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복지국가는 진보의 대안인가

이태수・김연명・안병진・이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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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균

 

이일영 (사회) 이번 좌담은 복지국가론을 주제로 마련했습니다. 기획취지는 크게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62지방선거 후 정치적인 계기가 새롭게 마련됐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속에서 복지에 대한 수요가 재인식된 점입니다. 정치발전이나 진보논쟁의 진전을 위해서도 복지국가 담론을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동안 창비에서는 진보담론을 세계적 수준에서 발전시키고 현실에 적합한 형태로 재구성하는 데 관심을 가져왔는데, 이 좌담을 통해서 국가전략과 정치프로그램으로서의 복지에 대해 검토해보고자 합니다. 나아가 복지국가라는 것이 향후에 대안적인 패러다임으로서 잘 정착될 수 있을지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이번 토론을 위해 세분의 전문가들을 모셨습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이태수 선생님, 사회복지학 분야에서 활동해오신 김연명 선생님, 그리고 이 주제가 독자들에게는 다소 전문적인 얘기로 들릴 수도 있겠다 싶어 정치적 맥락을 폭넓게 짚어주실 안병진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사회를 맡은 저는 비전문가 입장에서 좀 무식한 질문을 드리거나 시비를 거는 악당 역할을 해야 할 듯한데, 너그럽게 용서해주시면 좋겠습니다.(웃음) 우선 자기소개를 겸해 최근의 복지상황을 어떻게 보시는지 얘기하는 것으로 좌담을 시작하겠습니다. 주제를 정하면서 처음 떠올린 것이 요즘 복지담론의 정책화에 주력하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활동이었는데, 이태수 교수님께서 먼저 말씀해주시죠.

 

李兌洙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 교수. 저서로사회복지전달체계의 개편과 민관협력 등이 있음.

李兌洙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 교수. 저서로사회복지전달체계의 개편과 민관협력 등이 있음.

이태수 제가 복지국가소사이어티를 창립하는 과정에 참여를 했지만, 최근에는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이름으로 좀더 많은 활동을 하고 있지요. 저는 경제학으로 학위를 마치고 국내 사회경제문제를 천착하다 복지분야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어요, 김영삼정부 시절 공무원과 민간 종사자들을 위한 정부교육기관에 발을 들여놓은 뒤로 지금까지 복지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죠. 많은 분들이 제게 왜 경제학을 했는데 복지분야에서 가르치고 있느냐고 합니다. 바로 이 부분이 아직도 우리 사회가 복지학이나 복지정책의 특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단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후 김대중정부 시절부터 현실의 복지제도 기획과 입안, 실행에 참여했는데, 참여정부 때는 보건복지부 산하의 한국보건복지인력개발원장으로서 사회복지 인력을 교육하고 전문성을 강화하는 일도 했습니다. 복지국가가 어떻게 한국사회에 제대로 빨리 확립될 수 있을 것이냐를 고민하며 시민사회활동을 해왔죠. 그런데 현정부 들어서는 정책에 관여 또는 참여하거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통로가 별로 없어요. 그래서 복지국가소사이어티나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서울복지시민연대 같은 곳들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모색중입니다. 최근에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우리 사회에서 복지의 필요성을 알리는 데 주도적이라고 평가받는데요, 앞으로 이러한 싱크탱크가 많이 생기고 또 운동도 활성화되기를 바랍니다.

 

金淵明 중앙대 교수, 사회복지학. 저서로사회투자와 한국 사회정책의 미래 노동시장 유연화와 노동복지(공저) 등이 있음.

金淵明
중앙대 교수, 사회복지학. 저서로사회투자와 한국 사회정책의 미래 노동시장 유연화와 노동복지(공저) 등이 있음.

김연명 저는 학부와 대학원에서 모두 사회복지학을 공부했습니다. 80년대 중반 대학원에 진학했을 당시는 사회구성체논쟁이 한창이었고, 사회복지라는 것 자체가 소위 대표적 ‘개량주의’였죠. 개량주의적 학문을 한다는 눈총을 많이 받았습니다.(웃음) 실제로 진보진영에서 복지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그룹이 없었어요. 진보적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하신 분들이 복지는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창비 같은 잡지에서 복지국가를 주제로 좌담이 열리는 걸 보니 격세지감도 드네요. 어쨌든 진보개혁 쪽 분들이 복지 연구를 백안시했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복지가 좀더 일찍 발전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진보적 사회과학자들, 특히 경제학자들이 복지국가, 사회복지를 열심히 연구해야 된다고 봅니다. 유럽에서 복지국가 같은 거시적 주제는 경제학, 정치학의 영역입니다. 담론구조가 워낙 방대하니까요. 예컨대 우리나라가 복지국가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제도 중 하나가 바로 연금입니다. 앞으로 금융시장, 가족의 삶 등 사회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텐데, 경제학이나 정치학, 사회학 쪽에서 연금제도와 관련해 연구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그렇게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제도분석에 기반을 두지 않은 채로 담론 중심의 추상적인 얘기에 매몰되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안병진 저는 정치학자로서 전공이 대통령제다 보니까 연금이나 의료보험 같은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고, 잘 모르는 입장에서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좀 곤혹스럽네요. 게다가 하필이면 가장 시장주의적인 복지정책을 취하는 미국에서 유학을 했거든요.(웃음) 제가 미국에 머물 당시 클린턴 행정부가 의료보험 개혁을 하다가 대실패를 했지요. 하지만 거기서 좌절하지 않고 단계적으로 조금씩 진전시켜가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뉴욕시 같은 경우는 저소득층 어린이보험을 마련했는데, 그 덕분에 저희 가족도 적지않은 혜택을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한국의 진보정부라면 큰 담론을 통해 큰 계획을 세우는 것도 좋지만, 작더라도 의미있는 성과들을 하나하나 축적하고 시민들이 체험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제가 과거 참여정부를 다소 과하게 비판했던 것, 특히 ‘2030플랜’에 대해 냉소적인 편이었던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진보개혁진영의 과거와 미래를 볼 때, 우리에게 미국 복지의 사례도 시사점이 있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태수 미국에 계시면서 그렇게 감동하셨으면 뭐, 스웨덴 이런 데서 공부하시거나……

 

안병진 그랬으면 귀국하자마자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 가입했겠죠.(웃음)

 

李日榮 한신대 교수, 경제학. 저서로새로운 진보의 대안, 한반도 경제 중국 농업, 동아시아로의 압축 등이 있음.

李日榮
한신대 교수, 경제학. 저서로새로운 진보의 대안, 한반도 경제 중국 농업, 동아시아로의 압축 등이 있음.

이일영 우리의 학문이나 운동, 정치가 거대담론과 이념논쟁으로 흐르는 풍토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산업문제를 중심으로 전공을 해서 비교적 덜한 편이었고 반성도 빨랐다고 자평합니다(웃음).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면서 바로 스물여덟개 국가들이 체제전환을 하는데, 실제로 그 전환과정이 거시적인 체제이행의 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지요. 매우 지루하고 점진적이고 복잡한 과정이 있었고, 지금도 문제를 안고 있는 상태지요. 경제학 쪽에서도 큰 흐름에서 보면 상당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문제를 보는 방법론을 재검토했습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미시적인 관점으로 이행 또는 보완이 없이는 현실문제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게 됐죠. 그것이 경제학의 세계적인 흐름이라고 보이는데, 어떻게 보면 우리가 좀 뒤늦게 좇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우리가 대단히 격렬한 사회변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화제를 바꿔보면, 우리가 복지라는 더 구체적인 문제로 내려오게 된 데는 지난 62일의 지방선거가 큰 계기였죠. 사상 최초로 지방권력의 이동이 일어났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는데, 그 원인을 따져보면 하나는 MB정부에 대한 반감을 들 수 있겠고, 다른 하나는 무상급식 문제로 대표되는, 국민에게 내재된 복지 수요가 표면화되었다는 의견도 있겠습니다. 이명박정부는 ‘복지정책이 없는 정부’라는 시각도 있으니 우선은 이 문제를 짚어보고 이어서 무상급식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한국사회, 복지에 눈을 떴나

 

安秉鎭 경희사이버대 교수, 정치학. 저서로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와 보수주의 위기의 뿌리 노무현과 클린턴의 탄핵 정치학 등이 있음.

安秉鎭
경희사이버대 교수, 정치학. 저서로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와 보수주의 위기의 뿌리 노무현과 클린턴의 탄핵 정치학 등이 있음.

안병진 두가지 이슈 중에서 하나는 자유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빵의 문제지요. 이 자유와 빵의 문제에 관해 국민의 인식이 높아진 게 아닌가 합니다. 자유의 문제라는 것은, 시민의식이 성장하면서 국가가 연예인마저 관리・규제하려 드는 다분히 봉건적인 행태에 대한 반감이겠지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양극화의 심화, 중산층의 약화에서 비롯됐는데, 어떤 분은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늘어나고 실제 중산층은 줄어드는 현상을 지적하더군요. 그게 맞는다면 사회적인 불안의식 속에서 자유와 빵이라는 두가지 문제가 함께 나타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태수 저도 이번 지방선거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선거혁명이라는 표현도 있었지요. 어떻게 보면 한국사회가 역사적으로 품고 있던 역동성이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해요.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어냈고, 또 이명박 대통령을 500만표 차이로 당선시켰고, 그러다가 이번에는 지방권력을 완전히 바꾸어버렸죠. 적어도 영남과 비호남을 제외하고는 예측하지 못했던 결과예요. 여기에는 안병진 선생 말씀대로 자유와 빵이라는 근본적 가치를 돌아보게 하는 이명박정부의 혁혁한 공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웃음)

그런데 복지, 보편적 복지, 무상급식 같은 것들이 그 결과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느냐 하는 문제가 남지요. 어떻게 보면 반MB정서가 지배적이었고, 복지는 하나의 슬로건 정도일 뿐 복지 때문에 야권을 선택한 건 아니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번 계기로 복지의 중요성에 대한 국민적 무의식의 각인이랄까, 복지에 대한 발견이 내적 동력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민주당을 인정하거나 가능성을 높이 사는 편이 아닌데, 어쨌든 이네들이 ‘보편적 복지’까지 내걸었다는 점을 복지주체세력이 좀더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복지에 대해 계속 책임지고 가게끔 만들 것이냐 하는 전략을 세워야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게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신뢰하기 어려운 정치집단들이 복지를 내걸고 선거에서 표를 구했기 때문에, 국민의 눈에는 진보개혁진영에서 복지를 추구하는 쪽과 한묶음이 돼버린 거죠. 복지를 내세웠던 정치인들의 실패가 자칫하면 진보적 복지진영의 실패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으로서는 현실정치권과 진보적 복지주체세력이 당분간 협력관계를 맺고 성공적인 모델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일영 그런데 복지주체세력이라고 하면 어떤 집단을 가리키는 건가요?

 

이태수 다분히 주관적일 수 있겠는데, 이번에 복지문제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는 분들까지도 포함할 수 있겠지요. 대개 진보를 표방하시는 분들은 복지문제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논리적・이념적 근거나 고리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복지세력=진보진영’이라는 등식은 너무 포괄적이겠지만, 운동적 차원에서 복지를 핵심영역으로 삼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같은 단체, 복지를 내세우는 지식인, 싱크탱크 등이 핵심이 되지 않을까 해요.

 

김연명 이번 지방선거가 한국사회의 미래와 관련해서 중요한 포인트를 던져주었다고 보는데요, 바로 무상급식으로 상징되는 이슈가 그것입니다. 상당수 사람들에게 IMF 외환위기 전까지는 대학 들어가 열심히 공부해서 취업하면 삶이 보장되는 것이었는데, 외환위기를 겪으면서는 그런 믿음이 깨지고 삶이 예측가능하지 않게 된 겁니다. 직장에서 언제 잘릴지, 집을 장만할 수 있을지, 나이들어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게 된 거죠. 사회가 이렇게 불안해지고 삶의 안정성이 낮아져서는 안되겠다는 잠재적 의식이 깔려 있었던 거죠. 물론 무상급식이 정치적 의제로 떠오른 것은 우연이죠. 김상곤 교육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우연한 계기에 의해 잠복해 있던 기대와 요구가 정치의 힘을 빌려 의제화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태수 특히 김문수 지사의 공을 언급해야 하지 않을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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