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박한솜
서울예대 극작전공 3학년. 1996년생.
hansom11@naver.com
스파링
작의
‘전과자의 자식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라는 짧은 유튜브 영상이 이 작품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원치 않는 프레임이 씌워진 채로 타인에게 오해를 받는 경우가 많다고 느낀다. 요즘 사회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한 사람에게 키워드를 심어놓고, 그 사람의 진심이나 노력, 일상을 들여다보기보다 그에 따라붙는 수식어가 전부인 것처럼 한 사람을 매장시키는 경우가 많다. 다양한 사회현상을 보면서, 특히 자신이 원치 않은 프레임이 씌워진 채로 학창 시절을 보내게 되는 아이들은 삶 속에서 어떠한 선택을 하는 과정마저도 모두 링 안에서 스파링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의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등장인물
최예리(17세, 여): 체육특기생으로 경찰대를 목표로 두고 있다. 복싱 선수권대회를 준비하면서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만능인 모범생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한 이후에 아빠와 단둘이서 생활하고 있다. 종종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가정사를 꾸며내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스파링 상대이자 단짝인 수아에게만은 이상하게도 진심을 자주 내비치게 된다.
정수아(17세, 여): 소년체전에서 순위권에 들 만큼 여자 복서 유망주로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폭행, 사기로 실형 3년을 살고 나온 전과자 아버지를 두고 있어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엔 항상 장벽이 존재한다. 복싱 챔피언이 되어 자신을 옭아매는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소심한 성격이지만 유일하게 예리에게만은 속마음을 털어놓곤 한다.
김성진(38세, 남): 과거 복싱 챔피언으로 활약했지만, 그것도 옛말이다. 지금은 전남의 한 고등학교 복싱부의 계약직 코치이다. 아이들의 모습에 안쓰러움을 느끼며 흔들리지만, 자신의 생계가 걸려 있는 일이기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한다.
박태성(43세, 남): 전남의 고등학교 복싱부 감독. 지독한 꼰대 마인드에 냉철하게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기타 인물: 수아 부(父), 경찰 등
무대
무대의 사면에는 복싱장의 링을 연상할 수 있는 펜스가 쳐져 있다. 펜스 밖은 복도로 나뉘어 있다. 무대는 스파링 연습장이 되기도, 학교 상담실이 되기도, 각자의 집이 되기도 한다.
1장. 링 안
무대가 밝아지면 예리와 수아는 가드를 올리고 스텝을 밟으며 공격 타이밍을 살피고 있다. 두 사람이 천천히 발을 구를수록 낮은 베이스 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 퍼지고 둘은 박자에 맞춰 서로의 빈틈을 노린다. 공격과 방어를 하는 둘의 모습이 반복된다.
그때, 신경질적인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고 링 안으로 성진이 등장한다.
성진 그만, 그만. 둘 다 정신 안 차려? 대회 얼마 안 남은 거 몰라?
예리와 수아, 올렸던 가드를 동시에 내리고 숨을 몰아쉰다.
성진 정수아, 내가 복싱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라고 했어?
수아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수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성진 최예리, 그럼 그 수를 파악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
예리 (장난치며) 상대방의 심리 파악? 정수아는 INTP고, 저는 ESFJ니까 그건 이미 제가 이길걸요? T는 사고, F는 감정이니까. 제가 공감 능력이 더 높아요!
성진 뭐가 어쩐다고? 지금 장난이 나와? 다시. 수를 파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예리 그야, 상대방의 수를 먼저 파악해야죠. 공격이 들어오는 것을 읽고, 그전에 펀치를 딱! 수비하려고 가드를 올리기 전에 펀치를 딱! 코치님, MBTI 몰라요? 그 말이 그 말인데……
예리의 계속되는 장난에 수아가 피식 웃는다.
성진 이것들이 스파링 상대로 붙여놨더니, 절친노트 찍고 앉아 있네.
예리 아, 왜요. 스파링 상대끼리는 친한 것도 안 돼요?
수아 (웃음을 참으며) 죄송합니다. 예리가 계속 웃겨서……
성진 정신 차려라. 복싱은 신경전이다. 상대보다 공격이 늦으면 그땐 이미 네 정신이 케이오(KO)된 후란 말이야. (사이) 내가 죽기 전에 상대를 먼저 죽여야 돼. 알아들었어?
성진의 말에 두 사람, 고개를 푹 숙이고 숨만 몰아쉰다.
성진 대답 안 해?
수아 네. 알겠습니다.
성진 최예리, 경찰대 가고 싶다며? 왜 답이 없어.
예리 (마지못해) 알겠어요.
성진 그럼 오늘은 해산. 둘 다 곧 대회 접수인 거 알지?
예리, 기다렸다는 듯 바닥에 털썩 누워버린다. 수아 역시 성진의 눈치를 잠깐 보다가 바닥에 앉는다.
성진, 링 밖에서 수건 두장을 집어 들더니 갑작스럽게 수아와 예리에게 던진다. 순발력으로 곧바로 잡아드는 수아와 달리 누워 있던 예리의 얼굴에는 그대로 수건이 날아와 꽂힌다.
성진 (피식 웃으며) 이거 하나 제대로 못 잡으면서 복싱이나 할 수 있겠냐?
예리 아이씨, 코치님!
성진 씨? 이게 코치한테 씨씨거리네, 이제.
예리 (가방에서 음료수를 꺼내며) 비타민 씨가 가득한 에너지드링크를 꺼내려고 했죠. 미리 챙겨오는 센스~ 복싱의 기본, 이해와 배려랄까요?
성진 (음료수를 받아들며) 얼씨구. 링 아래로만 내려오면 아주 장난이 치고 싶어 미치지?
예리 옜다. 스파링 파트너, 너도 먹어라.
수아 (웃으며) 땡큐.
성진, 가방에서 종이 두장을 꺼내 수아와 예리에게 건넨다.
성진 이제 슬슬 접수해야지. 부모님한테 보여드리고, 참가신청서 싸인 받아와라.
예리 오. 진짜 접수하고 나면 이제 하루 종일 붙어 있어야 하는 거예요?
성진 학교에선 이미 이야기 끝났고, 특별훈련에 들어갈 거다. 각오해야 돼. 예리는 첫 출전이고, 수아는…… 말 안 해도 기대하고 있는 사람이 많으니까, 알고 있지?
수아 (기대감에 상기된 얼굴로) 네, 열심히 할게요.
예리 아니, 나가는 건 두 사람인데 왜 응원은 수아만 해줘요? 너무하네.
그때 감독인 태성이 무거운 표정으로 등장한다. 성진, 가볍게 인사를 하고 수아와 예리 역시 링 안에서 일어나 인사를 한다.
성진 감독님. 연락도 없이 어쩐 일로……
태성 거…… 대회 출전 말인데.
성진 (웃으며) 오늘 신청서 나눠줬습니다. 애들도 열심히 하고 있고 이번에는 꼭 성과가……
태성 정수아 학생은 보류를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수아, 그 말에 당황하며 종이를 꽉 쥔 채로 태성을 바라본다.
성진 예? 아니, 수아가 우리 학교에서 제일 유망주인데……
태성 (수아의 눈을 피하며) 유망주고 뭐고, 괜히 구설수가 있을 수 있으니까…… (작게) 어차피 그 아버지에 그 자식일 텐데……
수아 네? 저희 아버지는 왜……
태성 거…… 뭐야. 정수아 학생 아버지가 빨간 줄도 하나 있지? 폭행이었나.
수아, 그 말에 짐을 챙기지도 않고 링 밖으로 뛰쳐나간다. 예리는 수아의 짐까지 챙겨 그 뒤를 따라간다. 성진, 안절부절못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태성 거…… 김성진 코치님. 부임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몰랐을 수도 있는데, 정수아 학생 아버지가 전과자입니다.
성진 (당황하며) 아니 음, 저 감독님, 아이가 저지른 범죄가 아니면 선수권대회에 참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수아도 열심히 하고 있고……
태성 (한숨 쉬며) 그러니까 내가 입학 때부터 반대를 했는데…… 그나마 폭행이면 모른 척 참가시키죠. 그만한 실력도 있으니까.
성진 그럼 대체 왜……
태성 살인자 자식이 우리 학교에서 복싱하고 있다 그러면 이미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승을 해도, 우승을 못해도 학교에 좋을 게 없다니까요.
성진 (당황하며) 살…… 살인이요?
태성 아직은 용의자지만…… 전과가 있잖습니까. 자긴 절대 아니라고 한다는데 그걸 누가 믿겠습니까?
성진, 한숨을 크게 쉬더니 태성을 천천히 바라본다.
성진 아직…… 용의자고, 확실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왜 애가 그 피해를……
태성 이미 소문 다 퍼진 마당에, 살인자 딸내미가 사람 때리는 운동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성진 복싱은 사람을 때리는 게 아니라! 엄연한 스포츠입니다.
태성 (비웃으며) 거…… 낭만적으로 말하네.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 거 같아요? 이번에는 예리 학생만 나가는 쪽으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