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백낙청 리얼리즘론의 문제성과 현재성 

 

류준필 柳浚弼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HK교수, 국문학. 주요 논문으로 「분단체제론과 동아시아론」 등이 있음. pilsotm@inha.ac.kr

 

 

1. 들어가며

 

『창작과비평』(이하 『창비』)2000년대 이후 문학론을 선도하고 있지는 못한 듯하다. ‘분단체제론’ ‘동아시아론’ ‘87년체제론’ 등 위세높은 ‘창비담론’ 속에서 명실상부한 창비의 문학담론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이 원인이 『창비』에 있는지 ‘문학’ 자체에 있는지를 가늠할 식견이 내게는 없다. 즉 이것은 『창비』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서 주도적인 문학론을 창출했다는 뜻과는 무관하다. 『창비』의 지난 역사를 돌아보았을 때 문학론의 약화가 더욱 뚜렷하게 확인된다는 말이다. 국외자의 이러한 인상이 사실이라면, ‘민족문학’의 거점이던 『창비』로서는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까 싶다.

이에 대해 탐문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시선을 백낙청(白樂晴)에게로 먼저 돌리게 된다. 지난 시절 『창비』를 대표하는 민족문학론을 정립한 당사자이면서 분단체제론이라는 대표적 창비담론의 창안자이기 때문이다. 특히 분단체제론을 제안한 이후로 『창비』의 독자적 문학론이 분명하게 제시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보자면 문학론 약화의 일차적 이유가 백낙청에게 있을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뿐만 아니라 백낙청의 행적은 『창비』의 긴 시간대에 거의 대부분 걸쳐 있으므로 『창비』의 문제에 백낙청을 우회하여 접근하기는 어렵다. 근자에 들어 백낙청 스스로가 비교적 적극적으로 문학비평의 현장에 개입하는 사정을 감안할 때 백낙청을 통해 창비』 문학론의 현주소를 더 적실하게 가늠할 수 있을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창비』 나름의 문학론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90년대 한동안 치열하게 진행된 리얼리즘/모더니즘 논란을 주도한 곳이 『창비』였다. 이른바 근대성 담론과 결부되어 자못 진지하고 열의에 찬 문학론들이 개진되었다. 그러다가 리얼리즘/모더니즘의 해소론이 제기되고 모더니즘에 대한 오해의 시정을 촉구하는 문제제기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창비』 또한 새로운 문학론의 정립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경주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창작되는 작품의 양상들이 기존 『창비』의 문학론에 그다지 우호적인 방향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이로 인해 『창비』의 문학론 자체가 분명한 경향성을 드러내지 못한 듯하다. 비교적 현재까지 이러한 양상은 지속되고 있다. 이런 맥락을 고려하며 백낙청의 문학론을 다시금 살필 것이다. 다만 그 특성과 변모의 과정이 함께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민족문학론에 대한 개괄적 논의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2. 특이한 ‘문학주의’—민족문학론과 분단체제론의 문학론

 

‘민족문학’은 분명 60~70년대 민족운동의 산물이다. 민족사학(史學)이나 민족경제론 등과 더불어 민족운동을 견인한 주요 동력이었다. 그렇지만 그 근본에서 보자면 민족문학론은 여타의 민족운동과 구별되는 특이한 자리에 놓인다. 민족경제론이 자주적 자립경제를 지향하고 민족사학이 자주성이 실현되는 시대를 추구할 때, 여기엔 도래할 미래를 예비하는 현재의 기획이 작용한다. 반면 민족문학론은 ‘민족적인 것=문학적인 것’에 근거한다. 민족사학이나 민족경제론에서 확인되는 ‘선진(先進)을 따라잡기 혹은 추월하기’의 염원이 민족문학론에서는 상대적으로 희박하다.

이것은 한국문학의 전반적 양상이 후진적이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한국문학 속에 이미 ‘민족문학’의 범례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한용운의 문학적 성취가 카프카나 까뮈보다 선진적이라는 평가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1 민족문학은 현재를 바꾸어 새로운 미래를 만듦으로써 획득된다기보다, “구체적 현실”을 직시하고 창조적으로 대응하는 데서 등장한다. 민족사학이나 민족경제론과 달리 민족문학론은 늘 현재적 작업이어야 한다. 도달해야 할 목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민족문학은 그 도정에서 지속적으로 생산되어야 한다. 따라서 문학 그 자체가 민족적 선진성과 세계적 동시대성의 구현을 가능하게 하며, 그러한 문학의 이름이 ‘민족문학’일 뿐이다.2

민족문학은 민족의 다양한 활동영역 중 하나지만, 우리 민족이 자주성의 실현을 감당할 만한 자격을 이미 갖추었음을 보증하는 역할도 한다. 민족문학을 통해 민족적 현실에 내재하는 선・후진적 다양성의 측면들을 잘 분별하는 인식능력도 구비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민족적 과제를 실현하는 데도 필요하지만 과제를 달성한 이후에도 필요한 자질이다. 따라서 민족문학의 창조성은 처하는 순간마다 실현되어야 한다. 민족문학이 다른 더 고상한 무엇에 복무하는 수단일 수 없고, 다른 사안의 급박성 탓에 유예될 성질의 것도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민족문학을 단순히 ‘민족의’ 문학으로 치환할 수는 없다. 민족문학이 ‘민족’에 귀속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민족문학의 ‘문학(적 창조성)’이 민족(적 현실)을 규제할 수도 있다. 훗날 백낙청 스스로가 자신이 “꽤 완고한 문학주의자”3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듯하다. 이렇게 볼 때 민족문학의 ‘문학’은 민족이라는 제약을 넘어서기도 한다. 민족적 활동 및 현실의 일부지만 단순히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간 다양한 민족문학론이 존재했지만 대부분 ‘정답주의’로 귀결되고 말았다고 비판하면서4 백낙청 자신의 민족문학론은 정답주의와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유도 이 어디쯤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이것은 결국 ‘민족문학’이 ‘민족’과 ‘문학’ 어느 한쪽으로 귀착되지 않는 긴장을 내포한 개념으로 이해하게끔 만든다. ‘민족문학’이 논쟁적 개념이고 따라서 한시적으로 유효한 개념이라는 말은,5 ‘민족문학’ 자체의 용도 폐기 여부보다는 ‘민족’과 ‘문학’ 사이의 긴장어린 관계설정 방식을 재정립하는 작업을 뜻한다. 분단체제론의 전개가 역설적으로 보여주듯이, 민족문학론의 ‘민족’은 “발전을 내포한 연속성”을 띠면서 분단체제론으로 전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민족’은 “한민족과 한반도 주민”으로 함의가 바뀌었다. 민족문학론의 사회(?)담론으로의 전환은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하겠지만6 ‘민족’(분단체제론)과 헤어진 ‘문학’의 자리는 아직 모호하다.

민족문학의 한 측면(‘민족’)이 분단체제론으로 전화되었다면, 민족문학 이후의 문학은 ‘분단체제극복에 기여하는 문학’이 되어야 마땅하다. 애초에 분단체제론의 문제의식이 향하는 것은 “‘민족’ 개념이기보다 전지구적 현실인식이요 이에 따른 국지적 행동의 필요성”이고,7 “한민족과 한반도 주민들의 경우 분단체제극복이라는 중간항의 비중이 결정적임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분단체제론은 “세계체제, 분단체제, 남한 또는 북한의 체제”라는 세가지 다른 차원을 내포한 것이며, 남북의 주민과 정부의 작용까지도 섬세하게 고려해야 하는 “다원고차방정식”에 가깝다.8 그러므로 ‘분단체제극복에 기여하는 문학’ 또한 다원고차성에 조응하는 문학이어야 한다.

한국만 하더라도 세가지 차원의 체제가 작용하고 그에 조응하여 다양한 문제와 노선이 존재할 수 있다. 분단체제극복운동의 일상화를 주장할 당시 백낙청은 ‘계급담론’ ‘생태계(환경)문제’ ‘여성운동’ 등을 거론했고, 이후에 다시 생태계 보존, 성차별 철폐, 전지구 차원의 빈곤 해소, 자본주의의 반문학성에의 저항 등을 통해 문학담론의 다원화 현상을 지적했다.9 여기에다 성적 소수자, 디아스포라, 이주노동자 등을 추가할 수 있고 거기에 다시 적잖은 항목을 덧붙여도 무방해 보인다. 앞으로 더 늘어나기 십상인 문제항목들 앞에서 백낙청이 주장하는 바는 분단체제극복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상호연대의 필요성이었다.

다원화된 담론이 분단체제의 제약을 받는 것은 분명하지만, 분단체제론이 그 모두를 통합할 수는 없다. 백낙청도 애당초 분단체제극복운동이

  1. 백낙청 「민족문학 개념의 정립을 위해」, 『민족문학과 세계문학Ⅰ』, 창작과비평사 1978, 134~36면. 이하 백낙청의 글은 필자 이름을 생략한다.
  2. 이 글에서 민족문학론을 본격적으로 다루기는 어렵다. 필자 나름의 기본 인식만 보이도록 한다.
  3. 백낙청・황종연 대담 「무엇이 한국문학의 보람인가」, 『백낙청회화록 5』, 창비 2007, 239면.
  4.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19면.
  5. 「민족문학 개념의 정립을 위해」, 125면; 「서장: 민족문학, 세계문학, 한국문학」,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창비 2006, 21~22면; 「2000년대의 한국문학을 위한 단상」, 같은 책 191~92면 등.
  6. 졸고 「분단체제론과 동아시아론」, 『아세아연구』 52권 4호, 63~65면; 「통일운동과 문학」, 『민족문학의 새 단계』, 창작과비평사 1990, 129~30면 참조.
  7. 「2000년대의 한국문학을 위한 단상」, 193면.
  8. 「분단체제극복운동의 일상화를 위해」, 『흔들리는 분단체제』, 창작과비평사 1998, 18~26면.
  9. 「분단체제극복운동의 일상화를 위해」, 36~52면; 「2000년대의 한국문학을 위한 단상」, 19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