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희망 속의 진통

 

 

지난 한해 우리 한국인들은 희망의 승리를 거듭 맛보았다. 그리고 이는 기상예보하듯 하는 방관자의 소망이 아니라 시련을 견디며 다중의 힘을 모아 지켜내고 일구어낸 것이기에 헛된 꿈과 구별되는 참 희망이었다.

새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대다수 국민이 새로운 희망에 차 있는 오늘, 시련과 진통 또한 계속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북핵문제를 둘러싼 위기상황이 심각하다. 노무현 정권의 탄생은 우리가 미국한테 잘못 보이면 어쩌나, 이북과 화해하려다 거꾸로 당하면 어쩌나 하는 공포심을 이겨낸 희망의 승리이자 한반도의 평화를 우리 힘으로 지키겠다는 결의의 표시였다. 그러나 아직은 한반도의 운명을 온전히 결정할 실력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냉엄한 현실이다. 미국은 미국대로, 북은 북대로, 우리가 설득한다고 순순히 들어주는 상대가 아니며 도대체 합리적 설득의 대상인지조차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도 앞날은 안갯속이다. 평화적 해결을 한다 한다 그러면서 정작 해결을 않다가 어느새 전쟁의 불길에 휩싸이고 말 가능성이 상존하는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작년 한해동안 거듭 확인했던 주체적 역량을 한껏 동원하여 한반도 평화의 수호에 몰두해야 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바로 대북관계·대미관계의 문제에서 지금 우리 사회의 기운이 제대로 모이지 않고 있다. 특히 대북비밀지원금을 둘러싸고 정치권은 대립과 혼전의 양상이며, 국민 다수가 불안과 분노와 곤혹감이 뒤섞인 감정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국민여론의 분열과 표류는 국내 수구세력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고, 바깥에서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려는 세력이 파고들 틈새를 열어놓기도 한다. 대통령 당선자로서는 취임을 앞두고 내우외환(內憂外患)을 맞은 형국이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가 온전한 생각으로 새 출발을 기약할 좋은 기회가 아닐까 한다. 무엇보다도 대북지원 사실이 쟁점이 됨으로써 지원 자체는 누가 뭐라 하든 대다수 한국민에게 월등히 득이 되었다는 상식을 터놓고 확인할 계제가 주어졌다. 한반도의 안정과 긴장완화로 인해 한국경제가 얻은 소득이 엄청난 액수에 달했으려니와, 수십년 동안 헤어졌던 가족끼리의 만남이라든가 드높아진 민족적 긍지 같은 효과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혜택이 아닌가. 이런 성과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알고 행여나 그것이 손상될까 걱정하는 마음이 없다면, 법치주의와 국민의 알 권리 등 그 무슨 훌륭한 명분을 내세워도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할 것이다.

다만 이 성과의 대표적 공로자인 대통령 자신이, 국민들은 그러니까 고맙게나 알고 이 문제일랑 덮어버리자고 말하는 것은 온당한 해결책이 아니다. 그의 재임중에 국민과 민족에게 이득이 못되면서 그냥 비밀스럽기만 했던 일이 너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매사에 투명성과 대중의 참여폭을 확대하려는 것이 오늘의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꼭 덮어야 할 대목은 국민을 설득해서 공개를 미루더라도, 명백하게 속였던 점이나 불법한 행위에 대해서는 어쨌든 국리민복에 크게 기여했다는 자신감을 갖고서 인정하며 진솔하게 사과하는 선례를 남겨야 한다. 지난해의 경험들은 이런 고해(告解)조차 외면할 우리 국민이 아님을 너끈히 말해준다.

야당도 대북비밀지원을 환골탈태 없는 기사회생의 찬스로 볼 일은 아니다. 지난날의 서독정부는 동독에 훨씬 더 큰 규모의 지원을 했으되 야당을 포함한 국민적 합의에 근거했었다고 비판의 목청을 높여대지만, 한국의 야당이 과연 남북화해를 초당적으로 지원하고 추진할 태세가 되어 있었던가. 오히려 한반도의 긴장을 부추기는 미국 보수세력의 국내 교두보 역할을 한 바는 없었는가. 대통령의 초법적 처사를 규탄하지만, 합법적 남북교류의 최대 걸림돌인 국가보안법을 개폐하자고 할 때 앞장서서 반대한 것이 누구였던가. 거대야당이 자신들의 다짐대로 ‘합리적 보수’로 거듭나서 남북화해사업의 한 주체로 자리잡으려면 그들 또한 고해하고 참회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무튼 오늘의 진통은 다시금 우리의 희망을 시험하며 실력과 성의를 저울질하고 있다. 나 자신의 신념으로 말한다면, 고난의 20세기를 거쳐 여기까지 온 한반도 주민과 한민족 성원들이 21세기를 새로운 재앙의 세기로 시작하지는 않으리라 굳게 믿는다.

 

『창작과비평』의 현황은 초창기의 어려움이나 정권의 탄압에 시달리던 7, 80년대에 비해 한결 나아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결코 진통 없는 안일로 떨어지는 일은 없어야 된다는 것이 창간 37주년을 맞은 편집진 전원의 다짐이다.

자기쇄신의 노력이 이번호에 얼마나 반영되었는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노력 자체가 아직 미흡하거나 결실에 시간이 걸리는 면이 있는가 하면, 창비다운 한결같음을 위해 외견상의 변화를 일부러 한정한 바 또한 없지 않다. 겉보기에도 바뀐 것 한가지는 ‘독자의 목소리’가 2단 조판의 초라한 행색을 벗었다는 점인데, 작은 변화지만 독자들의 직접 참여에 더 큰 무게를 두겠다는 편집자들의 마음가짐의 한 표시이다. 비슷한 의도로 ‘현장통신’도 이번부터는 청탁원고보다 (인터넷 등을 통해 홍보한 바 있는) 자발적인 현장보고 위주로 꾸몄다. 결과는 두 분야 모두 일단 성공이라 자평하며, 호를 거듭할수록 활기가 더해지기를 기대한다.

특집을 비롯하여 문학 분야가 유달리 풍성한 것은 창비로서 당연한 모습에 불과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에도 편집진의 조용한 결심이 담겼으니, 앞으로 다른 분야에서 특집을 하더라도 문학에 특집 못지않은 공력을 쏟음으로써 ‘정론지’이자 ‘문학중심지’라는 창비 고유의 성격을 살려나가겠다는 것이다. 이번 특집 ‘지구시대 한국문학의 안과 밖’은 두어 가지 기획이 불발함으로써 의도했던 성과에는 못 미쳤지만, 게재된 네 편의 평론이 모두 오늘날 우리 문학, 나아가 세계문학의 중요한 쟁점을 건드렸다고 믿는다.

최원식의 「민족문학과 디아스포라」는 한동안 창비 지면에서조차 뜸하던 민족문학 논의를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제기한다. 주로 “통일된 국민국가/국민문학의 건설을 목표로” 삼았던 그간의 민족문학운동에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이 과정에서 소홀히되었던 탈국민국가적 문화공동체로서의 한민족공동체와 그 문학을 향해 “열린 문화코드로 접근”하는 민족문학론의 확장을 꾀한다. 동시에 그러한 민족문학론의 실천으로서 해외동포 작가들이 내놓은 근년의 문제작들을 섬세하게 읽어내고 있다. 유희석의 「최근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에 관하여」는 제목 그대로 우리 평단에서, 특히 본지 114호 임규찬의 문제제기 이래 활발히 진행되어온 논쟁에 생산적인 기여를 더해주며, 한기욱의 「우리 시대의 사랑·성·환경 이야기」는 신경숙과 공선옥의 작품세계를 꼼꼼히 분석하면서 일견 극도로 대조적인 두 작가 사이에서 뜻밖의 상통성을 찾아내기도 한다. 번역논문 「지구시대의 비교문학과 영어의 지배」는 한국문학과 직접 관련된 내용은 아니지만 세계화에 대한 안이한 인식과 문학연구의 관념적 자세가 지닌 함정을 일깨워주는 점에서 특집에 넣음직하다고 판단했다.

특집과 더불어 이번호의 자랑은 창작의 풍요다. 특히 대산문화재단과 공동으로 주관한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작들이 포함되어 풍성함과 신선미를 더해준다. 동시에 기성작가들의 기고도 다채롭다. 시에서는 원로 김종길, 전승묵에서 중견 신대철, 권지숙을 거쳐 박형준, 정세기와 창비신인상으로 등단한 최금진에 이르는 여러 분이 등장하며, 단편소설로는 송기원, 정지아, 천운영, 권채운이 모두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현기영이 야심적인 새 장편에 착수함을 계기로 창비로서는 오랜만에 장편연재를 하게 되었는데, 나 자신은 교정지로 읽으면서 첫회부터 몰입하는 경험을 했다. 고은의 「개념의 숲」은 여러 나라 지식인들을 망라한 독특한 국제적 기획의 산물로서, 주어진 개념어들을 놓고 산문과 운문을 넘나들며 특유의 분방한 사유를 펼친 이 작업을 편집자는 ‘단상록(斷想錄)’으로 분류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문학에 큰 비중을 둠으로써 얼마간 소홀해진 이번호의 정론적 면모는 홍세화·박태견·유재건의 좌담이 집약적으로 감당해준다. 「노무현정부의 출범, 그 의의와 과제」라는 제목 자체는 요즘에 흔하다면 흔한 것이다. 그러나 노후보의 당선으로 정점에 이른 지난해 일련의 극적 사건들과 김대중 정권의 공과에 대한 평가, 새 정부가 처한 상황과 주요 개혁과제 등을 차분히 짚어가는 세 분의 좌담은, 변화에 대한 시대적 요청에 공감하는 가운데서도 조금씩 입장을 달리하는 논자들의 격의없는 대화이기에 비슷한 수많은 토론들 사이에서 독자성을 내세울 수 있으리라 본다.

이번호에 ‘서평’이 사라졌음을 눈여겨보시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실은 이것도 편집진이 선택한 조그만 변화 가운데 하나다. 앞으로 ‘평론’을 강화하고 ‘촌평’을 더욱 알차게 꾸미는 대신, 그간 다소 어중간한 위치에 있던 서평란을 생략하기로 한 것이다. 

촌평은 몇해 전에 신설한 이래 본지가 꾸준히 정성을 들여온 분야인데, 실은 지금도 꾸려나가기가 여간 어렵지가 않다. 아직도 촌평 청탁을 탐탁찮게 여기는 필자가 적지 않거니와, 흔쾌히 수락하더라도 만만찮은 공력과 솜씨가 요구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번호부터는 네 분 정도의 고정필자에게 일정기간 연속집필을 의뢰함으로써 촌평란의 안정과 활력을 도모키로 했는데, 염무웅, 박영근, 김종엽, 이필렬이 그들이다. 여기에 이호철, 서영인, 김태수의 소설평들과 한국 및 동아시아 현대사의 아픔을 상기시키는 이영호, 정근식의 글들, 일부러 마지막에 배치한 송재소의 차 이야기 등이 이어졌다. 촌평과 함께 성석제와 김지영의 문화평, 그리고 새만금 문제를 개관한 신혜경의 시평도 독자들이 편하게 읽을 분량이며 내용이다.

 

끝으로 죄송한 말씀 하나. 이번호를 계기로 본지는 그동안 오래 미뤄왔던 정가인상을 단행했음을 알린다. 독자 여러분의 부담이 늘어난 데 대해서는 더욱 알찬 내용으로 보답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며, 필자들의 원고료도 차제에 약간 인상했다. 또한 ‘정기구독자 대모집’ 특별기간을 두어 이 기간에 신청하는 분들께는 종전 구독료를 적용하면서 여러가지 특전도 베푼다는 회사측의 귀띔을 전해드린다.

많은 호응이 있으시기를 간곡히 바라는 뜻에서 한두 마디 덧붙인다. 앞서 창비가 정론지와 문학중심지를 겸한 그 본연의 특성을 견지하겠노라고 말했는데, 오늘의 시류는 정론지가 아닌 상업지라야 잘 팔리고, 문학을 타분야와 연관지어 폭넓게 다루기보다 일종의 매니아층에 호소하는 잡지를 해야 더 순조로운 세상이다. ‘정론지 겸 문학중심지’를 표방한다는 것은 따라서 이중의 가시밭길을 택한 꼴이다. 그러고서도 창비가 국내 계간지로서 독보적인 자리를 지키고 있음은 물론, 외국의 문학인과 지식인 들이 놀라며 부러워하는 부수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일차적으로 독자들의 열렬한 성원 때문이요, 더 넓게는 한국사회 특유의 활력이 작용한 덕이다. 위태로운 시국을 맞아서도 우리가 또 한번 희망의 승리를 이룩하리라는 믿음을 갖는 것도 개인적으로 이런 성원과 활력을 수십년째 체험하며 살아왔기 때문임을 감히 말씀드린다. 이 은혜를 가볍게 여기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白樂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