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박민규 朴玟奎
1968년 출생. 장편소설 『지구영웅전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핑퐁』, 소설집 『카스테라』 등이 있음. kazuyajun@hanmail.net
눈이 흩
나렸다. 싸락눈이었다. 긴 담에 이어진 커다란 철문 너머로 작은 쇳소리가 찰칵, 했다. 사오십자(尺) 폭 문의 부피를 생각한다면 그저 사각, 언 땅 싸락눈 돋는 만큼의 소음이었다. 열린 것은 작은 쪽문이었다. 백발의 한 노인이 그 문을 나섰지만 기척도,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들릴락 말락, 운기가 소멸된 싸락눈이 그래서 더 쌀알 빻는 소리를 내고는 했다. 따라나선 교도관과 잠시 말을 주고 받았지만 역시나 노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철컹, 하는 느낌으로 철문이 다시 자신의 전부를 걸어 잠갔다. 남은 것은 노인과, 노인이 든 봇짐과, 듬성 싸락눈 뽀록 돋아 털 뽑힌 생닭의 거죽 같은 망망한 세계가 전부였다. 눈이 계속 흩
나렸다. 삭망(朔望)의 하늘에 갈 지(之)를 그은 후, 노인의 시선이 멎은 곳은 전방이었다. 싸라기눈에도 반백이 된 세 사람의 사내가 눈사람과 같은 느낌으로 그곳에 서 있었다. 노인이 고개를 떨구었다. 대형, 세 사내의 입가에서 일제히 뜨거운 입김이 솟구쳤다. 대천권왕(大天拳王) 김일해-노인의 눈가에 나린 싸락눈 몇점이 하필 작은 물방울로 맺히는 듯하였다. 하필이면, 멀리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 하나가 고오, 소리를 내며 그들의 상공을 가로질렀다. 어찌… 하고 권왕이 중얼거렸다. 용이 하늘을 가르거늘 저리 소리가 연약하단 말인가. 안경에 서린 김을 닦으며, 세 사내 중 가장 젊은 중년의 서생이 입을 열었다. 가중등가감각소음기준(加重等價感覺騷音基準)법 때문이옵니다. 법 때문이라… 권왕의 주름진 이마 위로 다시 눈이 흩나렸다. 편편(片片), 세설(細雪)로 덮지 못할 십년의 세월이 그곳에서 선이 굵은 협곡으로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대형. 나머지 두 사내 중 청룡검제(靑龍劍帝) 최일우가 입을 열었다. 팔척 장신의 과묵한 거구였다. 빼앗듯, 혹은 당연하단 듯 검제가 봇짐을 받아 들었다. 내키지 않는 눈길이 잠시 미풍처럼 흰 눈썹을 흔들었지만, 봇짐을 넘기는 권왕의 손길은 순순하고 순순했다. 곁에 선 단신의 사내가 권왕을 향해 합장을 올렸다. 운무천마(雲霧天馬) 선우진. 지천명이거나, 혹은 환갑이거나 나이를 가늠키 어려운 얼굴이었다. 진갑이거나 희수거나, 가늠키 힘든 것은 검제도 마찬가지였다. 여여(如如)들… 하셨나? 넌지시 일행을 둘러보며 권왕이 물었다. 대답 대신, 검제의 검은 눈썹이 비 맞은 숲처럼 어둑하니 흔들렸다. 고오, 또 한 대의 비행기가 상공을 가로질렀다. 둘러, 나누고픈 대화를 가로막긴 했어도 가중등가감각소음기준을 위배치 않은 소음이었다. 조금씩 눈발이
끊어지고 있었다. 부지불식, 언제 운신을 했는지 천마는 벌써 몇발짝 뒤 세워진 승합차에 올라 있었다. 부릉 덜덜덜, 부릉… 덜덜덜 덜… 작고 낡은 六인승의 승합차가 건단열을 앓는 말처럼 몸을 떨었다. 차의 옆구리에 <삼우농장>이란 붉은 문구가 씌어 있었다. 오르시죠, 대형. 검제의 안내에 발길을 내떼던 권왕이 중년의 서생을 향해 물었다. 보아하니 무골은 아니신데 계씨(季氏)는 뉘신가? 몸을 조아리는 서생을 대신해 검제가 입을 열었다. 이장록이라고… 썩 유능한 율사(律士)이옵니다, 작금양년(昨今兩年) 저를 따르는 중입니다. 율사라… 고개를 끄덕인 권왕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삼가 영광이옵니다. 정천대법(頂天大法) 이장록의 두 손이 심히 떨며 권왕의 우수를 받았다. 전설의 손이었다.
전해주고 싶어 슬픈 시간이 다 흩어진 후에야 들리지만
눈을 감고 느껴봐 움직이는 마음 너를 향한 내 눈빛을
라디오는 잡음이 심했다. 차는 잠시 국도를 탔고, 작은 톨게이트를 거쳐 한적한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으므로 권왕은 행선지를 알 수 없었다. 허나 묻지 않았다. 묻어둔 세월 속에 후배들의 무연(武緣)에도 어떤 변화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빙해천수(氷海千手) 조인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조인덕의 거처를 향할 수도, 혹은 어떤 반목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때로 듬성, 때로 촘촘 과부 머리를 긁빗기는 음양소 자욱처럼, 불규칙한 눈발이 희뿌연 차창에 빗살을 치고 있었다. 권왕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십년 사이 강산도 세상도 또 많이 변했을 터였다. 휩쓸려, 또 변했을 인심과 민심… 봉밀통을 향해 가는 개미떼처럼 인간이란 강물도 여전히 흐르고 있을 터였다. 그랬다, 정말이지 세간이 개미집만도 못하게 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많은 문파를 이끌고, 대의명분에 따라 사람을 살리고 죽이던 시절이었다. 그는 전설이었고… 신이었다. 대의와 명분이 살아 있던 시대였으니 이미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다. 길고 긴 꿈이라도 꾸고 난 듯 그는 다시 눈을 떴다. 창 너머 이어지는 산과 산, 물… 그리고 물. 올해로 꼭 이백여든해를 살았다. 일국의 흥망을 몇번이나 지켜봤고, 무림의 소멸을 뜬눈으로 목격했다. 전 무림이 찬양하던 금강불괴의 몸이, 그는 이제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 마 눈앞에 선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다시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무공을 겨뤄본 게 언제였던가. 아마 백년도 더 되었을 것이다. 중원을 평정하고 건너온 학익무선(鶴翼武仙) 사마천… 만주에서 가졌던 그와의 일전이 어슴푸레 떠올랐다. 그믐달이 막 떠오른 광활한 청보리밭이었다. 그의 광동어를 알아듣진 못했으나 두 고수의 합(合)에는 어떤 말도 필요치 않았다. 무선의 권은 바람을 거스르지 않았고 권왕의 권은 대지를 억누르지 아니했다. 학의 날갯짓에 백리 밖 북해까지 그믐달이 밀려갔고, 용의 승천에 전남 장흥의 동백 하나가 늙은 꽃잎을 떨구었다. 동이 틀 무렵 먼저 출수를 거둔 것은 무선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호흡을 다듬었고, 목례를 나누고선 서로가 온 곳을 향해 발길을 뒤돌렸다. 그것이 끝이었다. 무선이 이겼니 권왕의 승리니 소문은 무성했지만 정작 두 본좌는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세월이 하 흐른 후, 취중의 무선이 남긴 싯구 하나가 세간의 입을 통해 풍문으로 전해졌다. 밤새 그의 권은 한 포기의 보리도 해하지 않았거늘, 나의 권은 그만 두 포기의 보리를 꺾고 말았네.
조선이 멸하고 일제가 물러가고 자유당과 민주당이 들어서고 자유와 법치, 삼권의 분립… 그리고 전쟁은 무림의 맥을 결정적으로 끊어놓았다. 숱한 고수들이 폭격에 목숨을 잃었고 이념으로 나뉘어진 문파들, 밀고와 음해, 북으로 일본으로 뿔뿔이 흩어진 협객들, 산으로 숨어버린 은자들… 그리고 말해, 무엇하리오. 이어진 공화당과 유신… 산업과 경제개발… 유수처럼 흘러간 장강의 하구에서 어느새 권왕은 개인으로 전락한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불사의 육신은 시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적(籍)을 만들어야 했고, 새로운 세계 속에서 그는 언제나 무학의 늙은이였다. 무신(武神) 대천권왕 김일해. 그는 이미 죽은 인물이었다. 청룡검제와 운무천마, 빙해천수… 불사의 신기를 얻은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절대 무림의 사천왕, 중국 중원을 떨게 했던 동방 四룡(龍)의 운명은 그런 것이었다.
인걸은 간 데 없고 가난과 싸워온 반세기였다. 무학의 노인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농사와 칩거, 막노동이 전부였다. 무공을 겨룰 상대도 비급을 시전할 대상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법이 정의를 대신하고 금전이 힘을 대신하는 세상이었다. 용을 믿는 세계도, 용이 필요한 세계도 아니었다. 세계는 이미 무목(無目) 무각(無覺)으로 무리지어 이동하는 작고 소소한 개미들의 것이었다. 천하 최고수의 자리를 놓고 일합을 벌이기도, 때로 대립의 각을 세우기도 했던 四룡의 무연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서로의 처지를 알면 알수록 스스로가 비참한 세월이었다. 과거의 용은 화석이 되었고, 남은 것은 네 마리의 위타(委蛇)였다. 대의와 명분이 사라진 세계에는 연명(延命)만이 남아 있었다.
그해 여름의 일은 아주 사소한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경성 외곽, 그러니까 서울 변두리의 어느 신도시였다. 사건은 권왕이 거처하던 허름한 숙소 근처 주점에서 비롯되었다. IMF니 불경기니 해서 몇달이나 밀린 보호세가 원인이었다. 들이닥친 건달 몇이 기물을 부수고 난동을 부리는 중이었다. 우연히 앞을 지나던 권왕의 눈에 주점주인의 눈물과 희롱을 당하는 그의 아낙이 들어왔다. 멈춰라. 그리고 곧 주변은 조용해졌다. 이튿날 어찌 숙소를 알아낸 패거리들의 습격이 있었는데 그저 어인 일인가? 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곧 주변은 싸늘해졌다. 무신의 권이었다. 에프킬라를 맞은 모기가 스스로의 사인을 알 수 없듯 건달패들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저희 형님께서 좀 뵙자고 하십니다. 며칠 후에는 그런 초대가 있었다. 정중한 초대라기보다는, 흉계와 함정이 도사린 나름의 납치였다.
차를 타고 간 곳은 중심 유흥가의 한 나이트클럽이었다. 대낮이라 영업이 시작되기 전이었고 홀은 텅 비워져 있었다. 그리고 어두웠다. 피식. 권왕과 대면한 무리의 두목이 어이가 없다는 듯 후 한숨을 내쉬었다. 나참… 후… 무슨… 후… 이바요, 영감님… 왕년에 스포츠 좀 하셨나… 바요? 봐요가 아닌 그 바요가 권왕에겐 불손하게 느껴졌다. 고을의 나쁜 놈들이 모두 모인 듯 어둑한 클럽 안은 사내들로 가득했다. 권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잠시 어둠이 출렁였고 두목은 지구의 어떤 스포츠맨보다 멀리, 더 높이, 더 빠르게 날아 무대 위에 떨어졌다. 잠궈인지 담궈인지 불분명한 신음소릴 누군가 내뱉었다. 홀 가득 함성과 꺼내든 회칼들이 밤바다에 떠오른 학꽁치떼처럼 은은하게 파닥거렸다.
형님 여기 애들 좀 보내주셔야겠습니다, 얼른이요. 클럽 밖으로 두 대의 세단과 다섯 대의 승합차가 도착했다. 우루루. 건장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