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지금 ‘우리’의 이름으로 구축되는 공간
소유정 蘇柔玎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이토록 열렬한 마음: 여성 서사의 아이돌/팬픽-읽기를 통한 나/주체-다시 쓰기」 등이 있음.
1. ‘있음’의 자리
노르웨이의 헤드마르크 박물관(현 아노 박물관) 내의 어느 창가에는 포도주병 하나가 놓여 있다. 농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옅은 녹색 병이지만 특별하게 박물관의 전시품이 된 셈이다. 이에 대해 한 건축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 병은 창가의 돌, 벽돌, 포도주병, 창문, 빛, 마당, 돌담, 이어진 다른 건물, 하늘, 나무 등 물질의 세계, 곧 풍경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이렇게 병은 자신을 드러내고, 창가에 드러나며, 바깥 풍경에 대해서도 열려 있게 된다. (…) 때문에 이 병은 창가에만 따로 놓여 있는 게 아니다. 이 병을 나라고 생각하면 이때 창가는 ‘나’의 방이다. (…) 빈 병을 나로 바꾸어도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없다.”1 서두에서부터 짧지 않은 분량의 글을 인용한 까닭은 이것이 앞으로 이야기할 시에서 존재의 거주 공간인 ‘시적 공간’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와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이 사유하는 공간 안에 ‘있음’으로 놓여 있으며 동시에 바깥을 향해 ‘열려 있는’ 존재다. 공간의 안과 밖을 이루는 모든 것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주체, 그것이 바로 ‘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 시의 화자 또는 주체를 대입하여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다만 이 경우에는 차이도 있다. 시적 공간이란 언어로 발화되어 환기되는 공간으로, 즉 발화를 통해 장소성이 부여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때의 발화는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혹은 있었다는 것, 그러리라는 것—을 인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듯 사유에 의해 ‘나’의 자리가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 ‘있음’의 자리, 시적 공간에 대한 이해는 곧 시적 사유에 대한 이해와 연결되며, 나아가 시 전체에 대한 논의로도 확대할 수 있다.
시적 공간에 대한 독해는 특정한 공간 안에서 화자와 연결되는 존재들을 살피는 식의 미시적인 관점을 요구하지만, 발화의 주체가 자리하는 공간 자체로 상징성을 띠며 의미화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안희연의 「상상 밖의 모자들로 가득한」은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조금씩 기울어지는 시간을 겪고 있다”2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사건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우리’의 위치가 “물속”이며 “가만히 잠들라는 명령”을 수행 중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시가 환기하는 것이 세월호참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설혹 누군가에게는 상흔과 같은 기억뿐일지라도 상실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아서 “물속”을 제시하는 이 시를 통해 우리는 또 한번 그날의 바다를 경유하게 된다. 이렇듯 시적 공간을 제시함으로써 읽는 이에게도 적용 가능한 공통감각을 불러내는 방식은 세월호참사를 비롯하여 전사회적인 사건이 여러번 발생했던 2010년대 중후반 시에서 눈에 띄는 특징이다. 망각할 수 없는 현실을 공유하는 장소를 부르고, 동시에 환기되는 정동에 주목하게 되는 시들이 있다. 이때의 장소는 많은 경우 ‘광장’이다. 가령 강성은의 시3에서는 “좁은 골목들과 창문들을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자 다시 광장이 나타났다” “매일 밤 모든 길은 광장으로 이어졌다 벗어나려 할수록 더 그랬다”고 말하며, 화자가 길을 잃고 헤매는 시의 전개에 따라 광장이 공간적 배경으로서 반복 등장한다. 이에 당시 사회적·정치적 현실에 대한 저항으로 응집했던 광장과 그때 울려 퍼졌던 혁명의 노래를 떠올리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김현의 시4에서도 역시 촛불이 켜지고 꺼지는 장면 사이로 “하야하십시오.” 또는 “썩은 물이 하나둘 퇴진하는 소리”와 같은 음성이 개입할 때, 우리는 단번에 촛불공동체의 일원이었던 체험을 복기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물속, 바다, 광장과 같은 시적 공간은 화자와 독자의 경계를 넘어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며 우리가 우리로서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실감하게 하는 역할을 해왔다.
범위를 좁혀 최근의 시들로 시선을 옮겨볼 차례다. 우선 광장에서의 부름이 아직도 유효한가를 묻는다면 어떨까. 광장에서의 일은 “혁명으로 이미 전환이 완료”된 “성취의 결과가 아니”며 “지금 우리가 혁명의 과정에 있고 이것을 더 진전시키는 것”5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태도라는 최근의 논의가 있듯, 현실의 ‘촛불혁명’은 여전히 진행 중에 있다. 시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뜨거운 열기가 있던 그때와는 또다른 온도로 광장을 떠올리게 하는 시편들이 종종 눈에 띈다.6 그러나 광장의 일이 지속되는 과거-현재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 외에는 우리가 함께 그려보고 불러봄직한 시적 공간이 공유되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질병 대유행의 시대에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생활에서 바깥이라는 물리적 공간의 영역이 축소된 만큼 시적 공간 또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최근의 시들에서 다소 고립적으로 보이는 화자가 발견되는 것과 그가 거주하는 시적 공간이 협소하게 그려지는 상황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문제인 것이다.7 “가장 축소된 내밀한 공간에서의 응집”에 대해 바슐라르(G. Bachelard)는 릴케(R. M. Rilke)의 말을 경유하여 확장된 논의를 남겼다. “좁은 공간 속에서 스스로가 평정하게 있다는 것을 안다는 데에는 위안이 있”으며, 내면을 실현하는 ‘안의 공간’에서 “일체가 내밀한 존재에 맞도록 되어 있”8다는 것이다. 조금 더 내밀한 방식으로 공간을 확장해나가는 셈이다. 이 관점을 최근의 시인들이 구축하는 시적 공간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안의 공간’을 실현한다는 점에서 자신에게 매몰되는 자아의 모습에 우려를 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바슐라르의 말을 빌려본다면 이들의 시에서 “안과 밖은 서로의 기하학적인 대립 상태에 버려져 있지 않다.”9 안과 밖을 각각 이미지적 공간과 물리적 공간으로 치환할 수 있다면, 이미지적 공간에 대한 내밀한 탐구는 물리적 공간에 대한 확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서두의 논의대로 지금 여기에 ‘있음’으로 존재하는 이가 바깥을 향해 ‘열려 있는’ 것처럼 말이다.
2. 미래를 위한 공간 건축: 김연덕의 시
김연덕은 ‘안의 공간’을 열어 자신만의 시적 공간을 ‘건축’하는 일에 뛰어나다. 그런 의미에서 ‘짓다’라는 동사는 여러 의미로 유효하다고 할 수 있는데, 가령 그에게 한자루의 연필이 주어진다면 우선 그것은 시어와 시어, 문장과 문장을 느슨하게 연결하여 시를 짓는 것에 쓰일 테지만, 지어진 시 안에서 또다른 ‘짓기’를 위한 것으로 이내 쓰임을 달리할 것이다. 말하자면 이 두번째 ‘짓기’가 앞서 말한 자신만의 공간을 구축하는 일이며, 이는 시집 『재와 사랑의 미래』(민음사 2021)에도 잘 드러나 있다. 화자가 “내 안의 실내 건축가”(「나의 건설학교」)라고 스스로를 호명하듯 무언가를 ‘짓는’ 행위 앞에서 시인과 건축가(혹은 건설업자)는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시편 곳곳에 널브러진 금속 컴퍼스나 가위 같은 도구들과 철근, 벽돌, 콘크리트 같은 자재들 역
- 김광현 『거주하는 장소』, 안그라픽스 2018, 98면. ↩
- 안희연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창비 2015. ↩
- 「밤의 광장」, 『Lo-fi』, 문학과지성사 2018. ↩
- 「지혜의 혀」, 『호시절』, 창비 2020. ↩
- 박정은·이남주·이정철·황규관 대화 「촛불혁명의 현재와 촛불정부 2기의 과제」, 『창작과비평』 2021년 가을호 21면, 이남주의 말. ↩
- 최근의 시로는 『창작과비평』 2021년 가을호에 발표된 최지인의 시 「세상이 끝날 때까지」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는 2021년 2월 쿠데타를 일으킨 미얀마 군부에 대한 시민들의 항쟁과 ‘나’의 삶을 각각 “무너진 세상”과 “견고해 보이던 일상”과 같이 대비적으로 담아낸다. “무너진 세상이 일상이 되”어버린 이들을 떠올리면서 ‘나’라는 존재에 대한 물음을 거듭하는 화자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배경으로 삼는 미얀마 시민불복종항쟁(CDM)은 과거 우리의 6월항쟁과 겹쳐지며, 동시에 촛불혁명을 환기하는 부분이 있다. ↩
- 이에 대한 생각은 짧은 지면으로나마 밝힌 적 있다. 졸고 「시적 공간과 주체성의 영토」, 『백조』 2021년 봄호 참조. 졸고의 논의는 지금의 시적 화자들이 머무르는 공간은 다소 축소되어 있으나,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주체적으로 개척하여 자기 자신을 마주 보려 했다는 데 의미가 있음을 밝혔다. ↩
- 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곽광수 옮김, 동문선 2003, 379면. 인용된 릴케의 말은 ‘여기에는 거의 공간이 없다. 그리고 너는, 너무 큰 어떤 것이 이 좁은 곳에 들어와 있을 수 있기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거의 평정을 얻는다’(『말테의 수기』). ↩
- 같은 책 380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