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 제17회 창비신인평론상 수상작

 

꼬뮌의 조건

버추얼리즘의 문학을 앓기

 

 

윤인로 尹仁魯

1978년 경북 영천 출생. 동아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inro@naver.com

 
 

1. 어떤 문체: 존재의 올과 결, 그 착잡함

 

김현의 일기, 비평가의 자의식. 그가 일기라는 은밀하고도 사적인 삶의 기록양식을 통해 드러내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허락한다면 이 글을 그런 물음에 대한 하나의 응답으로 시작했으면 한다. 그의 일기는 독서일기다. 들통나길 은근히 바라면서 쓴 통념적인 일상의 감정이 아니라 누군가의 글에 대한 글이다. 언어에 대한 언어, 곧 메타-언어적인 것으로서의 글쓰기. 대체 그렇지 않은 글이 어디 있느냐고 되물을 수 있겠지만, 일기라는 가장 내밀한 영역마저 타자의 글에 의한 감염과 물듦을 통해서야, 타자의 언어의 삼투를 통해서야 비로소 씌어질 수 있다는 자각은 막상 그리 간단치가 않다. 그런 사정은 그의 타자론으로 가만히 이끌리게끔 한다. 눈앞의 죽음과 마주하고 있던 김현은 이렇게 적었다. “타자의 철학: 공포는 동일자가 갑자기 타자가 되는 데서 생겨난다. 타자가 동일자가 될 때 사랑이 싹튼다. 타자의 변모는 경이이며 공포다. 타자가 언제나 타자일 때, 그것은 돌이나 풀과 같다.”1

공포와 경이는 한 타자의 엉킨 양면이다. 그런 엉킴 없는 매끄럽고 동일적인 타자에게 생동은 없다. 거꾸로 말해, 모순적인 것의 엉킴이 타자를 생동하게 하는 조건이다. 그 어떤 합리적 소통으로도 늘 변모하는 타자의 저 엉킴을 온전히 조정할 수는 없다는 자각. 그런 조정이 때때로 타자의 생동함을 옥죄고 급기야 타자의 파괴로까지 이어지는 길일 수 있다는 회의. 그것은 그때까지의 김현을 떠받치고 있던 기왕의 근거와 토대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곧 지성의 순수성을 통해 갈등을 조율하고 관리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신념으로부터 말년의 김현이 감행한 ‘자발적 망명’(싸이드) 혹은 자기-탈구축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이 물음을 조금은 더 무거운 것으로 느낄 때, 그의 독서일기는 타자에의 감각에 뿌리내리고서 타자의 시간을 견뎌내려 한다는 점에서 삶의 어떤 태도의 모색이며, 그런 모색의 조건에 대한 몰두로 읽힐 수 있다. 어쩌면 그런 견딤이야말로 사람의 일과 사회의 내면에 대한 그의 비평적 질감을 가늠케 하는 시선 하나를 머금고 있을지도 모른다.

타자와의 접속과 탈주를 통해 탈근대적 자본의 포획운동에 응전하려는, 이른바 ‘다중-되기’ ‘꼬뮌들의 네트워크’ 등 한국 꼬뮌주의의 문학론과 존재론에 대해 말하려는 이 글이 말년의 김현에 주목하는 까닭은, 그 일기에 그의 존재론적 입장을 지탱하는 어떤 고통이 착잡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버추얼리즘’(virtualism)의 전복적 운동으로 펼쳐지는 꼬뮌주의의 기쁨과 우정에다 존재-사건의 고통과 비극을 맞세워보려 한다. 그 둘의 관계는 한쪽은 이기고 다른 쪽은 지는 관계, 곧 싸움시켜 결판내는 관계가 아니라 섬세한 맞세움을 통해 ‘사이-공간’의 구성에 함께 참여하는 관계다. 때로 그 맞세움은 거센 충돌로 드러나기도 할 것이고, 때로 두 입장 사이에서의 어떤 진동으로 드러나기도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한 입장으로 빨려들지 않고, 그 곁에서, 입장들의 교착과 결렬을 섬세하게 듣는 귀를 가졌으면 한다.

듣는 귀, 촘촘한 귀, 중재하는 귀. 잠시 입을 닫고는 온통 듣기. 그런 듣기가 누군가의 말을 잘 들어주는 관습화된 매너이거나 겸손을 가장한 냉소일 수는 없다. “듣기는 화자의 몸을 깨우고, 그 정신을 섭동케 하고, 그 무의식을 해방시켜서 자기 ‘아닌’ 자기, 자기보다 ‘큰’ 자기의 이야기로 되돌아가게 한다”2는 문장은 듣기의 의미에 관해 고요히 생각하도록 이끈다. 그렇게 김현의 한 대목을 들어볼 수는 없을까. 박몽구(朴朦救)의 『십자가의 꿈』(풀빛 1986)에 대한 일기의 한 대목을 거듭 읽으면 그의 문체의 뿌리를 가만히 어루만질 수 있다. “권력/진실의 대립을 보여주는 「꿈 71」 같은 시들이 더 깊고 깊이있게 다뤄져야 하고, 묵비권, 고문, 배신의 문제 역시 그러하다. 과연 그곳에는 그렇게 의로운 사람들만 있었는가? 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곳에 진실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를 떠나…… 답답하고 답답하다.”(21면, 1986.3.18)

“과연 그곳에는 그렇게 의로운 사람들만 있었는가?”라는 문장에서 ‘그곳’은 감옥이다. 이 물음은 민주화투쟁으로 옥살이했던 이들 모두가 과연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깐깐한 추궁일 것이다. 김현은 그렇게 물을 수 있는 자리가 민주화투쟁의 이면적 진실이 거하는 곳일 수 있다고 썼다. 투쟁에 나섰다가 징역 살고 나와서는 그 사실을 입신출세의 도구와 근거로 삼는 이들은 분명 정의롭지 못하다. “그러나 그 문제를 떠나…… 답답하고 답답하다”라는 문장은 문제로부터의 이탈이면서 동시에 그 문제로의 더 깊은 침잠이다. 그들은 과연 의로운가라는 물음의 카테고리를 벗어남으로써 그 문제가 부분적인 데 그치는 것일 수 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런 부분적인 문제를 싸안으며 넘어가는 ‘전체’를 지향한다. 그것은 일단 문제의 조건들을 간파하고 비평하려는 분석적이고 이성적인 노력에 기초해 있다. 그러면서 합리적 분석의 논리가 막다른 벽에 부딪혀 멈춰선 지점에서 “…… 답답하고 답답하다” 같은 감성적 수사로 논리 너머의 영역을 엿보려 한다. 그럴 때 그의 수사는 수사 이상으로, 속류적인 인상비평이나 내면의 일방적인 토로가 아니라 논리 너머에 다다르려는 의지적 직관으로 변모한다. 논리의 한계선 끝에 가만히 멈춰선 자리. 김현의 직관이 깃드는 곳이 바로 거기다. 그가 말하는 “울림”이나 “안타깝다” “끔직스럽다” 같은 말들이 비평적 술어로 거듭나는 과정이 그와 같다. 그는 그렇게 논리와 논리 너머의 ‘사이’를, 두 대립적 세계관의 질감 사이를 ‘진동’하고 있다.

그의 진동. 그것은 사람과 사건과 사회 속에서 어떤 흐리고 불투명한 사태를 감각하려는 삶의 방법이며 태도다. 달리 말해, 그것은 착잡(錯雜)함에의 이끌림이다. 곧 존재-사건의 올과 결이 서로 말려들고 뒤엉키는 사태에 대한 이끌림. 그것은 그러나 짙게 양면적이어서 곤혹스럽다. 그런 착잡함에서의 이끌림이 양면적인 까닭은, 그것이 극단들의 사이에 자처하게끔 하는 동력이기에 편향을 거절하는 중도적 감각의 밑바탕이면서, 동시에 현실의 대결과 야합을 합리적 개인의 지성을 통해 매개하고 조절할 수 있다는 그의 자유주의적 신념이 지닌 보수성의 뿌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한에서 그의 ‘공감의 비평’은 모순적인 것들이 어긋난 채로 공존하고 있는 하나의 덩어리일 수 있다. 세계관적 기초로서의 자유주의와 그의 비평이 오차 없이 일대일로 대응된다는 비판적(정치적) 입장은 그것대로 인정될 수 있다. 그러하되 그 입장 너머를 생각하려 할 때는, 그의 비평에 들어 있는 저 존재론적 엉킴의 곤혹스런 사태를 어떤 식으로든 ‘재정의’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그런 재정의야말로 김현에 대한 ‘빠’의 매혹과 맹목을, ‘까’의 열정과 비약을 동시에 넘어서는 길일 수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물으며 시작하자. 그렇다면 저 곤혹스런 엉킴을 돌파할 수 있는 길이란 어디에 있는가. 물음이 잘못되었다. 돌파할 수 있는 길이란 없다. 길을 잃으며 더디게 걷는 행려의 길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비극적이다. 그렇게 허덕이며 헤매는 길 위에서 이 글

  1. 김현 『행복한 책읽기』, 문학과지성사 1992, 165면(1988.7.14 일기). 이하 면수와 날짜만 표기.
  2. 김영민 『동무론』, 한겨레출판 2008, 2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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