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문학, 정치, 민주주의

 

성장하는 여성, 달라지는 여성서사

영화 「도희야」와 「소리도 없이」를 중심으로

 

 

이나라

동의대 영화·트랜스미디어 연구소 전임연구원. 최근 논문으로 「인류학적 이미지와 형상적 섬광」 「아녜스 바르다 영화의 목소리 연구」가 있음.

 

 

페미니즘 리부트와 한국영화의 장

 

2010년대 후반 한국사회에서 가장 큰 목소리로 이견을 표했던 주체는 틀림없이 일단의 여성 주체, ‘우리, 여성’1이라고 함께 말하는 이들이었을 것이다. 여성들의 목소리는 탑다운(top-down) 방식의 조직화를 거치지 않고도 온라인을 중심으로 유례없이 폭발적인 속도로 증폭되었다. 여성 주체는 온라인 공론장과 거리에서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고, 드러났으며, 끈덕지게 상호의존적인 집단을 형성했다. 2015년 이후 우리는 끊임없이 그러한 ‘우리, 여성’의 목소리를 듣는다. 가령 고용시장의 불평등을 지적하는 목소리, 온라인과 오프라인,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에서 경험하는 여성혐오와 성폭력의 행사에 분노하며 안전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폭발력을 가진 것은 몸에 대한 목소리였다. 여성들은 여성의 신체에 가해지는 성폭력과 임신중단시술 불법화 등 국가권력의 통제를 규탄하고 거부했다. 같은 시기 한국영화계에도 이러한 흐름이 분명해졌으며 무엇보다 성폭력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있었던 2016년 하반기 이후 SNS를 중심으로 문화예술계 성폭력 고발 해시태그 운동이 일어나는 가운데 영화계 인사에 대한 고발도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의 몸은 은유적인 의미에서나 실제적인 의미에서 진정 전쟁터가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영화는 늘 몸이 ‘출현’하는 특권적 장소였다. 영화적 신체는 늘 젠더적 응시의 대상이었고, 영화는 젠더의 전쟁터였다.2 페미니즘 리부트와 함께 각성하고 주로 온라인 광장에 집결한 여성 관객들은 장르영화 일반이 여성을 재현하는 상투적인 방식을 여성혐오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보이콧하는 동시에 여성영화, 여성서사영화에 대한 지지를 더욱 적극적으로 표명했다. 여성혐오적인 표현과 작품을 지목하고 가르는 온라인의 여론은 때로 지나치게 신속하고 거칠어 보였다. 그런 여론의 추이를 좇다보면 작품에 대한 고유한 해석의 가능성 내지는 해석의 시간이 더이상 충분히 허용되지 않으리라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페미니즘 리부트와 맞물려 여성영화와 여성서사영화를 함께 요청하는 관객들의 움직임 자체는 수행적인 정치적 행위임에 틀림없다.

여성 관객의 호응을 받은 영화들은 평균 제작비를 기준으로 분류할 때 대부분 10억 미만의 제작비를 사용한 ‘다양성 영화’ 내지 ‘독립영화’의 범주에 포함된다.3 남성지배사회의 억압적 질서에 대한 여성의 자각과 투쟁을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기록했던 이들은 여성 다큐멘터리 감독들일 것이다. 2015년 이후 개봉한 장편 다큐멘터리 중 페미니즘 운동 및 시선과 결합한 대표작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우리는 매일매일」(강유가람 2019)이 페미니즘 운동과 관계된 사적 주체들의 삶을 추적하고 역사화한다면 「너에게 가는 길」(변규리 2021)은 성소수자의 싸움을 기록하며, 「피의 연대기」(김보람 2017)는 페미니즘 운동의 주요 의제인 여성의 몸을 영화의 주제로 삼았다. 「잡식가족의 딜레마」(황윤 2014), 「기억의 전쟁」(이길보라 2018) 등은 페미니스트의 시선으로 환경, 전쟁 피해자 등 여타 사회운동의 의제를 다룬 장편 다큐멘터리다.

비교적 잘 알려진 사회학자의 도시개발 기록지인 「사당동 더하기 22」(조은·박경태 2009)나 「사당동 더하기 33」(조은 2020) 외에도, ‘8년 연속 평화적 무파업 타결’이라는 신문의 한줄 뉴스를 넘어 싸움을 준비하는 노동조합원들의 매일을 가까이에서 기록한 「깃발, 창공, 파티」(장윤미 2019) 및 영주댐 공사로 이주하게 된 노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기프실」(문창현 2018) 등도 특기할 만하다. 이들 작품은 페미니즘 주제를 내세우거나 페미니스트의 관점을 표명하는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갈등을 기록하고 있는 자—여성 또는 사회적 약자의 역사를 수집하고 기록하는 여성 다큐멘터리 감독—의 시선과 신체에 대한 주목을 요청하는 작품들이다. 극영화 「휴가」(이란희 2020) 역시 노조운동과 해고라는 소재를 다루는데, 해고 복직투쟁을 벌이고 있는 한 중년 노동자가 동료 노동자나 고용주와 겪는 갈등보다 청소년기의 딸과 겪는 갈등에 초점을 맞추는 새로운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여자아이의 성장과 고통의 관조

 

2015년 이후 개봉작 중 여성 관객의 가장 큰 주목과 지지를 받은 영화는 「우리들」(윤가은 2015), 「벌새」(김보라 2018), 「메기」(이옥섭 2018), 「보희와 녹양」(안주영 2018), 「최선의 삶」(이우정 2020), 「태어나길 잘했어」(최진영 2020) 등 여성의 성장서사를 다룬 여성감독의 작품들이다. 이들 영화는 세계 속에서 길을 잃는 아이나 청소년, 청년의 미숙함에서 세계에 대한 대안적인 시선을 기대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학교폭력을

  1. 버틀러(J. Butler)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떤 집단이 함께 우리라고 말하게 되면 그 순간 이들은 스스로를 ‘인민’으로 구성하려는 것이다.” 즉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우리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말하는 사회적 다수를 탄생시키려는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 「우리, 인민: 집회의 자유에 관한 생각들」, 알랭 바디우 외 『인민이란 무엇인가』, 서용순 외 옮김, 현실문화 2014.
  2. 영화학자 로라 멀비(Laura Mulvey)가 할리우드의 서사영화에서 작동하는 남성적 응시의 작동방식을 이론화한 1975년의 논문 「시각적 쾌락과 서사 영화」(Visual Pleasure and Narrative Cinema)는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축소하는 남성지배사회의 시각문화에 대한 비판의 초석이 되면서 영화학 논문 이상의 파급력을 가지게 되었다.
  3. 상대적으로 적은 편수이지만 상업 장르영화의 문법과 제작 방식으로 연출한 여성감독의 작품도 있다. 영화 「비밀은 없다」(이경미 2016), 「돈」(박누리 2018)과 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이경미 2020) 등을 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