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문학의 새로움과 소설의 정치성

황정은 김사과 박민규의 사랑이야기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주요 평론으로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세계문학의 쌍방향성과 미국 소수자문학의 활력」 「문학의 새로움과 리얼리즘 문제」 등이 있음. englhkwn@inje.ac.kr

 

 

 

요긴한 물음들

 

이 글은 소설이 어떻게 정치적일 수 있는가를 문학의 새로움과 관련지어 살펴보려는 것이다. 지난호 『창작과비평』 특집1 및 그간의 문학과 정치 논의를 참조하되 특히 소설의 정치성 논의의 요긴한 대목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이 논의는 “사회참여와 참여시 사이에서의 분열”2 때문에 괴로워하는 한 시인이 시가 어떻게 정치적일 수 있을까를 곡진하게 묻는 데서 시작되었다. 이를 두고 “모든 것은 한 시인의 진지한 고뇌로부터 시작”3되었다는 평이 나왔지만, 재등장한 시인은 그 ‘시작’의 연원을 ‘딴사람’들에게, 촛불항쟁과 용산시위에 참여하면서 비슷한 고민을 하는 동료 문인들, 나아가 4·19혁명을 전후하여 시와 정치에 관해 고뇌한 김수영(金洙暎) 시인에게 돌리고 있다(15~18면 참조). 요컨대, 문학과 정치 논의의 ‘배후’에는 촛불항쟁과 용산시위가 있었고, 이런 정치집회에 참여하거나 항의성명(가령 ‘작가선언 69’)을 발표하면서 문학에 대한 발본적인 물음을 되묻는 문인들이 있었다. 문학논의가 모처럼 ‘문학의 자율성’이라는 경계를 벗어나 시민/문인들의 광장에 나오자 그간 소원한 사이로 여겨졌던 문학과 정치는 서로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이임이 분명해진 것이다.4

이 논의의 시작에는 이처럼 촛불항쟁의 힘이 작용했을 터이지만 진은영(陳恩英)이 랑씨에르(J. Rancire)의 예술론을 원용하여 우리 시대 문학적 고민의 정곡을 찌른 것이 주효했다. 특히 논의를 촉발하는 도화선이 된 것은 시란 어떻게 미학적인 동시에 정치적일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었다. 이 물음에서 ‘정치’(la politique)와 ‘치안’(la police)의 구분—통상적인 의미와는 달리, 제도권 정치와 기타의 현실정치는 ‘치안’이고 기성의 ‘감각적인 것의 배분’을 바꾸는 일이 ‘정치’—이 중요한데, 사실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양자의 불가분한 상호관계에 대한 인식인지 모른다. 백낙청(白樂晴)은 랑씨에르의 입론을 호의적으로 평하면서도 “‘치안’에 대한 고민이 결여된 ‘정치’에의 관심이란 무관심과 무책임에 대한 일종의 알리바이로 기능할 우려가 없지 않다”고 지적한다.5 특히 “제3세계라든가 분단체제의 변혁과정에 놓인 한국의 경우 치안의 영역이 극히 불안정하며 ‘감각적인 것의 분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같은글 37면)는 것을 덧붙인다. 사실 ‘정치’와 ‘치안’은 ‘변증법적’인 관계인데, ‘분단체제의 변혁과정에 놓인 한국의 경우’는 세계체제의 중심부와 사정이 판이하다는 것도 주목할 일이다. ‘정치’와 ‘치안’에 대한 이런 변증법적이고 주체적인 인식은 소설의 정치성을 논할 때 더욱 유념할 대목이 아닐까 싶다.

소설의 정치성 논의는 리얼리즘 문제와도 직결된다. 지난호 『창비』 특집에서 정홍수(鄭弘樹)가 “소설의 발생과 전개에 힘들게 기입되고 뿌리내린 리얼리즘의 지향”(33면)을 주목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소설의 정치성 논의를 실답게 하려면, 사실주의와 리얼리즘을 구별하는 것이 관건이다. 정홍수도 “‘사실주의’의 협애한 시야”와 “모더니즘과의 대결을 거치며 그것의 극복까지 지향하게 된 보다 창조적인 ‘리얼리즘 문학’”(32면)을 대비시킨다. 그의 글은 김연수 권여선 공선옥 각각의 예술적 특성에 대한 이해와 섬세한 읽기가 돋보이는데, 서두에서 거론한 ‘리얼리즘의 지향’과 이런 구분법이 충분히 활용되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기왕에 ‘치안’과 ‘정치’의 구분이 중요하게 거론되었으니 이와 관련지어 ‘사실주의’와 ‘리얼리즘’의 차이를 짚어보면 이렇다. 맑스주의 문예론의 전통에서 ‘현실의 사실적 재현’을 뜻하는 사실주의(자연주의)는 독자적으로는 ‘치안’의 경계를 넘어서기 힘들다. 사실주의는 단지 ‘현실’로 주어지는 (랑씨에르의 표현법에 따르면)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말할 수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리얼리즘은 환경과 인물의 ‘전형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현실’의 핵심이 무엇인지 물을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치안’의 경계를 넘어 ‘정치’의 영역에 개입할 가능성이 열린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말할 수 있는 것’, 즉 ‘감지 가능한 모든 것’ 가운데 어느 부분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를 판단하고 나아가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 말할 수 없는 것’에 관심을 보일 수 있겠기 때문이다.6 사실주의와 리얼리즘이 이런 뚜렷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는 까닭도 눈여겨볼 점이다. 그만큼 현실세계에 대한 사실주의의 과학적·실증적 인식이 근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핵심적 진실을 탐구하는 데 요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치안’과 ‘정치’의 관계와 유사한 이유로 그 요긴함의 정도는 ‘제3세계라든가 분단체제의 변혁과정에 놓인 한국’의 경우 세계체제의 중심부보다 한결 더 크다.7

이쯤해서 진

  1. 『창작과비평』 2010년 여름호 특집 ‘문학의 정치성을 다시 묻는다’에는 진은영 「한 시인의 진지한 고뇌에 대하여」, 정홍수 「소설의 정치성, 몇가지 풍경들」, 권희철 「당신의 얼굴이 되어라」, 유희석 「세계체제의 (반)주변부의 근대소설」이 실렸다. 앞으로 이 글들의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밝힌다.
  2.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69면.
  3. 신형철 「가능한 불가능: 최근 ‘시와 정치’ 논의에 부쳐」, 『창작과비평』 2010년 봄호 370면.
  4. 시(문학)와 정치의 만남을 꺼려하거나 불편해하는 평자들도 적지 않지만, 이런 평자들의 부정적 반응조차 논제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런 평자들 각각에 대한 적절한 논평으로는 신형철, 앞의 글 370~77면 참조, 2000년대 문학의 흐름에서 보면 시와 정치 논의는 근대문학 종언론에 대한 지연된—촛불항쟁 덕분에 발본적이 된—대응의 측면이 있다.
  5. 백낙청 「현대시와 근대성, 그리고 대중의 삶」, 『창작과비평』 2009년 겨울호 36~37면. 이에 대해 신형철과 진은영은 각각 공감하는 반응을 보인다. 신형철, 앞의 글 377면 및 진은영 「한 시인의 진지한 고뇌에 대하여」, 26면 참조. 진은영은 이 글에서 김수영의 문학적 사유가 랑씨에르의 미학적 정치성의 예술론을 ‘선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문학적 자율성이란 문학적 타율성과 떼어놓을 수 없고 ‘치안’에 대한 고민이 ‘정치’에 대한 관심 못지않게 치열했음을 강조한다.
  6. 백낙청은 맑스주의의 전통과도 다르게 ‘전형성’이나 ‘재현’보다 ‘시의 경지’를 더 핵심적인 것으로 보며 ‘시’(문학)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수행하면서 어떤 경계도 두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치안’과 ‘정치’의 경계에도 매이지 않을 듯하다. ‘시의 경지’와 관련된 리얼리즘 논의는 백낙청 「시와 리얼리즘에 관한 단상」(1991),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창비 2006 참조. 이 주제에 대해서는 졸고 「문학의 새로움과 리얼리즘 문제」, 『창작과비평』 2009년 여름호 256~59면 참조.
  7. 이에 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백낙청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21면 및 「현대시와 근대성, 그리고 대중의 삶」 33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