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박동억 朴東檍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황야는 어떻게 증언하는가: 2010년대 현대시의 동물 표상」 등이 있음.
suncanon@naver.com
정지아 鄭智我
소설가.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 소설집 『행복』 『봄빛』 『숲의 대화』 『자본주의의 적』 등이 있음.
jiajeong@hanmail.net
황인찬 黃仁燦
시인. 시집 『구관조 씻기기』 『희지의 세계』 『사랑을 위한 되풀이』 등이 있음.
mirion1@naver.com
황인찬 안녕하세요. 가을호 문학초점 사회를 맡은 황인찬입니다. 오늘 자리에 함께하신 분은 정지아 소설가와 박동억 문학평론가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직접 만나지 못해 이렇게 온라인으로 좌담을 진행하게 되었는데요, 사람을 대면하기 어려운 요즘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두분 모두 정말 반갑습니다.
정지아 안녕하세요. 소설 쓰는 정지아입니다. 오랜만에 서울 구경, 서울 사람 구경을 하나 설렜는데 이번에도 코로나 때문에 좌절되었네요. 오랜만에 동료들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박동억 좋은 작품들을 읽는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온라인으로나마 두분을 처음 뵙게 되어 반가운 마음인데, 함께 문학작품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더욱 기쁩니다.
최은미 『눈으로 만든 사람』(문학동네)
황인찬 최은미 세번째 소설집 『눈으로 만든 사람』으로 시작해보면 어떨까 해요. 6년 만의 소설집인데요, 공들인 시간 덕분인지 작품들의 밀도가 참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사실 이 소설들을 읽는 내내 너무 힘들었습니다. 소설에서 말하고 있는 이야기들이 무척이나 강렬하게 다가와서요. 정리된 과거의 일들이 아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져오며 소설 속 ‘나’를 구성하고 또 구속하고 있기도 하죠. 그것이 너무 실감나게 그려져 읽고 있는 저조차 숨이 막혀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야말로 육박해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박동억 저도 소설집이 묶여 나오길 기다리던 작가였습니다. 작품들을 모아서 읽으니까 말씀하신 ‘육박해온다’는 느낌이 더욱 강했습니다. 특히 최은미가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답이 없는 감정들, 사회적인 가치를 부여받지 않는 감정들이죠. 예컨대 「보내는 이」에서 남편의 퇴근을 기다리며 “알알하고 허망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20면)는 시간이라고 말하거나, 아이가 열한살이 되도록 버리지 못했던 모유팩들을 “윤이까지도 다 동결돼 있는 여섯 개의 덩어리”(33면)라고 표현할 때, 허공이나 얼음과 같은 시간을 견디는 삶의 자세를 잘 감각화하고 있습니다. 소설집 전반에서 어린 시절 겪은 성폭력의 트라우마, 여성의 막막한 삶의 감각, 중단할 수 없는 그리움과 애도의 문제 등을 다루는데, 수록작들이 소재를 공유하면서도 때론 피해자의 시점에서, 때론 목격자의 시점에서 주제에 깊이 파고들어가고 있습니다.
정지아 ‘육박해온다’는 표현을 하셨는데, 저는 이전 세대의 소설에 익숙한 사람이라 그런지 소설이란 당연히 이 정도로는 육박해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번 소설집에서 제가 가장 놀랐던 것은 작가의 변화였어요. 사실 육박해오기로 따지면 전작 『목련정전』(문학과지성사 2015)이 더 강했다고 봅니다. 『목련정전』의 세계, 고통으로 닫혀 있어 오로지 고통으로만 순환하는 세계, 그 결정론적인 세계관에 압도당하며 읽었는데, 이번 소설집에서는 『목련정전』의 신화적 상상력이 현실적 상상력으로 옮겨온 지점들이 눈에 띄었어요. 우선 단순하게는 아홉편 모두 ‘지금 여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그렇고요. 「눈으로 만든 사람」에서 주인공 강윤희는 어린 시절 작은아버지로부터 성추행을 당하고, 그 상처 때문에 남자들과 제대로 관계를 맺지 못하는데 결말에서 새로운 생명의 잉태를 받아들이게 돼요. 실제 임신한 건 아니고 암시일 뿐이지만요. “피임을 하지 않았다는 걸”(130면) 알게 된 마지막 문장으로부터 『목련정전』의 생명 부정이 이미 긍정으로 나아갔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한 작가가 이렇게 빨리 변화할 수 있는가, 작가가 그야말로 도약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앞으로 어떻게까지 변화해갈 수 있을까 궁금해져요.

황인찬
황인찬 표제작인 「눈으로 만든 사람」은 친족 성폭력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 가해자의 아들을 잠시 집에 들이는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을 텐데, 소설집 전체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도 생각됩니다. 결코 떨쳐낼 수 없는 과거의 기억이 현실의 삶과 어떻게 얽히는지, 그리고 그 폭력이 어떻게 대(代)를 넘어서까지 영향을 미치는지, 그런 모습들이 생생하고 설득력 있게 그려집니다. 가해자가 강윤희에게 용서를 비는 장면에서 “그때 내가 너한테”(125면)라는 말을 하는데, 이 대목에서 강윤희는 ‘그때’라는 말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가해자에게 그것은 과거의 한순간, ‘그때’의 일이지만, 강윤희에게는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져오는 일이니까요. 또 「운내」는 ‘운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기억을 성인이 된 ‘나’가 회상하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마찬가지로 과거의 기억이 지금의 나를 강하게 구속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과거가 끊임없이 현재화되는 것이 이 소설집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어요.
박동억 작품을 읽다보면 그 상황에서 ‘나였으면 어떨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눈으로 만든 사람」에서 가해자인 작은아버지 강중식이 강윤희에게 변명하는 장면은 이 소설집에서 가장 끔찍한 장면인데, 끝까지 자신의 불행만 연민할 뿐이죠. 그런데 강중식이 그의 아들 강민서를 돌보아달라고 맡길 때 윤리적 고뇌는 발생합니다. 다섯살 때 소아림프종 판정을 받고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 아이를 용서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꺼림칙한 존재, 혹은 강윤희가 자신의 딸과 단둘이 두어서는 안 될 남자로서 바라보게 됩니다. 마치 작가가 독자에게 저 아이, 자신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범죄자의 자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질문하는 듯해요. 또한 「내게 내가 나일 그때」 등의 작품을 통해서 작가는 가해자를 고발하는 순간도, 가해자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듣는 것도,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도 결코 해답이 되지 않는 장면들을 제시합니다.

정지아
정지아 「눈으로 만든 사람」과 「운내」는 두 작품 모두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연결된 고통과 상처의 이야기이지만 『목련정전』이 고통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면, 「운내」에서는 여성들의 연대로 나아가는 모습이 보여요. 「눈으로 만든 사람」에서 윗세대가 저지른 죄를 아랫세대가 벌받는 듯한 구조 역시 『목련정전』과 상당히 흡사한데 사실은 죗값을 치르고 있는 아이를 통해 주인공이 오히려 자기의 상처를 위로받는 이야기이고요. 아이가 고통받고 있는 사실에서 위로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바라봐주는 아이의 순수하고 따뜻한 시선을 통해서 위로를 받죠. 고통은 현존하고 있지만, 결국 산다는 것이 어쨌건 상처가 흉터가 되고 자국이 되고 그것이 나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면, 그런 극복의 과정까지를 이 소설들이 담고 있다고 봅니다. 「운내」나 「美山」(미산) 같은 작품이 가지는 밀도 역시 특별해요. 주인공이 유년 시절을 보낸 ‘운내’라는 공간에 대한 묘사나 고향을 허공에 출렁다리가 걸려 있었던 산마을로 설정하는 등 신화적 상상력이 발휘되고, 신화적 공간으로 들어갈 때 최은미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이 나오는 것 같아요.

박동억
박동억 여성의 막막한 삶의 감각을 재현하는 작품은 결이 또 조금 다르게 다가옵니다. 「11월행」은 템플스테이를 함께 간 여성 삼대 이야기로 특별한 갈등이 드러나지 않지만, 핵심은 어머니의 역할을 타성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은형에게서 아무런 욕망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갈등도 존재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 누구라도 좀 떠올리고 싶었지만 아무도. 꿈속에서 보고 싶은 사람이 한 사람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에 은형은 충격을 받았다”(299면)라는 서술에서 무작정 흘러가는 삶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막막함이 잘 드러나 있어요. 그 막막함을 벗어나기 위해서 「여기 우리 마주」의 은채 엄마는 자신의 공방에 집착하고, 「보내는 이」의 ‘나’는 반대편 아파트에 사는 진아씨의 흔들리는 창문을 보면서 자신의 삶을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폭력을 주제로 한 작품의 경우에는 여성들이 성폭력을 당한 과거의 경험 때문에 비틀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부모로서 자신을 교정해야 한다는 이중억압에 시달리고 있어요. 「나와 내담자」나 「내게 내가 나일 그때」의 인물들은 아이가 나를 닮을까봐, 아이가 나에게 영향을 받을까봐 그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정상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힙니다. 가족이나 의사도 교정을 강요하고요.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제게는 이런 부분이 가장 괴롭게 와닿았습니다. 그런데 날이 선 고통을 달래듯 「美山」에서는 죽은 동생을 향해, 「점등」에서는 사랑했던 이를 향해 끝까지 당신을 잊지 않고, 당신이 사랑했던 장소와 사람들을 더듬어보며 애도하고 그리워하겠다는 자세를 그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그리움의 자세와 마주할 때 독자를 어루만져주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황인찬 과거를 축으로 삼아 종적인 구조를 이루는 소설군과 현시점의 여러 일들을 두루 살피는 횡적인 구조의 소설군으로 나눠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한가지 재미있는 점이라고 한다면 「눈으로 만든 사람」 「운내」 등 과거를 축으로 삼아 한 인물의 기원을 살펴보는 작품의 경우에는 작품 속에서 연대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반면, 「여기 우리 마주」 「보내는 이」 등 신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