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려령 金呂玲

1971년 서울 출생. 소설집 『샹들리에』, 장편소설 『완득이』 『우아한 거짓말』 『가시고백』 『너를 봤어』 『트렁크』 등이 있음.

 

 

 

장편연재 2

일주일

 

 

유철은 이스탄불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총선 출마를 결심했다. 어쩌면 답이 정해진 여행이었다. 여의도를 떠나고 싶었지만 떠나도 갈 곳이 없었다. 의정활동으로 그나마의 강의경력도 단절된 상태였다. 전국 대학 어디에도 그를 위한 빈 강의실이 없었다. 총선은 유철에게 당장 구직의 문제였다. 단절되지 않은 경력으로 출마하는 것이 그나마 유리할 거였다. 선택에서 제외된 상실과 실업의 공포를 견딜 만큼 갖춰놓은 것도 없었다. 경남이 험지라 하나 취업준비생에게는 그렇지 않은 곳이 없었다. 곧 실업자가 될 처지에 놓였으니 지역을 따질 여력도 없었다. 괴롭지 않고 외롭지 않은 밥벌이가 어디에 있는가. 금배지 달고 의전받는 생활을 하는 동안 어느새 그것들에 익숙해져 제 일에 투정 부리는 오만을 저질렀다. 투정이 지나치게 빨랐다. 더 부지런히 살아보자. 그러다보면 문득 생의 선물 같은 일주일이 또 오지 않겠나. 그때를 기다리며 묵묵히 견디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였다. 유철은 그것으로 총선에 대한 고민을 끝냈다.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온 유철을 맞이한 것은 이혼서류였다. 아직 트렁크도 풀지 못한 상태였다. 아내 정희가 그것을 들고 다시 나가라는 듯 서류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유철이 막 도착한 갈증으로 생수를 들이켜고 있을 때였다.

“우리 그만 이혼하자.”

“후우……”

유철이 긴 숨을 내뱉었다. 정희는 유철의 이스탄불행을 달리 해석하고 있었다. 자신과의 정리를 위한 여행으로 여겼다. 유철은 그런 정희의 생각을 정정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부부였다. 한집에 사는 불편한 타인이 된 지 오래였다. 당신하고 사는 거 이제 힘들다,는 정희 말에도 유철은 토를 달지 않았다. 그랬을 거라고, 짐작한 일이었다. 둘의 균열은 오래전부터였다. 둘에게 집은 대화 없는 침묵의 공간이었다. 침묵은 둘을 점점 멀어지게 했다. 그나마의 대화도 뚝 끊긴 것은 과거 유철의 비례대표 공천 때문이었다.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될 선택에서조차 정희는 외면당했다. 전혀 몰랐었다. 어느날, 이러저러한 일로 입당했다고 통보한 것이 전부였다. 정희가 국회의원이 되는 거냐고 물었고, 유철이 어쩌면,이라고 답했다. 어쩌면. 그 대답이 왜 그리 상처가 됐을까. 강의로 밖에서 말을 많이 하니 집에서는 좀 쉬고 싶겠지. 서운해도 그런 마음으로 참아왔던 침묵의 나날들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그렇구나, 하고 물러난 정희는 어린 혜승만 보고 살았다. 혜승은 엄마, 엄마, 불러주니까. 그러던 어느날, 유철이 그런 말을 했다. 둘째 가질래? 아니. 정희는 서로 갈구하는 사랑 없이 생산만을 위한 섹스를 거부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나를 안고 싶을 때 안아. 그 말이 어떤 전조라도 된 듯 그때부터 관계도 소원해졌다. 유철은 자신을 저토록 거푸 부정한 정희에게 낙담했다. 남편이 아내에게 어떤 진심을 더 보여야 하나. 아이를 낳고 함께 살고 싶은 아내, 그 이상의 진심이 무엇인가. 정희는 정희대로 제 몸에 손을 대지 않는 유철에게 좌절했다. 진심으로는 나를 안을 수 없는 거니? 아이 낳으려고 결혼했어? 네 유전자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해서. 화해의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이가 있으므로 그래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상대의 행동이 더이상 진심으로 와닿지 않으면서 골만 점점 더 패었다. 부부면서 각자 살게 된 이유였다. 징글맞게 잊히지 않는 어쩌면,이라는 말도 수시로 정희를 괴롭혔다. 유철은 그런 불확실한 단어로 중대한 어떤 일에까지 침묵했었다. 기실 정희는 그때부터 이혼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혼은 쉽지 않았다. 수저 두벌만 있어도 결혼한다는 낭만은 얼추 가능했지만, 그 수저를 버리고 떠나려니 수많은 관계가 얽혀버렸다. 함께 사는 불행보다 헤어진 불행이 더 크지는 않을까 두렵기도 했다. 그러니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야 했다. 가정은 지켜야지.

 

정희는 마지막 심정으로 유철과 가까이 눕기도 했었다. 유철이 이스탄불로 떠나기 며칠 전이었다. 몸이 아직 그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면 회생 가능성이 남았을지도 몰랐다. 숨결과 살결을 느낄 수 있는 얇은 실크 잠옷이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눈 감고 갈등하는 남자. 인간의 몸이 요물인 것이 매우 민감하게 상대의 감정을 읽어냈다. 입은 거짓을 말해도 몸은 거짓을 몰랐다. 유철의 고역을 정희의 몸이 그대로 읽었다. 어쩌면 그리도 차가울 수가 있나. 선의의 노력마저 수치스러웠다. 그동안 함께 산 의리로라도 그토록 냉정한 대응은 할 수 없을 거였다. 정희는 부부의 의리라는 말조차 다시 생각했다. 형식상의 부부를 지키기 위해 헤어지지 않는 것이 올곧은 의리는 아닐 것이었다. 지키면 지킬수록 불행해지는 의리. 내가 사랑하자고 했지 의리 지켜달랬니? 차라리 나하고는 사랑을 하고 의리는 다른 사람하고 지켜. 그 일이 있은 얼마 뒤 유철이 홀연 이스탄불로 떠났다. 그날 일로 그도 둘의 심각성을 각성했을 거라고, 정희는 생각했다. 그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 정희도 제 갈등에 종지부를 찍었다. 행복하자고 한 결혼이 서로 불행하므로 더이상 유지할 까닭이 없었다. 너도 싫지? 떠나줘. 내 침대에서 나가.

“혜승이는 내가 키울게.”

“여행 다녀올래? 어디든 가서 너 있고 싶은 만큼 있다 와.”

“당신 없는 데서 있고 싶은 만큼 있으려고.”

“충분히 생각했나?”

“했어.”

유철이 다시 서류를 보았다. 아내가 생각을 마쳤다. 유철 또한 마음에도 없는 미련으로 상황을 길게 끌고 싶지 않았다. 가장 밀접한 스킨십을 갖는 관계가 부부임에도 그것을 서로 거부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멀어졌다. 차라리 남남이 더 나았을 정도로. 하늘이 어떤 연유로 이런 둘을 부부의 연으로 묶었는지 몰라도, 정희가 이제 그것을 둘이서 풀자고 했다. 하늘에서 어떤 처벌을 받을지라도 사는 동안에는 좀 행복해야겠노라고. 하늘이 부부로 죽어야만 거둔다면 차라리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되겠노라고. 유철도 그만 마음을 정했다. 만들면서 가꾸는 사랑, 나는 모르겠다. 사랑하면 만들어지더라. 미안하다.

“하자.”

 

이혼에 합의한 유철이 잠실의 한 오피스텔을 급히 얻어 나왔다. 이혼의 상처를 곱씹을 여유가 없었다. 국정감사를 마치고는 총선에 대비했다. 유철은 김보좌관과 긴밀하게 협조하며 만전을 기했다. 비례대표 때와는 달랐다. 최대한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싸움이었다. 김보좌관이 그동안의 경험으로 유철을 뒷받침했다. 선대위와는 별개로 뒤에서 전체 흐름을 파악해 기민하게 유철에게 조언했다. 이혼으로 내조 유세가 날아갔으니 그만큼 더 뛰어야 했다. 유철은 해볼 만한 인물이었다.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선거는 똑똑한 자가 아니라 매력 있는 자가 이긴다. 이왕 혼자 된 몸, 후방 지원 배우자가 없으면 전방에서 지지자들과 함께 달리면 그만이었다. 솔로는 솔로만의 자유로운 매력이 있는 법이다. 예상대로 유철의 경남 공천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 이때만 해도 이 지역이라면 몸 사리는 의원이 많았다. 유철의 고향에서 공천받았으면 금상첨화였겠으나 아쉽게도 옆의 인근 도시 지역구로 낙점됐다. 진보진영이 승리하기에 까다로운 지역이었다. 선대위가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다. 유철도 매끈하게 잘 움직였다. 몰래 손질받은 사람처럼 혈색도 좋아졌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유권자들을 찾아다녔다. 유철은 옆 도시 출신이라는 친근감으로 밀착도를 높였다. 유철의 깍듯한 미소와 신사적인 몸짓이 젊은 층을 움직였다. 눅눅하지 않은 차분함이 세련된 듬직함으로 어필됐다. 기대고 싶은 아저씨. 그의 출신 지역과 국방위 경력이 어른들을 움직였다. 싹이 보이는 젊은 친구. 지역의료원을 폐지하고 아이들 급식 문제로 소란을 피운 상대당 도지사의 행실도 한몫했다. 그 결과 유철이 상대 후보를 근소한 표차로 앞질러 당선되었다. 보수 텃밭에서 세련되고 안정적인 진보가 먹혔다. 설마설마한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유철의 새로운 출발이었다.

 

유철이 재선에 성공하자마자 국정농단 사태가 터졌다. 그 결과 대통령이 탄핵되었고, 곧 조기 대선이 확정됐다. 그리고 자당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했다. 그럼에도 정국은 여전히 혼란했으므로 승리를 만끽할 여유가 없었다. 청와대의 발 빠른 내각 구성으로 눈뜨면 새 인물이 속속 발표됐지만, 전 정권 사람들이 주요 요직을 내려놓지 않은 상태였다. 누구는 눈치껏 나가려다 잡히고, 누구는 눈치 없이 꿋꿋이 버티고, 누구는 오라면 오겠고 가라면 가겠습니다, 하는 오픈마인드로 살얼음판을 견디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벌써 제 몫 챙기려다 여론의 뭇매로 은근슬쩍 꼬리 내리는 의원도 더러 있었다. 저게 왜 잔칫집에서 진상을 떨어. 박수 칠 때 떠나고 싶냐? 대선은 끝났지만 국민들의 눈은 여전히 매서웠다. 유철은 시간이 허락되는 한 주민들을 만났다. 국회가 열리는 주중에는 서울에 있어도 주말에는 꼭 지역구로 내려갔다. 대선에 이겼다고 해서 주민들의 삶이 당장 바뀐 것도 아니었다. 의원실로 접수되는 민원과 미팅 요청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천 청소나 경로잔치 같은 각종 지역행사에도 최대한 참석했다. 주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정치인이 되어 그들과 함께했다. 사랑. 여자. 이혼한 뒤 그런 것은 뒷전이었다. 그랬는데 도연이 또각또각 걸어와 자신 앞에 서버렸다. 반갑습니다. 네. 자꾸 떠오르는 여자가 나타난 것이다. 아뇨, 제 딸은 제 책을 읽지 않습니다. 읽었다면 책에 나온 내용을 저한테 물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하하. 김보좌관이 경전철사업 간담회 일정으로 재촉해도 유철은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어떻게 또 당신 혼자 두고 가. 심지어 그곳은 자신의 지역구였다. 그럼에도 결국 또 먼저 자리를 떠야 했다. 그런 운명인가보다. 미안해요, 도연씨. 그뒤로 유철은 더욱 일에 매달렸다. 꼭 두달이었다. 김보좌관이 상반기 지역주민들과의 만남에 대해 말하기까지는 잘 버텼다. 김보좌관이 이 행사를 선포식 때 북콘서트처럼 하자고 제안했다. 유철 혼자 강연처럼 하는 것은 추세에도 맞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 선포식 때 그 작가님 어때요? 주민들한테도 친숙할 것 같은데요.”

유철의 입이 자제력을 잃고 도연을 부르고 말았다. 떠오르는 작가가 도연뿐이었고,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김보좌관도 찬성했다. 올해 시에서 회자되는 작가로 자주 방문하면 보기에도 좋았다. 문제는 섭외였다. 그까짓 거 뭐 어렵겠나 했다. 그런데 출판사가 도연의 연락처를 쉽게 넘기지 않았다. 중간 연락책처럼 끼어서 귀찮게 굴었다. 작가가 저밖에 없나. 김보좌관은 도연이 영 까다로운 것 같아 다른 작가를 섭외할 요량으로 유철에게 저간의 사정을 보고했다.

“예에, 그럼 제가 직접 말해볼게요. 제 초청이잖습니까. 그러고도 연락이 오지 않으면 다른 방책을 생각해봐야지요.”

그러고 넘긴 유철의 전화번호는 외부로 공개된 것이 아니었다. 최측근만 사용하는 번호였다. 기다립니다. 그 공항에서 당신을 기다렸던 것처럼 이제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내게 한번만 더 와주십시오. 유철은 그렇게 사흘째 도연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

 

도연이 출판사로부터 넘겨받은 유철의 번호를 휴대전화 액정에 띄우고 손톱으로 톡톡 쳤다. 유철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어떡할까요. 갈까요? 한번은 보냈지만 두번은 못 보낼 것 같습니다. 도연이 의자에 무릎을 세우고 팔로 안았다. 바라보는 상대와 그의 아내까지 의식해야 하는 사랑은 피곤했다. 행복해야 할 사랑에 피곤과 괴로움을 섞고 싶지 않았다. 도연은 타인의 상처에 눈감는 사랑의 이기심이 싫었다. 그러나 지금 유철이 내민 손을 잡는다면 분명 저러한 이기적인 사랑을 하고 말 것이었다. 그럼에도 액정을 내리지 못하고 유철의 번호를 계속 툭툭 치고 있는 것이다. 단지 번호만 알았을 뿐인데도 그가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보고 싶어 미치겠네. 손가락을 조금만 내리면 통화버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통화버튼까지 내려왔다. 보고 싶은 데에는 장사가 없었다. 도연이 길게 숨을 내쉬고 결국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여,에 미세한 악센트가 들어간 유철 특유의 억양이었다. 하도연입니다. 하아, 안도하는 듯한 유철의 숨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기다렸습니다.”

“지금 갈게요.”

“거기 있어요. 내가 가요.”

“내가 가고 싶어요.”

“그럼 택시 타고 석촌호수 다리 앞으로 와요. 내가 있을게요.”

도연이 대충 머리를 올려 묶고 얇은 카디건을 걸쳤다. 학원 수업으로 인영은 아직 오지 않았다. 도연이 냉장고에 포스트잇을 붙였다. 엄마 나갔다 올게. 늦으면 먼저 자. 도연이 집을 나왔다. 도연의 등 뒤에서 전자키가 쉬익 소리를 내며 잠겼다.

 

택시가 양쪽에 호수를 낀 긴 다리를 건넜다. 다리 앞에 유철이 있었다. 이스탄불에서처럼 캐주얼 차림이었다. 도연이 저 남자분 앞에 세워주세요,라고 했고, 기사가 능숙하게 유철 앞에 택시를 세웠다. 도연이 내리고 택시가 떠났다. 유철이 예의 그 뒷짐을 지고 도연을 맞았다. 도연도 똑같은 뒷짐으로 그와 마주했다.

“의원님.”

“작가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실소가 터졌다. 다시 조우한 유철과 도연이 서로를 확인할 수 있는 웃음이었다. 어쩐지 미안하고 어쩐지 후련했다. 유철과 도연이 호숫가 둘레 산책길을 걸었다. 서로 너의 정체가 그거였냐고 촌스럽게 따지지 않았다. 몰랐어도 문제없었듯 알았어도 문제없는 거였다. 다시 만난 설렘과 반가움으로 그 순간을 즐겼다.

“이번 행사 누가 기획했어요?”

“김보좌관님이 기획하고, 제가 섭외했습니다.”

“저는 섭외 몇순위였어요?”

“영순위. 그 밑으로는 없습니다.”

도연이 얼굴을 돌려 유철을 빤히 보았다.

“전부터 느낀 건데, 유철씨는 참 가만히 뻔뻔해요.”

유철이 인정하듯 껄껄 웃었다. 유철과 도연은 그새 호수를 한바퀴 돌았다. 돌아 도연이 택시에서 내린 곳까지 왔다. 유철이 도연을 말없이 보았다. 너무 짧은 만남이어서 잘 가,라는 인사를 할 수가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자신의 숙소가 있음에도 차마 그 말을 꺼낼 수조차 없었다. 보낼 수도 잡을 수도 없는 여자. 이곳은 이스탄불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방랑이 허용되지 않는 서울이었다.

“왜 그렇게 봐요. 할 말 있어요?”

“그냥, 조금만 더 보고 싶어서요.”

“그럼 오늘 같이 잘래요?”

“잘합니까?”

“아시다시피요.”

도연이 유철에게 손을 내밀었고, 유철이 힘껏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알지요, 아주아주 잘. 유철과 도연은 그대로 호숫가 뒤에 있는 유철의 오피스텔로 걸어갔다.

 

시간이 흘렀어도 몸이 서로의 감촉을 고스란히 기억했다. 둘은 변하지 않은 몸의 감각에 안도하며 마음껏 몸을 맡겼다. 보고 싶었어요. 방송에 좀 나오지 그랬어요, 내가 찾아가게. 왔을까요? 당연히. 둘이 있는 것이 좋아도 너무 좋아서 마주 보고 입 맞추고 또 마주 보던 밤이었다. 도연이 유철의 팔을 베고 누워 그를 꼭 안았다. 포근하고 편안했다. 유철이 제 다리를 도연의 다리에 감아 몸을 밀착시켰다. 완벽한 밀착이었음에도 도연의 몸에 거리낌이 없었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그의 곡선에 맞춰 안겼다. 의심의 여지 없이 내 남자라는 확신이 있을 때나 가능한 몸의 반응이었다. 그 편안함에 오히려 당황한 도연이 유철에게서 가슴을 살짝 떼었다.

“전에 나 앙카라에 갈 때 유철씨 안 갔잖아요. 혹시 여권 때문이었어요?”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

“갑자기 생각났어요. 여행사에서 여권 달라고 할 때 주춤했잖아요. 일이 생긴 게 아니라 여권 때문에 그런 거죠? 관용여권이라. 맞죠? 가짜 강사님.”

“혼자 얼마나 심심했는지 알아요?”

“나도 그랬어요. 그런데 침대 좀 어떻게 안 될까요?”

“좀 시끄러웠죠?”

“삐걱삐걱, 얘가 너무 느끼는 것 같아요.”

“하하하. 어떻게 해볼게요.”

숙소를 얻고 급하게 놓은 간이침대였다. 둘은 조금만 움직여도 소리를 내는 좁은 침대에서 키득키득 오랫동안 수다를 떨었다. 근데 그…… 그 작가 알아요? 알아요. 사인 좀 받아주세요. 그 깐깐한 의원님 사인하고 바꿉시다. 오케이. 행사 때 필요한 거 있어요? 마이크. 테이블에 고정시켜주세요. 들었다 놨다 하는 거 불편해요. 보는 사람들도 정신 사납고요. 알았어요. 다른 건요? 글 쓰는 노동자들을 위해 마감무효법 좀 만들어주세요. 당장 추진해볼게요.

 

 

2

 

도연은 잠결에 누가 입을 맞추는 것에 깜짝 놀랐다. 눈을 떠보니 유철이었다. 말끔한 정장차림이었다. 도연이 아, 하고 도로 눈을 감았다.

“조찬회의가 있어요.”

“나는 누가 그런 회의 하자고 하면 칼 들고 갈 거예요.”

“더 자요, 전화할게요.”

도연이 눈 감은 채 입술을 쭉 내밀었다. 유철이 도연에게 입을 맞춰주고 오피스텔을 나갔다. 돌아왔을 때에도 그녀가 그대로 있길 바랐다. 이스탄불에서처럼 아직 잠든 그녀에게 다가가 더 잘래요? 하고 묻고 싶었다. 그러면 그때처럼 다 잤어요, 하고 잠결에도 안아줬으면. 일단 침대부터 알아봐야겠군. 유철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아직 제 집에 도연이 있다. 기분 좋은 출근길이었다. 유철이 출근하고 얼마 뒤, 도연이 벌떡 일어났다. 못살아. 도연이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인영의 잔소리가 벌써 귀에 쟁쟁했다. 서두르면 등교 시간을 맞출 수도 있었다. 도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피스텔을 나갔다.

 

도연이 집으로 들어가 조용히 신발을 벗을 때, 인영이 방에서 불쑥 나왔다.

“이제는 말도 안 하고 외박이야?”

“연애하느라 바빠서 전화 못했어.”

“웃겨. 엄마 요즘 만나는 사람 없잖아. 또 누구랑 밤새 술 마셨지? 작가들은 왜 그렇게 시간개념이 없어? 왜 밤에만 돌아다니는데!”

“우리가 음지를 지향하는 사람들이라……”

“됐고, 나 교통카드 충전해야 해.”

도연이 얼른 지갑에서 삼만원을 내주고 인영을 배웅했다.

“딸, 잘 다녀와.”

인영이 도연을 흘겨보고 집을 나갔다. 늦지 않게 도착해 인영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도연이 방으로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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