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문정연

문정연 文禎連

1974년 부산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4학년.

quszuy@hanmail.net

 

 

 

 

사육제1

 

 

 

  가까운 미래의 어느 하루.

  예전에는 클럽으로 쓰였던, 지금은 딸과 어머니, 이모가 함께 사는 집.

나오는 사람들  딸(20살 전후의 소녀), 어머니(딸의 어머니), 이모(어머니의 언니), 남자(스무살 전후의 청년), 낯선 남자, 군복을 입은 남자들.

 

무대: 왼편에 작은 무대가 있다. 뒤편 오른쪽에 작은 창 하나, 그 옆에 매우 작은 출입문이 있다. 안쪽의 움푹 들어간 공간에 거울이 달린 화장대, 중앙에 매우 큰 괘종시계가 있다. 오른쪽으로 나가면 부엌, 왼쪽으로 나가면 침실이다.

배경: 지금은 전쟁중이다. 이 전쟁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 희곡의 인물들에게 전쟁은 ‘일상’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전쟁이 끝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1장 오후

 

(지직거리는 라디오 방송이 흐른다. 이모, 커다란 식탁을 밀고 들어와 무대 중앙에 고정시킨다. 거구의 비만형이며 도수 높은 안경을 썼다. 어머니, 느릿한 걸음걸이로 들어와 거울 앞에 선다. 이모, 식탁보를 가져와 깐다. 가슴께가 불편한 듯 몸을 비비적댄다. 음식이 든 접시를 하나씩 날라온다. 식탁엔 갖가지 음식이 차려진다. 어머니, 몽롱한 시선으로 거울을 바라본다.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관능적으로 고개를 젖혀보곤 한다.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어 오래도록 바라본다. 보이지 않는 입 저 안쪽까지 비춰보려다 구역질을 한다. 다시 여러가지 표정을 지어본다. 음식을 다 차린 이모는 식탁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다. 앉기 전에, 팬티가 엉덩이에 끼여 불편한 듯 손가락으로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린다. 이 행동이 진행되는 동안 라디오 방송은 계속되고 있다.)

라디오 (신경을 거스를 정도의 깨끗하지 못한 음질이다. 단조롭고 건조한 음성) 53-1345, 65-7821, 32-3891, 44-9773…… 이상은 오늘 오전 신병소집에 불응한 자들입니다. 위 신병들에 한해 소집시한을 12시간 연장하였으니 지금 즉시 가까운 군부대로 도착해주기 바랍니다. 기한을 넘긴 신병들은 전시군사동원법 제3조 병역기피 및 도피죄에 의거 즉결처분됩니다. (사이) 다음은, 지금 이 시각 전투상황입니다. (종이를 뒤적이는 소리) 1지역, 어제에 이어 작전 129호를 진행중입니다. 민간인 통행금지령이 발효되었으니 참고 바랍니다. 2지역, 새벽 전투에서 적군의 로켓포 부대를 완전 제압, 분쇄하였습니다. 3지역, 접전지역 민간인에 대한 식량배급을 위해 쌍방간에 24시간 휴전이 합의되었습니다. 4지역, 끈질긴 탐색 끝에 은폐된 적의 무기수리 공장을 발견, 기습하여 다수의 장비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5지역……

(멀리서, 긴 폭격음이 울린다. 이모, 창밖을 잠시 내다본다. 폭격의 진동으로 전파가 잡히지 않는 라디오를 끄고 앉는다. 불안한 표정으로 블라우스 단추를 풀고 가슴을 싼 헝겊을 꽉 죈다. 헝겊 아래로 손가락을 넣어 긁어대다가 블라우스 단추를 잠근다. 어머니는 느릿하게 식탁 앞으로 와 음식냄새를 맡는다.)

이모 오늘따라 폭격이 요란한 것 같지 않니?

어머니 (창밖을 힐끗 보곤) 글쎄…… 어제는 어땠는지 잊어버렸는데.

이모 근데 너, 왜 오늘따라 궁둥이를 실룩거리면서 걷는 거지?

어머니 (언짢아서) 함부로 내 마음을 알아맞히려고 하지 마, 언니.

이모 아, 미안해. 알잖니. 난 네 딸이 애인을 데리고 오는 날이면 괜히 긴장이 된단다.

어머니 (음식냄새를 맡으며) 음…… 잘도 차렸네. (잠시 후 이모의 가슴을 가리키며) 왜 그렇게 납작해?

이모 (무릎 위에 책을 올린 후, 목을 빼고 내려다본다.) 더이상 커지면 책을 가릴 것 같아. 젖가슴만 너무 큰 기형적인 여자가 되는 건 정말 큰 불행이야. (어머니, 미소짓는다.) 네 딸내미가 데려오는 남자들은 언제나 내 가슴을 향해 환호성을 질러댔지.

어머니 (거울 앞으로 다가가며) ……그랬었나.

이모 (다급히) 물론, 사랑한 건 너였지만 말이야!

(어머니, 미소짓는다.)

이모 (주먹을 쥐어 입을 막으며) 큭큭큭. (비밀스럽게) 네 딸내미의 애인들이 사랑한 건 결국, 너였지.

어머니 (거울을 바라보며) 가슴 아픈 일이야. 내 딸이 매력 없다는 건……

이모 그애가 아주 매력이 없는 건 아니야. 이렇게 금방 새 애인을 만들어 소개시키는 걸 보렴. 네 피가 섞인 네 딸인 게지.

어머니 난 내 딸을 사랑해. 그애가 불행해지는 건 싫어.

이모 그건 모든 엄마들의 바람이란다. 엄마들은 딸을 사랑하면서 행복을 느끼지. 나도 만약 딸을 낳을 수 있었다면……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그렇게 많은 아들을 낳을 게 아니라…… 아, 넌 또 내 상처를 건드리는구나. 왜 아들은 모두 남자일 수밖에 없는 거지? 내 아들 중의 단 한명이라도 여자였다면! 그랬다면, 난 이렇게 외롭지 않을 텐데……

어머니 사라진 남자들 생각은 그만 해. 그 대신 언니는 닭고기를 무척 사랑하잖아.

이모 (쿡, 웃는다. 식탁을 바라보며) 오늘도 손님을 기다리는 식탁 위에 닭고기를 올렸어. 내가 가장 아끼는 접시에 담았지. 이 오돌오돌한 껍질을 까고 가느다란 실처럼 갈라지는 분홍색 살결을 보렴. (사이) 네 딸은 어떻게 이런 걸 질색할 수가 있니?

어머니 그애가 그렇게 멍청한 건 통조림만 뜯어 먹어서야.

이모 하긴, 먹는 것과 안목은 큰 상관이 있다고 하더군. 걔가 데리고 오는 남자들을 보면 정말 기가 차잖니. 네 딸은 어쩜…… 네 딸은 어쩜 그렇게 희한한 놈들만 고르는 거니? 하하하, 하하하. (벌떡 일어나서 엉덩이 부분의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린다.)

어머니 아아,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건…… 왼쪽 넷째손가락이 없는 남자였어.

이모 그래도 그 남자가 제일로 괜찮았지. (어깻죽지를 가리키며) 여기에 훈장이 주렁주렁했잖니. 손가락이…… 아홉 개나 있었지.

어머니 ……그랬었나.

이모 (무대로 올라가) 널 사랑했던 남자들을 기억해보렴. 네가 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때 말이야. 우리집은 날마다 남자들로 가득 찼었지. 그때 가장 멍청했던 놈도 네 딸이 데려온 애인들보다는 봐줄 만했어.

(어머니, 시계를 쳐다본다. 째깍째깍, 희미하게 시계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이모 옛날이 좋았다는 말이 있잖니. 꼭 맞는 말이야. (사이) 기억해? 한때 넌 너무나 아름다웠지. 네 딸이 애인들에게 다리를 벌릴 만큼 활짝 피기 전에는 말이다.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흐르기 전에는……

어머니 무슨 소리지?

이모 무슨 소리라니?

어머니 아, 미치겠어. 이게 무슨 소리야?

(멀리서 짧게 울리는 총성. 갑자기 불이 깜빡거리다 정전이 된다. 고요한 가운데 시계소리만이 울린다.)

이모 (어둠속에서) 정전이네.

어머니 아, 미치겠어. 언니, 이게 무슨 소리야? 아아, 내 심장 좀 봐. 너무 빨라. 너무 빨리 뛰잖아.

이모 너는 너무 예민해. 넌 너무 예민하단다.

(불이 깜빡이다 다시 환하게 켜진다. 시계소리 사라진다.)

어머니 (시계 앞으로 급하게 가서) 그애가 태엽을 감은 거야?

이모 (시계를 보며) 종이 네 번 울릴 때쯤 새 애인을 데리고 온다고 했지.

어머니 (거울 앞으로 가며) 쓸데없는 시계소리…… 시끄러워.

이모 살짝 예민한 성질이 남자들한텐 더 매력적인 법이지. 넌 태어날 때부터 그걸 알고 있었던 거야.

어머니 올 때가 됐어?

이모 왜 아직 안 올까? 혹시 길거리에서 나뒹굴고 있는 건 아니겠지? 길엔 죽어버린 사람들 천지야. 그 사람들이 풍기는 악취를 난 죄다 기억한단다. 우, 기억이란 놈은 날 평생 쫓아다니며 불행에 빠뜨려. 봐라, 그놈 때문에 내 골통이 이렇게 흔들리고 있잖니. (사이) 나가서 보고 올까?

어머니 그앤 쓸데없는 상상을 하느라 총을 맞을 시간도 없어.

(괘종이 울린다. 땡, 땡, 땡, 땡.)

어머니 (귀를 막고) 아아, 난 저 소리를 믿을 수 없어.

이모 그렇다면, 네겐 종이 울리지 않은 거야. 사실이란 결국 네가 믿는 만큼일 뿐이라고 내가 몇번이나 읽어줬잖니.

(크게 문 두드리는 소리.)

어머니 (거울에

  1. ‘사육제(謝肉祭)’는 고기가 금지되는 신성한 사순절 기간이 오기 전에 마음껏 고기를 먹으며 즐겁게 노는 풍습에서 기원한 축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