차가운 손으로. 이러한 열림. 이러한 섞임.

 

어깨를 덮어줄 담요가 필요했어.

 

안경에 김이 서린다. 맑은 콧물이 흐른다.

 

나는 단순해지려고 한다. 아름다워지려고 한다.

—「사운드트랙」 전문

 

각각의 존재자를 넘어선 ‘존재’는 어떤 모습일까. 『무족영원』에 실린 「사운드트랙」은 경계를 지우는 존재론적 사유가 담겨 있다. 겨울나무가 있다. 나무는 크다. 실제로 얼마나 큰 나무인지는 알 수 없다. 나무의 크기를 가늠하는 것은 나무를 존재자로만 보려는 태도이다. 나무가 큰 것은 나무와 연결된 세계의 크기 때문이다. 나무 옆에는 웅덩이가 있고 웅덩이의 살얼음을 밟을 때 나는 즐거운 소리가 있다. 눈덩이가 가파르게 굴러오기도 하며 미래의 집에는 남은 선율과 사람, 망가진 피아노와 흐느낌이 있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이 나무와 연결되어 있다. 활활 타는 난로 앞에 음악은 무한하다. 웅덩이, 눈덩이, 살얼음, 얼얼, 남은, 낮은, 때로는,처럼 반복되는 이 시의 어휘들도 그런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다.

나무는 무한하다. 여기서 사물들의 경계와 시공간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망가진 피아노와 흐느낌이 있는 그 집과 나무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존재’의 영역이 지각 가능하긴 한 것일까. 이 시의 흥미로운 점은 통합된 시간 속에서 모든 사물들이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풍경을 보는 ‘나’조차도 그 존재의 일부라는 사실을 드러낸다는 데 있다. 우리가 모르는 사물들에게 “랑데부는 어땠어?”라고 묻는다면 어떤 답을 들을 수 있을까. 망가진 피아노와 흐느낌에 대해 나무의 마음이 어땠을지 말이다. 흐느끼는 누군가의 “어깨를 덮어줄 담요가 필요했”기 때문에 “나무보다 더 큰 나무의 흔들림. 창문의 떨림. 조금 차가운 손으로.” 이어지는 “열림”과 “섞임”의 사건이 일어났다고 이 시는 말한다. 이 “열림”과 “섞임”은 나무라는 개체를 넘어 “나무보다 더 큰 나무”로 표현된다. 존재자는 하나의 개체성을 지닐 뿐이지만 존재는 열리고 섞이기 때문에 크고 무한하다.

이 시에서는 개별적인 사물이나 상황들이 무엇 하나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흐느끼는 누군가의 어깨를 덮는 일에 존재 전체가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 우리와 사물이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거대한 일원성으로 이어져 있음을 본 화자의 “안경에 김이 서”리고, “맑은 콧물이 흐른다.” 이것은 동화나 환상이 아니라 ‘맑은 하늘’ 아래 나타난 존재의 풍경이다. 블랑쇼(M. Blanchot)는 문학의 창조는 곧 부재의 실현이라고 말했다. 일상에서 벗어나는 이러한 멀어짐은 일반적 이해의 원천이나 우리의 제한된 이해 속 억압된 전망에 불과한 시간에서 벗어나 전체를 포착하는 힘을 준다.13 이 시가 보여주는 존재라는 ‘전체’의 시간은 우리의 통상적인 이해를 한참 벗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하기 때문에 없다고 간주해버린 세계의 실현이라는 점에서 또다른 진실이다.

그래서 “나는 단순해지려고 한다. 아름다워지려고 한다.”라는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자연스럽다. 단순함과 아름다움이 ‘전체’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존재가 만들어져서 시의 화자를 끌어들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래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기만 하면 되는 단순함, 그리고 ‘나’ 역시 나무의 세계의 일부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있을 뿐이다. ‘나’라는 개체성이 사라지고 전체에 합류하는 순간의 아름다움이 있을 뿐이다.

이 시만큼 ‘존재자’를 넘어선 ‘존재’의 속성을 잘 보여준 시가 있을까. 존재자와 존재의 관계는 망가진 피아노에서 무한의 음악을 듣는 것과 같을지 모른다. 존재자가 경계와 방어로 자신을 구축한다면 존재의 본질은 “열림”과 “섞임”에 있다. 모든 사물과 생명체들이 연결되어 있어서 “나무”의 세상이 되는 것, ‘나’조차 없는〔無〕 전체를 향한 열림의 존재론을 이 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신해욱의 시적 화자의 자기동일성 해체가 궁극적으로 다다른 존재론의 의미일 것이다.

신해욱은 어느 산문에서 이물감으로서의 한국문학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14 이물스러운 말들은 편안함을 향해 움직이는 한국어의 생물학적 욕망을 거스른다. 그에 따르면 불편함은 불편함과 안락함을 동시에 생각할 수 있게 하지만 안락함의 세계에서는 불편함을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어쩌면 이물감을 계속 견디고 있어야 하는 언어적 조건이야말로, 문학을 위해서는 은총일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이물감을 언어의 조건으로 수용하는 태도와 규정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한 ‘열림’과 ‘섞임’을 보여준 그의 시는 잘 어울린다. 신해욱의 시를 읽는 일은 아마도 “오류의 빛. 은혜의 밤.”(「악천후」)과 같은 낯선 조합이 주는 상이한 의미들을 동시에 만나는 일이 될지 모른다. 들뢰즈(G. Deleuze)는 카프카(F. Kafka)에 관해 쓰면서 “어떻게 자신의 언어에서 유목민, 이민자, 집시가 될 것인가?”를 질문했다.15 이 말은 신해욱의 시에서도 유효하다. 신해욱식으로는 ‘자신의 언어에서 인간을 중심으로 한 사유를 어떻게 다시 질문할 것인가’로 바꾸어 말해도 좋을 것이다. “내 목에는 묵음들이 가득 고여 있으니까./(…)/내가 놓친 소리들이 가청권 바깥에서/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라고 말하는 신해욱의 시는 어딘가에 있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가청권 바깥’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젖니를 혀 밑에 숨긴/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모르는 이야기에 닿”(「뮤트」, 『syzygy』)기를 열망하는 그의 시는 ‘있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사물들의 세계를 넘어 “열렬한 쑥덕임. 신속한 부대낌. 닥침. 잠김. 들썩임. 긁힘. 술렁임. 닥침. 울림. 또 닥침. 또 울림. 쑥덕임.”(「마술피리」)까지 귀 기울일 것이기 때문이다. 신해욱의 말처럼 이물감을 통해 세상의 증상을 앓을 수 있다면, 그리고 개체를 넘어 열리는 존재에 다가선다면, 우리는 윤리와 아름다움을 동시에 지닌 언어적 장소를 ‘시’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1. 이 글에서 다루는 신해욱의 시집은 『간결한 배치』(민음사 2005), 『생물성』(문학과지성사 2009), 『syzygy』(문학과지성사 2014), 『무족영원』(문학과지성사 2019)이다.
  2. 신형철 「가능한 불가능: 최근 ‘시와 정치’ 논의에 부쳐」, 『창작과비평』 2010년 봄호 378면; 함돈균 「날짜를 배당받지 못한 생일날의 일기장」 『문학과사회』 2009년 겨울호 참조.
  3. 신형철, 앞의 글 379면 참조.
  4. 오양진 「시의 이데올로기」, 『서정시학』 2009년 겨울호 303면 참조.
  5. 박상수 「의무의 감옥에서 코기토로 존재하기: 이준규와 신해욱의 시」, 『문학과사회』 2014년 여름호 303면 참조.
  6. 김나영 「시를 짓고, ‘나’는 산다: 신해욱과 김언의 시」, 『문학과사회』 2010년 가을호 275면 참조.
  7. 이진경 『예술, 존재에 휘말리다』, 문학동네 2019, 90면 참조.
  8.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정임·윤정임 옮김, 현대미학사 1995, 234면 참조.
  9. 감응(affect)은 “가장 미묘하게 오가는 강도들 속에서 그리고 그것들을 가로질러 발생”하며, “모호하거나 ‘뒤섞인’ 마주침들” 사이에 있어서 “문턱이나 긴장들, 혼합과 흐릿함이 들어서도록 만든다.” 멜리사 그레그·그레고리 시그워스 엮음 『정동 이론』, 최성희·김지영·박혜정 옮김, 갈무리 2015, 15~20면. 감응(affect)은 스피노자에게서 나온 말로 ‘정서’ ‘정동’ ‘감응’ 등으로 번역되지만 외부와의 접촉, 그에 응하여 발생하는 변화를 강조하는 뜻에서 ‘감응’이라고 쓰기로 한다.
  10. 린 마굴리스·도리언 세이건 『마이크로 코스모스』, 홍욱희 옮김, 김영사 2011, 264~317면 참조.
  11. 톰 웨이크퍼드 『공생 그 아름다운 공존』, 전방욱 옮김, 해나무 2004, 6장 참조.
  12. 뤼스 이리가라이 『하나이지 않은 성』, 이은민 옮김, 동문선 2000, 35~39면.
  13. 모리스 블랑쇼 『카프카에서 카프카로』, 이달승 옮김, 그린비 2013, 34면 참조.
  14. 신해욱 「이물감의 쾌락과 한국어-문학」, 『문학동네』 2009년 가을호.
  15.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이진경 옮김, 동문선 2001, 5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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