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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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경 尹餘慶

서울예술대 극작과 3학년. 1995년생.

arrebolada23@naver.com

 

 

 

돌연변이 고래

 

등장인물

자미: 22세, 유치원 교사, 여자

인간: 30대 추정, 남자

미호: 32세, 자미의 언니

남자: 50세, 자미와 미호의 아버지

 

무대

바닥은 모래로 깔려 있고 바위만 듬성듬성 있으며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무대 한편에는 알 수 없는 낡은 냉장고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어느 날 새벽.

파란 빛깔로 물들어 바닷속인지 아니면 밖인지 알 수가 없다.

고래의 울음소리와 함께 파도 소리가 퍼진다.

 

목소리 나흘 전 인천 앞바다에서 돌연변이 고래 사체가 발견되었다는 속보 전해드렸죠? 오늘 새벽, 또 한구가 발견되었습니다. 인간과 혼종된 돌연변이 고래 사체는 미소를 띠고 있어서 더욱 기이한 느낌을 풍기는데요. 연구진들이 지금까지 발견된 돌연변이 고래 DNA를 분석한 결과 실종자 DNA와 일치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자살한 사람이 돌연변이 고래가 된다는 유언비어가 인터넷상에 퍼지고 있어 논란이……

 

앵커의 목소리가 괴상하게 찢어지며 사라진다.

황망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감돈다.

차가운 겨울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인간이 허공에 복싱 연습을 하며 뛰어온다. 인간이 자신의 가슴근육을 만지며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짓는다.

 

인간 난 너무 멋져. 대단해. 사랑해.

 

인간이 자기 몸에 키스를 몇번 한다. 다시 복싱 연습을 하다가 금방 지쳐 하며 바위에 쭈그려 앉아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다.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하는데 아주 낡은 의문의 냉장고가 비스듬하게 서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인간은 주변을 살피지만 아무도 없다. 인간은 담배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냉장고 쪽으로 다가간다. 냉장고를 두드려보고 흔들어보는데 안에 무엇인가 들어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인간 버린 건가?

 

인간은 냉장고를 잠시 동안 쳐다보다가 문을 잡고 천천히 연다. 냉장고 안에 웅크린 자미가 있다. 온몸이 물에 흠뻑 젖은 자미가 바들바들 떨고 있다.

자미가 고개를 들어 인간을 본다.

인간은 아무 표정을 짓지 않은 채 무덤덤하게 말한다.

 

인간 안 추워?

 

자미가 고개를 끄떡인다. 자미가 인간의 손을 뿌리치고 냉장고 문을 닫는다.

인간이 다시 냉장고를 연다.

 

인간 나올래?

자미 싫어요.

인간 왜?

자미 무서워요.

인간 내가 여기 있을게.

자미 싫어요.

인간 그건 또 왜?

자미 피해 끼치기 싫어요.

인간 염병……

 

자미, 인간을 본다.

 

자미 근데 왜 말 놓으세요? 언제 봤다고……

인간 이 와중에…… 나 원 참. (공손하게) 나오시겠습니까요?

자미 제가 왜요?

인간 그럼 계속 거기 있을 거야? (차가운 표정으로) 너한테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닐 텐데. 영원히 그 세계에 갇힐 수도 있어.

 

자미가 인간의 기운에 살짝 움찔한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냉장고 밖으로 나온다.

고래 울음소리가 크게 퍼진다. 자미가 놀라며 귀를 막는다. 맨발에 상처가 많이 나 있는 자미의 다리. 인간은 자미의 다리를 보고 한숨 쉬며 고개를 젓는다. 자미는 눈치를 채고 어색하게 치마를 내리며 다리를 가리려고 애쓴다.

 

자미 여기가 어디예요?

인간 바다.

자미 (혼잣말로) 어느 바다일까요……

인간 (갸우뚱하며) 서울시는 아닐걸? 처음 듣는 질문이네. 충청도 관할 지역인가?

자미 근데 그쪽은 누구세요?

인간 나? 여유롭게 조깅하려는데 이상한 냉장고 발견하고 너 구해준 인간이랄까.

자미 (나지막이) 구해달라는 말은 안 했는데.

인간 여러모로 죄송하네요.

자미 이름은 어떻게 되세요?

인간 인간.

자미 보여요, 두발로 걸어다니는 거.

인간 아니, 이름이 인간이라고…… 인간아! (발끈하며) 조곤조곤 할 말은 다 하네.

 

인간이 담배를 꺼내서 담배를 피우려고 한다.

 

자미 (소심하게) 여기서 담배 피우지 마세요. 그거 환경 파괴예요.

인간 환경 파괴되기 전에 내 정신이 먼저 파괴될 것 같다.

 

인간이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다시 집어넣는다.

자미가 냉장고에 들어가려고 한다. 인간이 자미의 팔을 붙잡는다.

 

인간 뭐 해? 왜 또 들어가?

자미 이거 꿈이잖아요. 저 이런 꿈 자주 꿔서 익숙해요. 바닷속인지 아니면 바깥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혼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꿈.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알 수 없는 꿈. 꿈에서 깨려면 원래 있었던 곳으로 다시 들어가면 되더라고요. 근데 오늘은 이상하게 그쪽을, 아니지 인간님을 만났네요. 반가웠어요.(웃음) 저도 참……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이름을 성의 없게 지었네요. 다음 꿈에서는 멋진 이름 가지고 올게요. 서강준이나 박보검 같은 이름으로?

 

인간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자미 이제 눈떠야죠. 현실에서………

인간 정말 돌아가고 싶어? 그 현실에.

 

입을 다문 채 아무 말을 하지 않는 자미.

파도치는 소리가 퍼진다.

 

자미 어쨌든 살아야 하니까.

 

자미가 냉장고에 들어가 문을 닫는다.

인간이 냉장고를 바라보다가 노크를 한다.

 

인간 이게 진짜 꿈이라면 말이야. 굳이 이렇게 빨리 현실로 돌아갈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아직 새벽이야. 해 뜨려면 시간 꽤 남았어. 이왕 이렇게 꿈에서 만난 것도 인연인데 대화 좀 나눌 수 있잖아.

 

자미, 냉장고 문을 슬며시 연다.

인간이 자미를 바라본다.

 

인간 생각해보니 어이없네. 꿈인데도 환경 파괴니 뭐니, 그런 말을 한 거야?

 

인간이 헛웃음을 지으며 바닥에 털썩 앉는다.

 

자미 아이들한테 솔선수범해야 돼서 습관이 된 거예요. 무례했다면 죄송해요.

 

자미가 천천히 냉장고 밖으로 나온다.

 

인간 그래? 뭐, 담배 피워서 좋을 건 없지. 여기서도 금연구역에서 흡연하면 과태료 10만원이니.

자미 오늘따라 꿈이 구체적이네요.(웃음) 근데 신기해요. 이런 적은 처음이라. 꿈에서 모르는 분과 대화를 나눈다는 게.

 

인간 옆에 자미가 앉는다.

그때 배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자미가 위쪽을 쳐다본다.

 

자미 무슨 소리지? 저만 들려요?

인간 오징어잡이 조업 마무리하나보네. 보통 새벽 세시쯤 끝나거든.

 

자미가 어리둥절해한다.

 

자미 인간님은 뭐 하시는 분인데 이런 걸 다 알아요?

인간 장의사라고 해야 할까? 그래, 장의사지. 조금 특별한 장의사.

자미 어떤 장의사신데요?

인간 너 돌연변이 고래 들어봤지?

 

자미, 아랫입술을 깨문다.

잠시 정적.

 

자미 네……

인간 돌연변이 고래 전문 장의사야.

자미 정말요? 그런 장의사가 있는지 몰랐어요. 무섭지 않으세요? 조금 기이하게 생겼다고 하던데. 언론에는 전부 모자이크 처리된 사진만 올라오더라고요.

인간 음…… 무섭기보다는, 뭐라고 해야 할까? 분명히 고래인데 얼굴을 자세히 보면 사람이야. 사람인지 고래인지 헷갈리는 정도. 절차대로 남자는 수염을 깎아주고 여자는 화장을 해주는데 할 때마다 기분이 묘해.

자미 수염도 나요?

인간 수염고래 본 적 있어? 그 고래처럼 남자는 수염이 위턱에 달려 있는데 그것만 정리해주는 거야.

 

인간이 수염 미는 시늉을 한다,

자미가 옅은 미소를 짓는다.

 

자미 제가 듣기론 돌연변이 고래 시체가 웃고 있다고 하던데.

인간 사람도 죽기 전에 마음 편히 세상을 뜨잖아? 그런 시체를 보면 살며시 웃음을 보이고 있다. 돌연변이 고래도 똑같은 거야.

자미 그 돌연변이 고래는 다들 행복하게 죽었나보네요. 그들은 사람일까요? 고래일까요? 아니면 괴물?

인간 솔직히 그런 거 생각해본 적 없어. 난 그저 죽은 자를 아름답고, 깨끗하게, 편안하게 보내드리려고 할 뿐이야.

 

그때 위에서 고래가 지나가는 소리가 웅장하게 들린다.

자미가 귀를 막으며 위쪽을 쳐다본다. 인간이 그 고래에게 손을 흔든다.

 

인간 (큰 목소리로) 밥 좀 먹고 다녀요!

 

고래 소리가 한번 더 울린다.

 

자미 저, 저, 저 고래 알아요?

인간 응. 저 고래가 그 돌연변이 고래야.

자미 네? 그럼 고래랑 대화할 수 있어요?

인간 바다에 사는 생물이라면 대부분? 미역 이런 애들이랑은 말이 안 통하고…… 걔네는 답을 안 해. 답답하게. 이해하기 힘든 애들이야.

 

인간이 옆에 있는 미역에게 인사를 한다.

 

인간 안녕!

 

묵묵부답인 미역. 인간이 한숨 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자미가 위쪽을 이리저리 쳐다본다.

 

인간 소용없어. 이미 갔거든. 특히 저분은 반나절 이상을 뭘 먹지도 않고 저렇게 헤엄치고 다니셔. 힘이 넘쳐나. 아주 대단하지.

자미 저 고래를 아세요?

인간 알고말고. 어떤 여자분이었지. 한순간도 자기 인생을 살아보지 못한 불쌍한 여자. 지금은 그 누구보다 행복한 고래지.

 

자미가 인간을 지긋이 보다가 무슨 질문을 하려는데 물고기 무리가 지나가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자미가 위를 쳐다본다.

 

자미 (놀라며) 어? 소리가 왜 전부 하늘 쪽에서 들리는 거죠? 아까 오징어잡이 배도, 고래 소리도, 이 소리도! 저만 그러는 거예요? 진짜 바닷속에 있는 것만 같아요.

 

자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껑충껑충 뛰며 허공에 수영하듯 헤엄쳐본다. 자신의 손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자미 이것 봐요. 정말 바닷물을 만지는 것 같아요. 와…… 진짜 신기해.

인간 (나지막이) 너 진짜 하나도 모르고 왔구나?

 

자미가 아이처럼 위를 올려다보며 계속 자리에서 뛴다.

 

인간 아이고, 정신없어. 애도 아니고. 좀 앉을래?

 

자미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리에 앉는다.

 

자미 (웃음) 죄송해요. 꿈이 너무 생생해서.

인간 어때? 여기가…… 아니지. 네 꿈이 행복하니? 네가 살고 있는 현실보다.

자미 말이라고 하세요? (사이) 이 순간이 깨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실 영원했으면 좋겠어요. 지금 여기서 언니만 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아요. 인간님은 그런 거 할 수 있어요? 인간님 기운이 남다르거든요.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요? (장난스럽게)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 보면 짐 캐리가 줄 던져서 당기면 달이 따라오는 것처럼 (사이) 인간님도 우리 언니를 저승에서 데리고 올 수 있을 것만 같아요.

인간 내가 그런 걸 어떻게 하냐? 나는 신이 아니라고.

 

자미가 아랫입술을 깨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뗀다.

 

자미 돌연변이 고래는 어떻게 생겨난 걸까요? 자살한 사람이 돌연변이 고래가 된다고 하던데. 혹시 아시는 거 있으면 뭐라도 말씀해주세요. (사이) 여기가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안 돼서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인간님이라면 뭐라도 아시는 게 있을……

인간 (단호하게) 몰라.

자미 소문 때문에 매일같이 바다에 왔어요. 자살한 사람이 돌연변이 고래가 된다고. 아닐 수도 있지만 혹시 맞을 수 있으니까.

인간 묻지 마라. 말해줄 거 없다.

 

인간이 벌러덩 뒤로 눕는다.

 

자미 사실 3년 전 여름에 언니가 바다에 투신자살했어요. 오늘이 딱 3년 지난 날이네요. 이름은……

인간 (귀찮다는 말투로) 나한테 말한다고 달라질 거 없다니깐.

자미 미호.

 

인간이 자미를 힐끔 보며 자리에 앉는다.

 

인간 언니 이름이 미호야?

자미 네. 유미호. 예쁘죠? 이름.

 

여름옷을 입은 미호가 걸어 나온다. 미호는 바닷가 구석에 쭈그려 앉는다. 모래에 묻힌 조개껍데기를 뒤적거린다.

그러나 자미와 인간은 미호를 인지하지 못한다.

미호도 자미와 인간을 인지하지 못한다.

 

자미 납치일까 싶어서 경찰서에 갔는데 언니가 바다에 스스로 들어간 게 CCTV에 찍혔대요. 아직까지 그 영상을 한번도 제 눈으로 본 적은 없어요. 언니가 그런 선택을 할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저는 늘 언니를 외면했어요. 인간님은 어떠신지 모르겠지만 (사이) 저는 의지하고 싶은 사람일수록 그 지치고 괴로운 마음을 보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아요. 그 사람만은 늘 밝았으면 좋겠고, 늘 행복한 모습만 보여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잖아요. 내가 너무 힘드니까…… 그래서 억지로라도 외면하는 것 같아요.

 

미호는 가지고 놀던 조개껍데기를 챙겨 퇴장한다.

 

자미 인간님, 그거 아세요? 고래가 육지에서 죽는 이유는 숨을 쉬지 못해서가 아니래요. 고래는 폐호흡을 하기 때문에 숨을 못 쉬지는 않는데요. 고래가 죽는 원인은 몸무게에 있대요. 그 엄청난 몸무게에 내장이 눌려 압사하는 거래요. 바다에서는 물의 부력 덕분에 거대한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지만 육지로 올라오면 몸의 강한 압력 때문에 질식사를 하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강한 일사량으로 인한 화상, 피부 수축, 체온 상승이 죽음을 재촉하기도 한대요. (사이) 그래서 지구상에서 가장 큰 포유동물인 고래가 육지가 아닌 바다에 사는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고래 소리가 퍼진다.

자미가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듣는다.

 

자미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숨은 쉴 수 있는데 무언가에 압사돼서 죽는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죠? 죽음을 재촉한다는 것도. (사이) 살고는 있지만, 하루하루를 억지로 버텨가며 살아간다면 그건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생존에 가까운 거 아닐까요? 생존하기 위해 오늘만 겨우 참으며 살아야 한다면 사는 것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거잖아요. 언젠가 어떤 무언가에 질식되어 죽어버리면 허망하잖아요. (사이) 지금까지 버티면서 살아왔던 삶이 너무나도.

인간 그 말은 죽는 게 사는 것보다 좋다, 이런 말인가?

자미 아뇨. 그냥…… 하루만이라도 자유를 가지고 산다면 그게 정말 살아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인간이 자미를 지긋이 본다.

자미가 바닷가를 서성이며 걷다가 무대 앞쪽에 선다.

 

자미 언니는 바다를 참 좋아했어요.

 

그때 미호가 다시 등장한다.

미호를 지켜보는 자미와 인간.

 

자미 언니는 꿈꿨던 것 같아요. 바다를 자유로이 헤엄치는 꿈을. 제가 이 꿈에 있는 것처럼.

 

모래사장에 앉아 눈을 감는 미호. 자미가 미호 곁에 가서 앉는다.

인간은 일어나서 바위로 향한다. 바위에 앉아 자미와 미호를 찬찬히 본다.

 

자미 가끔 기분이 좋으면 콧노래를 부르기도 했어요. 무슨 노랜지는 모르겠는데……

 

미호가 콧노래를 부른다.

자미가 미호의 콧노래를 따라 부른다.

 

자미 자장가 같은 거였어요.

 

자미가 미호의 어깨에 기댄다.

미호는 개의치 않은 채 눈을 감고 파도 소리를 듣는다.

파도 소리가 슬프게 울린다.

 

자미 아빠가 술에 취한 날이면 저는 너무 무서워서 냉장고 코드 선을 뽑고 냉장고 속에 들어가 벌벌 떨었어요. 아빠가 유일하게 집 안에서 뒤지지 않는 곳이 냉장고였어요. 어차피 냉장고에 먹을 게 하나도 없어서 항상 텅텅 비어 있었거든요.

인간 (혼잣말로) 그래서 여기에 냉장고가 있었군.

자미 평소엔 물건을 던지지는 않는데 (사이) 술만 취하면 집안 살림을 다 깨부쉈어요. 가구든 유리든 (사이) 자식이든. 언니는 학교가 늦게 끝나니까, 저 혼자 냉장고에 숨어서 언니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숨소리도 내지 않고. 어떨 때는 아빠가 제 머리채를 붙잡고 질질 끌고 동네를 돌아다닌 적도 있었어요. 등이고 팔이고 피멍이 들었어요. 근데 그 당시에 무슨 기도 했는지 알아요?

인간……

자미 학교 친구들이 제발, 이런 내 모습을 보지 않게 해달라고. 학교 가면 놀림거리 될 거 당연하니까.

 

깊은 한숨을 쉬는 인간.

 

자미 꼭 그럴 때만 애들이랑 마주치더라고요. 하늘도 무심하지.

 

자미가 위를 올려다보며 크게 한숨을 내쉰다.

 

자미 그런 날이면 언니가 꼭 새벽에 깨웠어요.

 

미호, 옆자리에 앉은 자미의 머리를 땋는다.

 

자미 예쁘게 머리를 땋아주고.

 

미호와 자미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미호가 자미의 옷을 털어준다.

 

자미 내가 제일 아끼는 옷도 입혀주고.

 

미호가 자미의 볼을 꼬집는다.

 

자미 볼도 한번 꼬집어주면서 예쁘다고 칭찬도 해주고.

 

자미가 상상에 잠긴 듯 싱긋 웃는다. 미호가 자미의 손을 잡고 바위 쪽으로 가서 앉는다. 미호가 자미의 어깨를 감싼다. 미호는 미소를 머금고 있다.

하지만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인간은 일어서서 냉장고 곁에 선다.

 

자미 마냥 좋았어요. 고요한 바다랑 언니. 언니만 있으면 아빠도 날 안 때리고, 언니만 있으면 맛있는 음식도 배 터지게 먹을 수 있고, 언니만 있으면 슬픈 일이 하나도 없으니까…… 그때는 몰랐는데, 언니는 학교에서 늦게 온 게 아니라 학교도 못 가고 종일 아르바이트를 했던 거였어요. 나랑 같이 살 집 구하려고. 언니도 어렸는데 말이죠.

 

미호가 조개껍데기로 만든 목걸이를 자미의 목에 걸어준다.

자미, 울먹이며 미호를 바라본다.

 

자미 실은 언니 팔다리에 시퍼렇게 멍이 있는 걸 봤거든요? 제가 자고 있을 때, 아빠가 언니 때리는 소리를 들었는데도 (사이) 그런데도 모른 척했어요. 언니마저 힘들다고 하면 나는 어떡해? 나는 누가 지켜줘? 나는 누구한테 의지해? 언니는 힘든 걸 모르는 사람이어야 했어요. 적어도 나한테는. 나한테만은 언니는 그런 사람이어야 했어요.

 

미호가 자미의 머리를 넘겨주며 웃는다.

 

자미 웃고 있는 게 아니었을 텐데. 언니 입에서는 괜찮다는 말만 듣고 싶었나봐요. 나도 참 못됐지.

 

자미가 미호의 손을 잡는다.

 

자미 왜 (사이) 저는 한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을까요?

 

잠시 정적

 

자미 ‘언니, 괜찮아?’ (사이) 이 한마디가 뭐 그렇게 어려웠을까요.

인간 엄마는?

자미 언니 말로는 제가 백일도 안 돼서 돌아가셨대요.

인간 미안해. 눈치가 없었네.

자미 뭘요. 괜찮아요. (사이) 제가 그렇게 안 보여도 유치원 교사거든요? 제가 담당하는 반에서 키가 제일 작은 남자애가 너무 자주 우는 거예요. 등원할 때부터 하원할 때까지.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꼭 저 어렸을 때 보는 것만 같아서. (사이) 매번 아버지만 오시고 어머니는 한번도 온 적이 없어서 학생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렸죠.

 

자미가 조개껍데기 목걸이를 만지작거린다.

 

자미 어머니가 오셔서 면담을 했는데 신기하게도 저랑 많이 닮았더라고요. 걸음걸이도 똑같고. 왼쪽 눈썹 위에 점이 있는 것도 판박이여서 신기했어요. 그 어머니도 저를 빤히 보더라고요. 마치 오래전에 만난 사람인 것처럼.

인간 혹시……

자미 언니한테 유치원에서 신기한 일이 있었다고 조잘조잘 말했죠. 그런데 언니 표정이 점점 굳는 거예요. 그러더니 그 어머니를 만나게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뜬금없이. 얼마 후에 언니와 학생 어머니를 만나게 해줬죠. 저는 나가 있으라고 해서 대화는 못 들었는데 그뒤로부터 언니의 웃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어요.

 

미호와 자미가 서로를 한참 본다. 미호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떡인다. 자미, 미소를 짓다가 눈물을 흘리며 미호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는다. 미호는 슬픈 미소를 잃지 않고 자미의 어깨를 토닥인다.

인간은 자미 쪽으로 다가간다.

미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고 일어나서 퇴장한다.

인간이 자미에게 다가가 어깨를 어색하게 토닥이며 옆자리에 앉는다.

 

인간 (나지막이) 네 언니 걱정 말아라.

 

자미는 눈물을 닦다가 인간의 말을 듣지 못한다.

 

인간 너는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간다고 생각해?

자미 천국 아닐까요?

인간 넌 착한 일 많이 했구나. 크리스마스에 선물 받겠네.

 

자미, 피식 웃는다.

 

인간 고대 그리스인들은 영혼을 두가지 종류로 나눴다고 하더라. 신체와 결부된 영혼과 육체에서 자유로운 영혼. 신체와 결부된 영혼은 인간의 감정이나 의식을 지배하고 사람이 죽으면 활동을 멈추는 거지. 반면에 육체에서 자유로운 영혼이 있다고 해. 이 영혼은 인간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래. 사람이 죽으면 이 영혼은 육체를 떠나 지하세계로 들어간다네. 그래서 죽은 자의 영혼은 산 사람의 영혼만큼 무수히 많대.

자미 그럼 사람이 죽으면 지하세계로 가는 건가요? 지옥 그런 곳인가.

인간 그런데 다르게 생각하면 지하세계가 바다일 수도 있지 않아? 꼭 그 지하세계가 지옥 같은 곳일 필요는 없잖아. 굳이 죽은 후에 가는 곳까지 생각하냐, 씁쓸하게. 그치?

자미 (웃음)

인간 육체는 소멸해도 영혼은 남아 있어. 그 자유로운 영혼이 돌고 돌아 이 바다에 들어와서 영원히 소멸하는 것과 (사이) 한순간이라도 이 바다를 자유롭게 유영하면서 살 수 있는 고래로 다시 태어나는 것 중에서 기회가 주어진다면 넌 어떤 걸 선택할래? 물론 또 죽을 수도 있어. 상어한테 물어뜯길 수도 있고 사람에게 잔인하게 죽임당할 수도 있고.

 

그 순간 냉장고가 과격하게 흔들린다.

자미가 깜짝 놀란다.

 

인간 자미야, 시간 없다. 선택은 너의 몫이야. 네 삶은 네가 살아가는 거니까.

자미 (놀라며) 제 이름을 어떻게 아시죠?

 

인간이 냉장고 쪽으로 향한다.

냉장고가 열리며 남자가 튀어나온다.

 

자미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친다.

오히려 남자는 다정한 표정과 말투로 자미에게 다가간다.

 

남자 자미야, 빨리 오렴. 집에 가야지. 시간이 늦었어. (갑자기 소리 지르며) 아빠가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랬지!

 

자미가 혼란스러워한다.

 

인간 조금만 시간을 주는 거 어때?

 

남자가 인간의 멱살을 잡는다.

 

남자 넌 누군데 껴들고 난리……

 

남자가 인간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라며 말을 잇지 못한다.

 

인간 기억나시나보네.

 

남자가 멱살을 더 세게 잡는다.

 

남자 이놈이 내 딸들 잡아먹으려고! 내 딸들 내놔. 내 딸들 내놓으라고!

인간 20년 전 오늘처럼 추웠던 날. 당신은 바다에 몸을 던졌지.

 

멱살을 놓는 남자.

 

인간 당신이 다시 살 기회 한번만 달라고 애원했잖아. 그리고 약속했잖아. 잘 살겠다고. 딸 둘이 있는데 잘 키워보고 싶다고. 그런데 왜 이렇게 된 거야?

남자 세상이 나를 몰아붙이는데 어떡해? (사이) 나도 잘 살고 싶었단 말이야. 노력했어! 하지만 세상은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아. 내가 불행하기만을 바라는 것같이.

 

인간이 남자의 어깨를 세게 붙잡는다.

남자가 고통스러워한다.

 

인간 인간답게 살았어야지. 최소한 인간답게.

 

잠시 정적.

남자는 자리에 주저앉아 멍하니 바닥을 본다.

 

인간 그래서 선택은?

자미 당신은 누군가요?

인간 난 선택지를 주는 인간.

자미 인간이라……

인간 인간이 별건가? 언어와 도구를 사용하면 인간이지.

자미 여긴 제 꿈이 아닌가보죠.

인간 꿈과 현실 그 중간세계라고 하면 더 맞겠지.

자미 저는 아직 죽은 건가보네요.

인간 그렇지. 너는 그 중간세계에 끼어 있는 거야. 너의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거지. 내가 말했잖아. 네 인생은 네가 선택하는 거라고. 그 누구도 너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없어.

자미 혹시 저희 언니도 여기 왔었나요?

인간 왔지.

자미 언니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인간 미호?

 

그 순간 고래 소리가 퍼진다.

인간이 그 고래를 가리킨다.

 

인간 저기 지나가네. 네 언니.

 

자미, 매우 기뻐하며 크게 웃기 시작한다.

 

자미 (큰 목소리로) 언니! 나야, 자미! 내 목소리 들려?

 

자미가 손을 흔든다.

고래 소리가 웅장하게 퍼진다.

 

자미 언니! 괜찮아? 언니 원하는 대로 살고 반드시 행복해야 해.

 

인간이 손목시계를 본다.

 

인간 시간 없어. 지금 결정 안 하면 네 영혼은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하염없이 떠돌게 되어 있어. 1분 남았다.

 

시계 초침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자미가 남자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자미 아빠, 언니와 저에게 왜 그러신 거예요?

 

남자가 고개를 들어 자미를 지그시 본다.

 

자미 왜 그 어린애들의 몸과 마음에서 피가 터져 나오도록 가두고 때리셨나요? 아빠가 낳은 자식들인데.

남자 모르겠다. 나도 모르겠다고. 그저 사는 게 너무 힘들었어. 너무 힘들어서 (사이) 그랬던 것 같아. 너네는 내가 아무리 나쁘게 대해도 나를 언제나 온전히 사랑해주니까. 네 엄마처럼 떠나지 않을 거니까.

자미 그건 이유가 될 수 없어요. (사이) 그러시면 안 됐어요. 결코.

 

남자가 자미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린다.

 

남자 한번만 용서해주라. 아빠가 불쌍하지도 않니? 엄마 없이 딸 둘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자미 저희를 키우셨다고요?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지금?

남자 밥 먹여줘, 옷 입혀줘, 학교 보내줘. 그럼 키운 거지! 무슨 말이 많아?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자미의 뺨을 때리려고 한다. 인간이 막으려고 하는데 자미가 남자의 손을 붙잡는다. 멈칫하는 인간.

남자가 당황한다. 자미가 남자의 손을 뿌리친다.

 

자미 당신 없는 세상에서 단 하루만 살아보는 게 내 소원이었어. 낳기만 한 걸로 함부로 말하지 마. 제발.

 

말을 잃은 남자.

자미가 인간을 바라본다.

 

자미 얼마 안 되는 시간이지만 행복했어요.

인간 언제든지 환영할 수는 없는 곳이지만, 나도 반가웠어.

자미 이 행복을 제 마음에 고이 보관하고 한번 살아볼게요.

 

인간이 자미를 보고 밝게 웃는다.

인간이 고개를 돌려 남자를 냉정하게 쳐다본다,

 

인간 당신은 여기에 있는 게 좋을 듯싶은데. 두번은 안 돼.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인다.

인간이 자미에게 손을 흔든다.

 

인간 행복해라.

 

잠시 어두워졌다가 밝아진다.

모래사장에 자미 홀로 쓰러져 있다.

자미가 정신을 차리고 쿨럭이며 자리에 앉는다.

자신의 손과 발을 훑어보고 만져보는 자미.

살아 있음을 느낀다.

 

자미가 슬픈 웃음을 짓는다.

 

목소리 오늘 아침 A씨가 파도에 휩쓸려 사망한 상태로 주민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A씨는 아동폭행 전과가 있던……

 

앵커의 목소리가 파도 소리와 함께 고요히 사라진다.

무대에 고래의 소리만이 가득 채워진다.

 

암전.

막.

 

 

 

심사평

 

올해 응모작은 총 67편이었다. 대체로 소재는 다양한 편이었으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작품은 많지 않았다. 흥미 위주의 소재에 갇혀 매력적인 주제로 발전되지 못하는 작품이 다수 눈에 띄었다. 또한 자아성찰, 희망, 꿈, 미래사회 등의 몽환적인 내면으로 파고드는 작품이 많아 현세대의 새로운 경향으로 보이기도 했다.

두 심사위원은 작품의 완성도, 문장력, 참신성을 기준으로 심사한 결과, 「둘이서 돌을 넘기」 「여인과 소녀」 「습기 너머」 「표류」 「돌연변이 고래」 「집 앞 단골 구멍가게 낙타 아저씨를 훔치는 방법」 이렇게 여섯 작품을 본심 대상으로 선정하였다.

「둘이서 돌을 넘기」는 희곡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으며 문장력이 우수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결말의 매듭이 잘 지어지지 않았고 결국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모호해진 것이 큰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여인과 소녀」는 결말을 궁금하게 만드는 사건의 전개 방식과 인물들의 개성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마지막 반전을 위해 달리는 것을 장점으로 볼 수 있으나 반대로 그 반전에 작품이 매몰되어버리는 바람에 주제가 깊지 않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졌다.

「습기 너머」는 최근 다수의 희곡에서 다뤄지는 동성애를 소재로 한다. 입체적인 캐릭터 구축과 살아 있는 대사가 매력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반복되는 장면과 불필요한 대사들이 긴장감을 떨어뜨리며 다소 지루하게 만들었다. 희곡은 압축미가 중요하다. 보다 함축적으로 다듬을 필요가 있다.

「표류」는 사건을 유연하게 전개해나가는 개연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그러나 단순하며 전형적인 캐릭터 구축이 아쉬웠고 결말에 이르는 주제가 기존의 익숙한 작품들을 연상시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또한 분량이 공모 규정보다 많아 감점 요소로 작용했다.

결국 두 심사위원은 「돌연변이 고래」 「집 앞 단골 구멍가게 낙타 아저씨를 훔치는 방법」을 최종 선정대상으로 두고 논의를 거듭하였다.

「집 앞 단골 구멍가게 낙타 아저씨를 훔치는 방법」은 제목부터 호기심을 유발시켰다. 구멍가게 낙타 아저씨를 훔치고자 하는 이유가 그 아저씨의 삶이 좋아 보였기 때문이란 설정과 도둑1과 도둑2의 대사가 흥미로웠다. 이야기를 신선하게 끌고 가는 패기가 돋보였으나 후반부로 갈수록 밋밋한 전개가 힘을 떨어뜨렸고 결말이 기대에 못 미쳐 아쉽게 느껴졌다.

「돌연변이 고래」는 ‘고래 전문 장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인간의 캐릭터가 흥미로웠다. 냉장고 안에 웅크려 있던 자미란 인물과 인간이 주고받는 대사가 자연스러웠으며 사건의 전개와 서술이 지나치지 않고 매끄러웠다. 장면 속에 인물과 의미를 녹여내며 아동폭력이라는 다소 무거운 소재를 불편하지 않게 상징적으로 담아낸 점을 높게 평가하였다.

결국 최종 당선작으로 「돌연변이 고래」를 선정하기로 하였다. 두 심사위원은 일치된 마음으로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데에 동의하였음을 특별히 밝힌다. 자신의 시선을 유지하며 극작가로 꾸준히 성장해 나아가길 기대한다.

윤미현 정범철

 

 

 

당선소감

 

아주 어릴 적, 홀로 어두운 방 안 구석에 앉아 현실과 꿈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했었습니다. 제가 느끼고 감당해야 했던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깊고도 어두컴컴한 바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줄다리기는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홀연히 사라질 줄만 알았던 이 아이는 여전히 제 안에 웅크려 앉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아이를 기어코 외면하였고 그렇게 몸만 어른이 되어버린 ‘불안을 품은 아이’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저는 늘 ‘불안’이라는 감정을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회피하기만 했습니다. 눈을 가린 채 이 아이를 잊어보려고 했으나, 그러기에 저는 너무나 나약했습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꿈속에 잠식되어 빠져나오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꿈은 저의 정신과 육체를 아득한 바다로, 심연 끝으로 빨려 들어가도록 만들었습니다. 꿈은 저를 구원해주지 않았고 오히려 현실을 텅 빈 모래사장으로 만들어 황망함을 남겼습니다. 저는 현실을 되찾기 위해, 어쩌면 살아보기 위해, 꿈속에서 빛을 향해 헤엄을 쳤습니다. 그 시작이 바로, 글이었습니다.

글을 한 글자씩 적어 내려가며 이 아이를 마주할 수 있는 찬란하면서도 단단한 용기가 생겼습니다. 만약 제가 쓴 글이 누군가의 어둠을 걷히게 할 수 있다면, 저는 그 어둠으로부터 항해를 시작하는 작가가 되겠습니다.

 

최고보다는 최선에 대한 믿음으로 제 곁을 묵묵히 지켜주신 아버지, 가는 길마다 희망과 환희의 꽃을 심어주신 어머니, 언제 어디서든 저의 손을 꼭 잡아주며 행복과 슬픔 모두 다독여주었던 언니, 저에게 깊은 가르침을 주신 서울예대 교수님들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부족한 저의 글을 좋게 봐주시고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큰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제 자신을 믿고 빛을 담을 수 있는 글을 쓰도록 끝까지 이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윤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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