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문학과 정치 논쟁의 진전, 남은 의문점

 

여름호 특집을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최근 이 주제를 토론의 중심에 올린 진은영 시인의 글에서 순수/참여의 이분법을 넘는 대안을 발견할 수 있어 좋았다. 한국의 문학전통에도 미학과 정치 중 어느 한쪽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양쪽 모두를 새로운 출발점에 세운 탁월한 성취들이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근대예술이라는 사조를 탄생시킨 르네쌍스운동이 전통의 재해석 작업에서 비롯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미학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딴사람의 시’를 다시 한번 ‘시작(始作)’하려면 획기적 전통을 비판적으로 상속하려는 접근이 어느 때보다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진은영이 김수영이라는 탁월한 전통으로 돌아갔다면, 정홍수와 권희철은 현재의 작업들에서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정홍수의 평론에서 질문을 던지고 싶은 부분은 권여선 소설이 보여주는 ‘적대와 모욕의 인간학’을 정치성의 의미있는 가능성으로 평가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윤리에 제압되지 않는 비루한 자기보존의 정치’가 과연 정치, 특히나 ‘나’와 ‘너’가 ‘우리’라는 집단적 주체를 이룸으로써 함께 해방된다는 의미에서의 정치라고 볼 수 있을까? 갈등과 적대에도 여러 종류가 있으며, 정치를 가능케 하는 갈등과 적대만큼이나 정치를 불가능하게 또는 극히 곤란하게 만드는 갈등과 적대도 있다는 점에서, 갈등과 적대와 폭력을 묘사한다는 것만으로 곧 정치성을 갖는다고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한편 권희철은 오늘날 정치를 짓누르는 가장 큰 제약이 냉소주의이며, 그 본질은 특정한 정체성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랑씨에르 식으로 말하면) ‘치안’의 질서라고 보는 것 같다. 이에 비해 도래하는 정치는 특정한 정체성과 귀속이 무화되는 ‘소통적 텅 빔의 가능성’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주어진 정체성에서 벗어날 것을 강권하는 충격요법이 과연 정치를 북돋울 수 있을까? 사실 그가 ‘주어진 정체성에 자신을 완전히 소진하는 삶’이라고 말한 ‘자기계발’이야말로, 유연화된 노동시장에 맞게 끊임없이 정체성과 소속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절연(絶緣)’과 ‘몰락’의 논리를 핵심으로 삼는 것이다. 특정한 정체성으로부터의 ‘해방’이 ‘박탈’의 공포로 체험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정체성들의 문제를 더욱 세심하고 정교하게 다루는 ‘갈등적 연대’가 정치의 필수적 의제로 등장하지 않을까 싶다.

류몽주 aporia96@gmail.com

 

 

공존공영의 동아시아를 향한 먼 길

 

한일병합 이후 100년, 태평양전쟁 종결 후 65년, 그리고 냉전종식 이후 2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한일관계엔 풀리지 않은 문제들이 산적하고 한반도분단은 고착화된 채 남아 있다. 어떤 의미에서 한반도는 여전히 ‘과거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공동체론은 그러한 과거의 시간을 극복하고 미래로 한걸음을 옮기려는 목소리라고 할 수 있다. 그 동아시아공동체를 이룩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구성원이 일본이기에, 일본의 ‘리버럴 보수’ 입장인 테라시마 지쯔로오와 백영서의 대담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올바른 역사인식은 필요하지만 정작 민주당정권이 한일병합 100년을 맞아 사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그의 입장은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이중의 주변의 시각’ ‘친미입아’ ‘핵 없는 세계’를 향한 그의 견해 속엔 충분히 평화지향적인 움직임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나 인상 깊었던 것은 오끼나와 미군기지에 대한 그의 견해였다. 단순한 기지 이전이 아니라 일본내 미군기지의 존재나 미일안보의 존재방식 자체가 본질적인 문제라는 점, 미국의 전쟁에 협력하기 위한 기지여서는 안된다는 점 등은 진정 앞으로 일본사회가 스스로 질문하고 해결해가야 하는 지점이다.

물론 지난 6월 하또야마 총리의 사퇴에서 알 수 있듯이 그 길은 지난한 과정이 될 것이다. ‘친미’와 ‘입아’가 아무리 양자택일이 아니라고 주장해도 지금까지 일본의 역사는 언제나 그것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이 점차 미국의 라이벌로 부상하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도 ‘친미입아’의 추구는 일본이 선택해야 할 길이 될 것이다. 테라시마 지쯔로오의 입장에서 그 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엿볼 수 있었으며 앞으로의 험난한 과정에도 불구하고 일본도 한반도와 함께 ‘과거의 시간’을 극복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해본다.

권혁은 he0424@naver.com

 

 

고통받는 자들 편에 선다는 것

 

공선옥 연재소설 「꽃 같은 시절」을 읽다가 한번도 “없는 놈 편이 되어준 적” 없는 세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소설은 복사꽃이 환하게 피는 남도의 한 마을에 석재공장이 들어서면서 ‘약한’ 사람들이 겪게 되는 고통과 그들의 “물 같고 풀 같은 싸움”을 밀도있게 그려낸다. 도시철거민에서부터 베트남 여성까지 제각각 사연을 안고 변두리로 밀려난 낭떠러지 인간군상은 쇄석기의 소음과 분진이 꽃향기마저 몰아내는 통에 원치 않는 싸움에 다시 휘말리게 된다. 자본은 눈이 멀고 정치는 눈치를 살피고 법과 언론은 구경만 할 때, 적의 덩치와 모양새를 가늠할 수 없어도 맞서 싸우는 것은 “없는 놈”뿐이다. “패배의 경험이 영혼을 좀먹을” 수 있다는 위험부담을 안고서도 공선옥은 왜 가난한 작가로서 가난한 사람들과 유랑하며 그 이야기를 힘겹게 적고 있는 것일까. 작가는 영희의 서투른 호소문을 빌려 명확하게 대답한다. “지금 이 순간, 숨쉬고 살아 움직이며 아프고 고통받는 구체적인 삶에 기반하지 않은 생각이나 활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라고. 공선옥 소설의 미덕은 어떤 기록보다도 현실에 충실한 허구로 우리를 일깨우는 데 있다. 어쩌면 순양에서 “꽃 좀 봐요” 하고 외치며 꽃을 날리고 있을지도 모를 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졌다. 없는 놈들 곁에 그녀가 있어 참 다행이다.

최석원 luvnomad@hotmail.com

 

 

김애란의 첫 장편, 두근두근 읽는다

 

김애란이 장편소설을 썼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는 이야기라니, 과연 어떨까? 「두근두근 내 인생」 첫회가 실린 여름호를 한여름 수박처럼 들고 다니며 어머니와 여자친구와 함께 읽었다. 우리 셋의 최소공배수는 김애란. 시골 사시는 어머니는 “야는 여름을 어째 이래 잘 아노? 육십 먹은 나도 이제야 알 듯 한데”라며 놀라셨고, 생물학을 전공하는 여자친구는 “열일곱 아버진 저 매미 울음소리가 ‘나랑 해, 나랑 해’라고 들렸대”라며 깔깔 웃었다. 그래도 가장 신난 건 바로 나.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가 되고 싶은 아버지’ 앞에 어머니가 풍덩! 나타난다. 여기저기서 ‘저예요’라고 외치며 온갖 생명들이 꿈틀거린다. 신나서, 젓가락행진곡 같은 그 문장들을 단숨에 읽었다.

그동안 읽은 이 작가의 단편들에 등장하는 새벽 골목길, 학원 옥상, 고시원 끝방에서는 스무살 무렵 서울생활을 갓 시작한 1980년생의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이 장편은 그간의 이야기와는 결이 다른 듯하다. 부모는 아무리 어려도 부모의 얼굴을 가지고 있고, 자연은 정답을 모르면서도 정답을 써내려간다는 자연의 본성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김애란의 글은 “‘바람’이라고 말할 때, 네개의 방위가 아닌 천개의 풍향을 상상”하고 있다.

배관표 kwanpyo@gmail.com

 

 

청소년문제를 직시하는 청소년문학을 바라며

 

여름호 오세란 평론 「‘완득이’ 이후」는 청소년문학의 개념이나 정체성이 갈팡질팡하는 때에 중요한 사실 몇가지를 짚어주었다. 특히 일부의 성인작가가 청소년을 대상으로 쓴 작품들이 진정한 청소년의 시각에서 씌어지지 못하고 작가 자신의 나르씨시즘적 회고에 그쳤다는 한계를 지적하고, 청소년문학의 역할을 ‘청소년에 대한 통념을 그들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며 균열을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역설한 점이 공감할 만했다. 요즘 청소년들은 학교교육에까지 침투한 무한경쟁의 논리 속에서 10대 후반부터 입시와 취업, ‘스펙’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어떻게든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상위 클래스에 들지 못하면 결국 헛수고가 되는 사회에서, 청소년문학은 청소년들에게 그 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아니, 답을 주는 것보다는 그 답을 고민하는 힘을 길러주는 게 진정으로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천안 북일고 3학년 선승범 mikuris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