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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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

1964년 경기 용인 출생. 2003년 『문학동네』로 등단. 장편소설 『고래』 『고령화 가족』, 소설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가 있음. chun_kwan@hanmail.net

 

 

 

봄, 사자(死者)의 서(書)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이제 죽음의 시간이구나! 비로소 육신을 벗어던진 영혼은 바람처럼 가볍게 하늘을 날아다닌다. 무엇이든 생전 마음에 와닿는 일 드물었으나 이제 자유로운 영혼은 활짝 열린 하늘처럼 모든 것을 품어 안는다. 아무것도 부딪치는 법 없고, 아무것도 거스르는 일 없이 서로 섞이고 녹아들어 하늘 아래 펼쳐진 세상은 창세(創世)의 모습 그대로 넉넉하구나. 수십억년 거듭되어왔으나 한번도 궤도를 벗어난 적 없던 태양은 황도(黃道)를 따라 운행하다 동쪽 하늘을 모두 태워버릴 듯 세차게 타오르며 어둠속에 느른하게 잠들었던 만물을 하나씩 일으켜 세운다.

 

사내는 잔디밭에 누워 있다. 벗어던진 구두 한짝은 발치에 나뒹굴고 이슬에 젖은 회색 양복은 잔뜩 구겨진 채 여기저기 짙은 풀물이 들어 있다. 밤새 까뭇하게 자라난 수염은 턱선을 따라 길게 이어져 깡마른 얼굴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그는 이미 죽은 것인가? 무방비로 벌어진 입가엔 아직 토사물의 흔적이 남아 있고, 밤새 눈물이라도 흘렸는지 찡그린 눈가엔 눈물자국이 허옇게 말라붙었다. 공원 너머,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엔진소리가 시끄러워지면서 공원에 내리쬐는 햇볕은 점점 더 넓게 퍼져나간다.

꿈틀, 소나무 아래 죽은 듯 누워 있던 사내가 추위를 느끼는지 부르르 몸을 떨며 목을 잔뜩 움츠린다. 입에선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음소리도 새어나온다. 이때 붉게 물든 동쪽 하늘에 불쑥, 불덩어리 하나 솟아오르면 구름의 꿈을 품은 안개가 바닥을 차고 서서히 비상하기 시작한다. 다시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날카로운 햇빛은 사내의 눈꺼풀을 꿰뚫듯 내리쬔다. 악몽이라도 꾸었을까? 잠결에도 한사코 팔을 들어 해를 가리던 사내는 어느 순간 신음소리를 내며 벌떡, 몸을 일으킨다.

여기가 어디지? 생경한 녹색의 풍경에 맞닥뜨린 사내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하지만 곧 의식이 되돌아오자 잊고 있던 현실이 찾아온다. 짧은 망각 뒤에 더 억센 힘으로 옥죄어오는, 아무리 힘주어 밀어내봐야 단 일밀리미터도 도망칠 수 없는! 매일 되풀이되는 절망과 무기력 앞에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통스럽게 머리를 감싸쥔다. 그것은 연극배우의 상투적인 제스처가 아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프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속이 메슥거리고 누군가에게 밤새 두들겨 맞은 듯 온몸의 뼈마디가 욱신거린다. 토할 수 있다면 모두 토해내 보여줄 수도 있다. 하지만 간밤의 어느 골목, 어느 가로등 밑에서인지 여러번 질펀하게 토한 끝이라 더이상 보여줄 게 없다. 몇번의 헛구역질 끝에 그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노간주나무 위에서 시끄럽게 지저귀는 참새들을 노려본다. 그래서 새들이 잠시 울음을 멈추었을까? 아니면 사내의 절망적인 눈길을 피해 달아났을까? 봄볕이 내리비치는 공원은 생명의 조화로 가득 차 있지만 새들은 결코 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를 비웃듯 나뭇가지를 옮겨가며 더욱 시끄럽게 지저귄다.

짹짹!

 

사내는 발치에 나뒹굴던 구두를 겨우 꿰어 신고 비척비척 잔디밭을 가로질러 걸어간다. 검은색 레깅스를 입은 중년의 남자가 산책로를 따라 뛰어간다. 짧은 다리로 어기적거리며 달리는 모습이 매우 희극적이지만 그는 웃지 않는다. 고통을 웃음으로 대응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는 공원을 빠져나가는 길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며 자신이 간밤에 어쩌다 공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언제부터 잔디밭에서 잠들었는지 기억을 되살려보려고 하지만 숙취로 흐리멍덩해진 머릿속에선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몇 발짝이나 걸었을까? 다리에 힘이 풀리고 다시 위장이 뒤틀린다.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구역감을 애써 참느라 얼굴은 잔뜩 일그러진다. 그는 연분홍 철쭉이 만발한 산책로를 따라 걷다 가까운 벤치에 털썩 주저앉는다. 습관처럼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를 찾는다. 하지만 손엔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이런! 당황한 그는 양복에 달린 모든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지만 바지주머니에 들어 있던 일회용 라이터만 손에 잡힐 뿐이다.

 

빨리 공원을 빠져나가 진한 커피를 한잔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욕망이 간절하다. 수십년간 영혼을 사로잡힌, 숱한 슬픔과 바꾸어낸, 씁쓸하고 치명적인!

새들은 더욱 요란하게 지저귀고 사내는 일어설 생각도 않은 채 벤치에 기대앉아 라이터만 찰칵거린다. 그의 눈길은 산책로를 따라 운동하는 사람들의 뒤를 무심하게 뒤쫓다 방금 물감을 짜낸 듯 선명한 연분홍 철쭉에 잠시 머문다. 봄날, 생명의 약동으로 소란스런 공원은 시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의 눈엔 왠지 잡지광고의 한 장면처럼 모든 게 현실감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현실은? 술에 찌든 몸과 담배 한갑 없는 빈 호주머니? 사내는 어디서든 푹신한 이불을 덮고 한숨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난 뒤 따뜻한 물에 목욕하고 깔끔하게 면도도 하고 싶다. 그런 다음 설렁탕도 한그릇 먹고 싶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담배를 피우고 싶다. 그는 여전히 라이터를 찰칵거린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사내는 자신의 몸이 점점 더 쇠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때, 타이트한 운동복을 입은 여자가 단단한 엉덩이를 실룩이며 그의 앞을 지나쳐 달려간다. 절망과 관능이 뒤섞인, 찬연한 봄날이다.

 

잠시 후, 그는 고통스럽게 몸을 일으킨다. 아무 데도 갈 데가 없지만 공원은 그에게 어울리는 곳이 아니다. 더구나 초췌한 몰골에 구겨진 양복을 입은 그의 모습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어차피 시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사라지게 되어 있다. 그는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따뜻한 봄 햇살이 그의 지친 등에 부드럽게 내려앉는다. 이윽고 서쪽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은 듬성듬성 새치가 섞인 그의 축축한 머리를 스쳐간다. 속이 가라앉으며 몸도 조금 가벼워진 기분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한줄기 바람이 불어오고 그는 가볍게 허공으로 떠오른다.

어어!

당황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라이터를 놓친다. 내 라이터! 황급히 손을 뻗어보지만 라이터는 이미 땅에 떨어지고 그의 몸은 소나무 꼭대기를 지나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다. 현기증이 난 그는 질끈 눈을 감았지만 바람을 타고 둥실둥실 떠오르는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다. 천근만근 무거웠던 몸이 민들레 꽃씨처럼 가벼워진 느낌이다. 두려움이 조금 가시자 그는 눈을 뜨고 이륙하는 비행기에서 지상을 내려다볼 때처럼 공원의 전경을 내려다본다. 조감도인 듯 공원의 색채는 선명하고 산책로를 따라 조깅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작아진다. 그는 문득 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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