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유진

김유진 金柳眞

1981년 서울 출생. 2004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늑대의 문장』이 있음. enenfer@empal.com

 

 

 

희미한 빛

 

 

L의 여자친구는 거실 한가운데 서서 몸을 반으로 접고 있었다. 그녀의 두 팔이 원숭이의 것처럼 길게 늘어졌다. 이마가 정강이에 붙었다. 마르고 단단한 등, 튀어나온 목뼈와 척추를 중심으로 잎맥처럼 갈라진 근육이 보였다. 그녀는 등이 깊게 파인 레오타드에 몸매가 드러나는 씰크팬츠를 입고 있었다. 내 발소리를 듣고는 허리를 곧게 펴 몸을 일으키며 좋은 아침,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인사에 답하지 않았다. 오늘은 좋은 아침이 아니었고, 내 거실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신체의 어느 부위에서 나오는지 알 길 없이 거실 전체에 울리는 숨소리도 거슬렸다. 나는 이 모든 적대감을 숨김없이 얼굴에 드러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의 표정에 영향받지 않았다.

나는 펼쳐져 있는 접이식 쏘파와 그 위에서 잠든 L의 뒤통수를 지나쳤다. 현관 입구에 세워둔 그녀의 자전거 바퀴에서 떨어진 흙먼지로 더러워진 거실바닥을 노려보았다. 어젯밤에 비가 왔거든. 그녀의 목소리는 밝고 친절했다.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에서 맥주캔 하나를 꺼냈다. 찬장에서 캐슈너트와 아몬드가 든 유리병을 집어들었다. 크고작은 접시들, 찌그러진 맥주캔 네개, 화이트와인과 레드와인 각각 한병, 와인잔 네개, 머그컵 두개, 숟가락과 포크, 티스푼 한쌍이 개수대와 그 주변에 널브러져 있었다. 먹다 남은 올리브와 감자 부스러기가 배수구를 틀어막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 부엌을 빠져나왔다. L의 여자친구는 바닥에 드러누워 두 다리를 높이 들어올리는 중이었다. 어깨로 몸을 버티고는 허공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바닥과 수평이 된 두 다리의 무릎을 양팔로 받치고는 균형을 잡았다. 통 넓은 바지가 커튼처럼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나는 맥주 한캔으로 지난밤의 불면을 종결짓길 원했다. 블라인드를 쳤으나 햇빛은 틈을 비집고 기어코 방안으로 들이쳤다. 캐슈너트 세개를 한꺼번에 입안에 집어넣었다. 깊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방안까지 퍼졌다. 나는 그녀의 뱃속에 갇힌 것만 같았다.

 

잠에서 깨어난 L이 곧장 달려간 곳은 화장실이었다. L의 여자친구는 이미 집을 떠나고 없었다. L은 손끝에 물을 묻혀 머리를 대충 정리했다. 그는 자신의 방과 면해 있는 부엌으로 가 맥주잔에 우유를 따라 단번에 마셨다. 그것이 그의 숙취해소법이었다. 잔은 여전히 씻지 않은 채 조리대에 올려두었다. 거실로 돌아와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담배를 꺼낸 L은 라이터를 찾아 주변을 뒤적거렸다. 이내 다시 부엌으로 가 가스레인지로 불을 붙이고 돌아왔다. 두대를 연거푸 피웠다. L은 늘 창문 여는 것을 잊었다. 담배연기가 내 방으로 전해졌다. TV에서는 가정식 요리 프로그램이 이어지고 있었다. 진행자는 과일주에 졸인 돼지고기 요리를 배우기 위해 차를 타고 두시간가량 북쪽으로 이동했다. L은 탁자 위에 놓인 누렇게 뜬 금사철 화분에 꽁초를 비볐다. 금사철은 내것이었지만 L은 개의치 않았다. 나는 보지 않아도 L의 행동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각자의 방에는 문이 없었다. 우리는 모든 소음을 공유했다.

나는 L의 인기척에 잠에서 깬 뒤에도 침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L은 음량을 잔뜩 올렸다. 여자 아나운서의 격앙된 목소리가 집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L은 그 청량한 목소리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그것은 L이 규칙적으로 시청하는 유일한 TV프로그램이었으므로, 나는 싫은 내색을 하지 못했다. 6층짜리 아파트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집은 6층에 있었다. 아파트는 이 골목의 유일한 고층건물이었다. 창문을 열면 이웃 건물들의 정수리가 고스란히 내려다 보였다. 송전탑과 새집, 물탱크, 너저분한 살림살이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것은 이 집의 몇 안되는 장점 중 하나였다. 요리 프로그램이 끝나자 L은 TV를 끄고 다시 화장실로 들어갔다. 곧 샤워기의 물소리가 들렸다. L은 아르바이트로 관광가이드를 하고 있었다. 머리가 무거웠다. 입에서 단내가 났다.

 

나는 지하철 승강장에서 망연자실 서 있었다. 목적지와 반대방향으로 갈아탄 것이 벌써 세번째였다. 마지막으로 깨달았을 때에는 무려 열다섯 정거장을 지나친 후였다. 철로가 여섯개나 되는 야외승강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시의 중심부에서 다소 벗어난 역은 공기가 차가웠다. 매점에서 어묵국물의 비린내와 즉석빵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역명이 낯설었다. 나는 왼손에 들린 잡지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이 모든 허무맹랑한 실수를 잡지 탓으로 돌리고 싶었다. 시간을 확인했다. 지하철 노선도를 재차 확인하고 승강장 계단을 빠져나왔다.

반대쪽 승강장은 개찰구로 가로막혀 있었다. 교통카드를 인식기에 갖다대기 직전, 잠시 망설였다. 약속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 모든 번잡함이 허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고용지원쎈터 직원은 약속시간에 늦을 경우 번호표를 뽑고 무한정 기다려야 한다며 으름장을 놓았었다. 약속 날짜를 다른 날로 미루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교통카드를 든 손의 팔꿈치를 앞으로 밀었다. 떠밀리듯 교통카드를 찍고 나자 개찰구를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뒤돌아볼 틈도 없이 거구의 중년여자가 내 몸을 밀치고 지하철 계단으로 뛰어내려가고 있었다. 열차가 역사 안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음이 울렸다. 그러자 좀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의지와 상관없이 지하철 계단 바로 앞까지 떠밀렸을 때, 난간을 잡고 간신히 무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현기증이 일었다. 피가 정수리로 쏠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지하철 안은 수신상태가 나빴다. 고용쎈터 직원은 재차 이유를 물었다. 나는 몸이 아프다고 대답했다. 한번은 허리가 아프다고 했고, 나중에는 감기몸살이라고 둘러댔다. 직원은 짜증이 나 있었다. 그는 서류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창구 안을 우왕좌왕하는 실업자들과 번호표를 뽑지 않고 자신의 차례인 양 찾아오는 무례한 대기자들 사이에서 전쟁을 치르면서, 나에게 적절한 결석사유를 묻고 있었다. 그는 다음번 실업급여 교육일자와 준비서류를 빠르게 내뱉었다. 2주 뒤였다. 실직 후 6개월 이내에 신청하지 않으면, 이후 실업급여는 받을 수 없게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단순한 정보가 내 귀엔 게으름에 대한 질책과 협박으로 들렸다. 그는 내게 인사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통화종료를 알리는 메씨지가 휴대폰 액정화면에 깜박였다. 우리가 나눈 곤혹스러운 대화 시간은 1분 35초였다. 나는 불이 저절로 꺼질 때까지 가만히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지하철은 빛을 가로지르며 달렸다. 사방에서 쏟아진 미적지근한 햇빛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이내 스며들었다. 수명을 다한 빛은 무거웠고, 눅눅했다. 빛은, 찌들어 보였고, 먼지로 가득 찬 것만 같았다.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열차는 다리를 건넜다. 모호한 색의 강물, 멀리 오물처럼 물 위에 둥둥 떠밀려오는 노을, 구름 너머 V자 모양으로 일렁이는 철새 무리가 있었다.

 

오늘은 출장 온 아저씨들을 데리고 그 숲에 갔었어. 너도 이름은 들어봤잖아. 거긴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궁금해하니까. 그런 델 가야 비로소 돈을 만지는 거야. 물론 위험하지. 너도 알다시피, 가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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