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시, 그리고 사물의 부재

고형렬 이정록 최승호의 시집들

 
 

고봉준  高奉準

문학평론가. 평론집 『반대자의 윤리』 『다른 목소리들』 『유령들』이 있음. bj0611@hanmail.net

 

 

 

1. ‘젊은 시’의 외부

 

지난 몇년, 젊은 시의 미학적 전위성에 문단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시에 관한 우리의 인식도 한단계 상승했다. 시적 문법과 상상력의 변화, 또는 미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사유로 요약되는 젊은 시의 실험성은 새삼 문학의 시대성을 설명해주는 풍요로운 틀을 마련했다. 특히 현실적인 균열을 서정적 동일성으로 봉합하지 않고, 그 균열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전혀 다른 시적 문법이 주류를 이룬 것은 무시할 수 없는 2000년대 시의 성과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젊은’이라는 비평적 호명을 생물학적인 잣대와 동일시함으로써 ‘젊은 시’의 외부를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만들어버렸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문학적 연속성이 세대적 경계에 의해 단절로 경험되게 만들고, 한 시대의 문학적 공과를 특정 세대(중견)의 책임으로 돌리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의 시는 ‘젊은 시’와 ‘젊은 시가 아닌 시’로 양분되는 듯하고, 이 새로운 분류법에 따라 ‘중견’이라는 단어는 비판과 극복의 대상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암묵적 평가가 90년대 중반 이후 시의 주류적 흐름이던 생태학적 상상력에 대한 비판적 거리두기의 일종임을 모르지 않지만, 우리는 종종 한사람의 시인이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언어뿐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이 집단적 망각을 배경으로 세사람의 중견시인들이 최근 출간한 시집을 읽는다.

 

 

2. 변신, 사물이 언어가 되는

 

고형렬(高炯烈)의 시집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창비 2010)는 ‘장미’가 ‘책’이 되는 거짓말 같은 변신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 이야기의 첫 구절은 이렇다. “침대에서 어둠과 빛으로 뒤척인 우울의 날/붉은 장미가 몸을 뒤집고 한 권의 책으로 태어났다”(「장미가 책이」). 이 변신이 가리키는 것은 ‘사물’이 ‘언어’가 되는 불가역적 변화, 즉 그 사물의 부재와 죽음이다. 사물이 부재할 때만 언어가 가능하다는 것, 이것이 이 변신술의 원리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갑자기 찾아왔던 것”(「장미가 책이」)이라는 불가항력적 진술이 아니고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는 사건으로서의 변신. 이 변신의 알리바이는 변신 그 자체다. “빨간 향기의 장미”라는 물질적 대상이 ‘책’이라는 활자로 바뀌는 이 변신은 ‘시’의 메타포다. 다만, 이것이 인간에 의한 사물의 언어적 전용(轉用)이 아니라 전적으로 장미 “자신의 변신”임을 잊지 말자. 변신은 초월적 원인을 갖지 않는다. 거기에는 시인의 몫도 없다. 그래서 푸른미선나무는 “자신의 미선나무지 나의 미선나무는 되지 않는다”(「푸른미선나무의 시」)라는 진술이 가능하다. 시인의 몫이 없다는 것은 이 변신이 세계의 자아화라는 서정의 원리로는 해명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언어로의) 변신은, 시(詩)가 그러하듯이, 시인의 ‘낙망’ 속에서, “기다림도 없는 빛과 어둠 속에서” 불현듯 도착하는 수취인 불명의 사건이 된다.

사물의 죽음이 언어의 탄생을 가져오고, ‘언어’가 사건의 모든 것을 표현(기록)할 수 있다면 언어 때문에 절망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변신’은, 시인은 물론 언어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건이다. 시작(詩作)은 언어를 넘어서는 사건의 효과를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딜레마와의 대면에서 시작된다. 가령 「광합성에 대한 긍정의 시」를 보자.

 

빛을 모아들이는 것, 이것이 사랑이다

동전만한 잎사귀의 멍들, 그곳에 각자의 원을 그려대는 것

이 동작의, 복습의 유희성

화법을 배워라 누군가 말했지, 장기를 둘 땐 장기를 말하지 않는다

사랑할 땐 사랑이란 말 절대 하지 마

「광합성에 대한 긍정의 시」 부분

 

‘광합성’은 변신의 비유이다. 그런데 ‘광합성’은 “장기를 둘 땐 장기를 말하지 않는다/사랑할 땐 사랑이란 말 절대 하지 마”처럼 언어외적인 사건이다. 빛을 모아들이는 잎사귀의 사랑이 그러하듯이, 변신-광합성은 “다른/꿈이 되어 다른 몸이 되고 다른 마음이 되면서/다른 시간 속”으로 넘어가는, “다른 계절 속에서 음, 그리고 또 노래가 되고, 물이 되고, 공기가 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무수히 ‘다른’으로 거듭나는 이 변신에는 주체라는 고정점이 없고, 변신의 인과를 설명할 마땅한 논리도 없다. 이 논리의 부재 앞에서 시인은 “어떻게 문장을 이어가야 할지 나도 몰라”처럼 ‘언어’의 불가능성을 토로한다. 시인은 다만 이런 불가항력적인 ‘사랑-변신-광합성’이 ‘나’를 취하게 만드는 ‘이명’과 ‘소란’이라고 진술할 수 있을 뿐인데, 불교의 윤회관념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생성/변신은 불변의 존재나 일자의 원리가 아니라 변신과 변화를 긍정하는 인식론으로 드러난다. ‘변신’은 “천년을 묻는 광케이블 피복 속 황금빛 유리섬유”(「광케이블의 기적의 시」)의 속도로 시인을 관통한다. 고형렬의 시에서 ‘변신’은 이처럼 ‘언어’의 문제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문제다.

고형렬의 문장들은 문법적 질서의 해체를 수반하지 않으면서도 절반쯤은 비문(非文)처럼 읽힌다. 비문의 언어들, 시적 사유의 비약, 뒤섞인 목소리들의 병치가 연출하는 반(反)문법·반(反)언어의 적대주의는 그의 시를 ‘소통’과는 다른 층위에서 이해하도록 요구한다. 그의 시들은 “불완전한 문장”(「어느날은 투명유리창의 이것만이」)이거나, “까닭을 표하지 않고 끊어버린”(「손톱 깎는 한 동물의 아침」) 선문답과 유사하며, “형상할 수 없는, 뜻밖의 언어 부재”(「우스꽝스러운 새벽의 절망 앞에」)에 직면한 언어도단(言語道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