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공선옥 孔善玉
1963년 전남 곡성 출생. 1991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소설집 『피어라 수선화』 『명랑한 밤길』 『나는 죽지 않겠다』, 장편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살』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등이 있음. hahan7@hanmail.net
장편연재 4(마지막회)
꽃 같은 시절
아가 아가 얼뚱아가
영희는 아무리 눈을 뜨려 애써도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몸을 일으켜보려고 해도 등이 방바닥에 붙어버린 듯 꿈쩍도 하지 않아, 누가 내 등을 잡고 있나, 등 밑으로 손을 넣어보려 했으나 손도 말을 듣지 않았다. 이제 어떡해야 하나, 그저 울기나 해야겠다, 울면서 천천히 생각해봐야겠다, 하고 어딘가에 쪼그려 앉았는데, 그곳이 바로 천길 낭떠러지였다. 얼른 몸을 피하려 했지만 이미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죽는 건가 싶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순한 바람이 이마를 스치는 느낌이 든다. 다시 살아난 건가? 주위를 둘러보는데, 먼 데인 것 같기도 하고 제 옆 같기도 한 곳에서 조그만 여자아이가 울고 있다. 자신을 닮은 어린아이가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영희를 바라본다. 아이는 영희와 눈이 마주치자, 자기 있는 데로 오라고 손짓한다. 내게는 딸이 없는데 누굴까, 다가가보니 세상에, 바로 어린시절의 자신이 아닌가. 반가워서 와락 껴안고 싶은데, 이상하게 복주 생각이 먹구름처럼 가슴을 덮는다.
‘우리 복주가 어린이집에서 올 시간인데.’
어린 영희가 손을 살랑살랑 흔드는 것이 복주는 잊어버리라는 것 같았다. 어린 영희의 몸짓을 보면서 영희는 기분이 좀 이상해졌다. 왜 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지? 혼란스럽기도 하고 재미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이 짠했다. 오래 잊어버리고 있었던 가슴속 아픔이 되살아나는 듯도 했다. 어쨌든 눈물 가득한 어린 영희를 외면할 용기가 없어서 영희는 어린 영희가 손짓하는 하얀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보기에는 가까운 것 같은데, 새벽인지 저녁인지 알 수 없는 희부윰한 빛 속에서, 오솔길은 꿈길처럼 아득하게 돌아간다. 어린 영희가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그러니까 영희가 태어나던 순간부터 ‘울음 우는 영희’는 그 자리에서 영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 영희를 다른 누구도 아닌, 영희 자신이 오래 잊고 있었던 것인지도. 그래서 영희는 ‘영희를 오라고 손짓하는 영희’를 보자마자 그렇게 반가웠는지도 모른다. 내가 저 어린 영희를 왜 그렇게 오랜 세월 잊고 있었던 것일까, 왜 그리 오래 그 자리에 세워뒀던 것일까 싶어 이제 영희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래서 어린 영희가 손짓하는 곳으로 몸이 미끄러지듯 저절로 가지는 것이었다. 어린 영희가 입은 병아리색 인조견 치마는 엄마가 만들어준 것임을 영희는 기억해냈다. 인조견의 매끄러운 감촉이며, 밝은 곳에 서 있으면 속이 비칠까봐 안절부절못하던 것까지도. 비에 젖으면 다리에 찰싹 달라붙고 작은 열기에도 홀라당 구멍이 나는 인조견 치마. 치마를 추억하느라 걸음이 늦어졌던 것일까. 어린 영희가, 빨리 안 오고 뭐하냐는 듯 더욱 재게 손을 흔든다. 나이 먹은 영희가 물었다.
“뭐 좋은 것이 있다고 자꾸 오라는 거여?”
영희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돌아가신 엄마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금방, 아하, 그럴 수도 있겠다, 수긍했다. 자신의 나이가 엄마 돌아가시던 무렵의 나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기 때문이다.
어린 영희를 따라 한참을 간 것 같았다. 숲으로 난 오솔길을 지나고 맑은 물이 흐르는 작은 실개울을 건너고 자잘한 들꽃이 가득 핀 들을 건너니 거기, 아름다운 집 한채가 기다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예전에 살던 집이다. 우리집으로 가는 길에는 숲길도, 실개울도, 꽃이 가득 핀 들판도 없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우리집이 저렇게 근사하지도 않았는데 이상하다 하면서도, 눈에 보이는 집이 진짜 자신의 집임이 확인되자, 영희는 또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분명 옛집인데, 왠지 더 환해지고 더 따뜻해진 것 같다. 모습은 안 보이지만 뒤꼍에서 장작 패는 소리며 아궁이에 불 때는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월남 간 오빠가 돌아왔거나, 그도 아니면, 그도 아니면……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신 것도 같다. 그러면 정말 좋을 텐데, 좋을 텐데…… 가슴이 두근거린다. 한번 조심스럽게,
“아부지, 아부지는 죽었는데 왜 집에 와 계세요?”
물어보고 싶다. 그러면 아버지가,
“떽끼, 누가 그런 거짓부렁을 허드냐. 이렇게 멀쩡허니 살아 있는 것을 보고도 그런 소리 허냐?”
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희는 안다. 오빠라면 몰라도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욕심이란 것을. 아버지는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영희가 분명히 알기 때문에. 그렇지만, 그런 사실을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그것은 먼 훗날 일어날 일이고 아버지는 지금 뒤꼍에서 장작을 패 아궁이에 불을 넣고 있고 엄마는 부엌에서 밥을 짓고 있다,고 영희는 생각한다. 그 생각은 정말 현실로 이루어졌다. 큰오빠하고 작은오빠는 산에서 캐온 칡을 마당 한켠에서 작두로 썰고 있다. 영희는 닭모이를 주러 닭장이 있는 텃밭으로 가는데, 연기 나오는 부엌문에서 엄마가 고개를 내밀고는 텃밭에 간 김에 파를 좀 뽑아오라고 한다. 막 파랗게 솟아난 쪽파를 조심스럽게 솎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동화 같다. 저녁인 것 같기도 하고 새벽인 것 같기도 하지만 영희는 저녁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영희는 저녁이 포근해서 좋았다. 어디선가 닭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날이 새는 모양이라고 동네사람 누군가가 두세두세거리며 문밖 고샅을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언제나, 사는 것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전개되곤 했다. 그래서 동화 같은 풍경이 펼쳐졌을 때, 조마조마했다. 그 좋은 저녁은, 포근한 저녁에의 꿈은 어디론가 가뭇없이 사라지고 영희의 가능하지 않은 욕심을 확인시키기라도 하듯, 옛집은 이제 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작은오빠가 빨간 페인트로 쓴, ‘심’자가 지워진 ‘개조’, 그리고 ‘조’ 밑에다 누군가 못으로 ‘ㅅ’자를 새겨넣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양철대문. 대문은 한쪽이 기울어져서 문을 받치기 위해 안쪽에 커다란 돌덩이가 괴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돌이 그대로 있다. 돌덩이는 하도 오랜만에 봐서 신기하기는 해도, 사실 그리 반가운 물건은 아니다. 방위병이었던 작은오빠가 한여름 퇴근길에 멱을 감다가 물속에서 영영 나오지 않던 날, 엄마가 그 돌덩이 위에 앉아 가슴을 치며 울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큰오빠 아래로 언니를 낳았지만, 아기 때 장질부사로 ‘날려버렸다’. 그리고 두번째로 작은오빠를 잃은 것이다. 개목에 걸어 돌덩이에 감아놓았던 개줄이 보인다. 대문가에 개가 있어서, 문지방을 넘어서자마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개밥그릇이 늘 발에 채였었다. 파리는 또 어떤가. 빈 밥그릇에 까맣게 달라붙어 있던 파리들. 파리들도 그대로인데, 개는 보이지 않는다. 아아, 개는 큰오빠가 군입대하던 날, 오빠하고 오빠 친구들이 잡아먹어버렸지. 월남에 간 우리 큰오빠. 자랑스러운 오빠. 그러나, 개를 잡아먹어버린 오빠. 오빠 친구들은 개고기 뜯어먹은 붉은 입들을 크게 벌려 웃으며, 오빠 등을 두드렸다.
“어이, 영달이, 구탕 먹고 힘내서 베트콩 많이 때려잡아야지.”
어떤 친구는 울었다.
“이역만리 떠나는 자네에게 개고기밖에 못먹여 보내는 것이 이렇게나 내 가슴을 에이게 하는구먼.”
산적처럼 생긴 오빠 친구가 가슴을 치며 우는 모습이 지금 일인 듯 옛날 일인 듯, 아득한 듯 생생하게 보인다.
사진 한장 남겨놓지 않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빼닮았다는 큰오빠. 그래서 가끔 오빠 대신 아빠라고 부르고 싶었던 큰오빠는 스무살 되던 해 개고기탕 한그릇 먹고 월남 가서 돈 벌어오겠다는 말만 남긴 채 떠나버렸다. 집안이 조용한 걸 보니, 아마도 오빠가 그렇게 떠난 뒤인가보다.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엄마가 재봉틀 앞에 고개를 수그리고 옷을 만들고 있다. 영희를 한번쯤 뒤돌아볼 만도 한데, 엄마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저 재봉틀만 돌릴 뿐이다. 그래도 정말 오랜만에 엄마를 보자 가슴이 뛴다. 왈칵 울음이 나온다.
“엄마아!”
엄마 대답이 없는 것이 좀 서운하다. 다시 한번 부르려는데, 엄마가 불쑥 다 만든 옷을 영희에게 입힌다. 여전히 얼굴은 보여주지 않은 채. 엄마가 분명히 옷을 입혀주는데 얼굴이 안 보이다니, 이상하다 하면서도 영희는 엄마가 입혀주는 대로 옷을 입는다. 치마에서 새 옷 냄새가 난다. 그 냄새가 좋아, 영희는 자꾸만 숨을 킁킁거린다. 새 옷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좋다.
“요놈 입고 가서 매 맞지 말고 상 받아갖고 오니라이.”
엄마는 영희에게 치마를 건네주고 밭에 간다며 호미를 들고 대문 밖으로 나간다. 가지 말라고, 조금만 더 나랑 있자고 하고 싶은데, 이번에는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엄마는 어느새 대문 밖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저렇게 가는 것은 틀림없이 죽는 일인데, 죽는 것은 내가 다시는 엄마를 볼 수 없다는 것인데, 엄마를 붙잡아야 하는데, 왜 발이 떨어지질 않을까. 영희는 발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 속상하고 엄마를 영영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말할 수 없는 슬픔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그런 영희 마음을 알고서 그랬던 것일까. 엄마는 여전히 모습은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목소리는 더 또렷해졌다.
“엄마 간다고 우지를 마러라, 아가.”
“알았어, 엄마아, 그런디 엄마아, 엄마 얼굴 한번만 보여줘어.”
소리쳐보지만 이번에도 소리는 나오지 않고 목만 꺽꺽거린다.
할 수 없이 영희는 이제 방금 만들어진 노란 치마를 입고 학교엘 가려고 집을 나섰다. 새옷 때문에 엄마를 못 본 서운함은 금세 가시고 기분이 산뜻해진다. 그런데 자꾸 치마가 흘러내렸다. 엄마가 밭에 갈 생각으로 마음이 바빠 치마 호크를 미처 달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좀전의 기쁜 마음은 금세 사라지고 놀림을 받을까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할 수 없다. 집에 가봐야 엄마도 없고 늦으면 오늘도 선생님한테 매를 맞을 것이 틀림없다. 영희는 자신이 만날 선생님한테 매를 맞았다는 것이 기억났다. 도화지를 못 사간 날, 수업 시간에 자꾸 코를 흘린다고, 걸레를 안 만들어가서, 난로에 피울 장작을 안 가지고 가서, 학교 퇴비장에 넣을 풀을 안 베어가서, 잔디씨를 안 받아가서, 학교 환경미화하는 데 돈을 안 내서, 육성회비를 안 내서, 머리에 이가 많아서…… 매 맞았던 이유들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영희는 꽁꽁 언 겨울 아침 신작로에서 학교에 가다 말고 돌로 얼음장을 깨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더니 그 위에 오줌을 눈다. 얼음이 녹고 그 속에 박혀 있던 백원짜리 지폐가 영희 손에 들어온다. 선생님이 돈이 어디서 났느냐고 묻는다. 얼음장 속에서 났다는 말을 못한다. 매가 날아온다. 화들짝 깨어나니 엄마가 머루밭 속에서 얼굴을 안 보여주고 목소리로만,
“아가, 인자부터 선생님한테 매 맞지 말고 상 받아와라이.”
영희 발밑에 머루가 가득 담긴 광주리가 보인다. 영희는 머루를 깨물어먹으며 울면서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매 안 맞고 상 받아오기 위해서 영희는 호크 안 달린 치마를 손으로 꽉 쥐고 간다. 그런데 가다가 자꾸만 해찰을 한다. 이러면 학교 늦어서 선생님한테 또 매를 맞을 텐데, 틀림없이 그럴 텐데,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학교 안 가고 산에를 갈까, 냇가엘 갈까, 두리번거린다. 오늘은 구구단과 국민교육헌장을 외워가야 한다. 구구단은 다 외웠는데 국민교육헌장을 아직 못 외웠다. 선생님의 대나무뿌리 회초리가 손바닥에 닿는 느낌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어떻게 할까. 저 멀리 논둑길에서 영희처럼 서성이는 아이가 보인다. 건너마을 사는 동선이다. 동선이는 아파서 죽었는데, 하는 생각이 얼핏 났지만, 그래도 어쨌든 살아 있는 동선이가 보인다. 동선이 엄마가 차부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갑자기 쓰러졌던 것을 영희는 기억해냈다. 조금 전까지 차가 왜 이리 안 온다냐, 혼잣말을 하다가 문득 보따리 속에서 알사탕을 꺼내 영희한테 건네주었는데, 차 온다고 일어서다가 핑그르르 쓰러졌다. 영희는 사람 살려, 사람 살려, 목놓아 부르면서도 사탕은 또 열심히 빨아먹었던 것이 부끄러워 몸이 떨린다. 오늘도 동선이는 제 동생 보느라 학교에 늦었나보다. 동선이는 논둑길을 벗어나 신작로에 접어들었다. 학교에 가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학교에 늦으면 나도 매 맞고 동선이도 맞겠지 싶어 조금 안심이 된다. 동선이랑 함께 맞으면 덜 서러웠던 것 같다. 무엇보다 매를 맞고 영희가 울면 동선이가 영희야, 울지 말고 나랑 놀자 하면서 손을 잡고 운동장 가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로 데려갈 때 무척 행복했다. 매 맞고 흘린 눈물이 플라타너스 아래로 가는 동안 말라가는 느낌이 좋았고, 제 손을 잡은 동선이의 손이 꼼지락거리는 느낌이 좋았다. 동선아아, 부르는데 역시나 목이 꽉 잠겨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신작로 미루나무 사잇길로 올라섰던 동선이가 보이지 않는다. 동선이는 어디로 갔을까. 어디선가 동선이 웃음소리가 난다. 드넓은 보리밭 한가운데쯤에서 비비종 배비종, 종달새 울음소리가 났다. 동선이가 보리밭에서 종달새 울음소리를 흉내낸다. 종달새는 사람이 저를 흉내내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화답한다. 비비종 배비종. 보리밭 속을 아무리 뒤져도 보이지 않는 동선이는 끝없이 종달새 흉내만 내고 있다가 갑자기,
“영희야, 내 발에 티눈이 났단다.”
영희는 이번에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아 그냥 맘속으로만,
‘동선아, 티눈이 났으면 성냥불로 발을 지져부러라.’
“영희 너는 엄마가 호호 불어주더냐?”
그렇다고 말하면 동선이가 슬퍼할까봐,
‘울엄마는 새복에 밭에 가서 오밤중에 돌아온단다.’
“영희 너는 엄마가 명태국 끼래주더냐.”
‘울엄마는 나한테 밥 안해놨다고 옷을 벗겨 쫓아내더라.’
“영희 너는 엄마가 명태 아가미를 티눈에다 처매주더냐.”
명태 아가미 속 물렁뼈를 동선이 발에 처매줘야 할 텐데, 그래야 티눈이 없어질 텐데, 우리집 찬장 속 명태를 훔쳐내 갖다줘야지, 갖다줘야지, 안타까워하며 집으로 오는 중인데, 동선이는 죽고 말았다. 그러나 동선이가 죽는 것도 아주 나중 일, 아직은 살아서 티눈 때문에 발이 부어 동생을 업지 못하고 땅바닥에 내려놓은 채로 확에 보리쌀을 갈고 있다. 그런 동선이를 바라보며 영희는 하염없이 울고 있다.
‘동선아, 동선아, 너 죽으면 나는 외로워서 어찌 살끄나.’
동선이가 감나무 아래 화덕에 불을 지펴 보리밥을 한다.
“영희야, 사람이 죽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란다. 울지 말고 화덕에 불이나 때라.”
영희는 동선이의 말에 안심이 되어 화덕에 불을 넣는데, 땅바닥이 축축해서인지, 불쏘시개 나무가 젖어서인지 매운 연기만 난다. 어서 낭글낭글한 보리밥을 해서, 동선이 엄마가 죽기 전에 담가놓은 된장으로 보드라운 된장국을 끓여서 동선이 동생 점선이한테 먹여야 할 텐데, 점선이는 배가 고파 땅바닥을 불불 기어다니며 흙을 주워먹고 있다. 마음이 바빠진다.
‘점선아, 내가 우리집에 가서 밥을 가져오마. 그동안 흙은 먹지 말고 차라리 울고 있으려무나. 동선아, 내가 우리집에 가서 명태 아가미 물렁뼈를 가져오마. 그동안에 너는 사카린물이나 타서 먹고 있으려무나.’
동선이네 집을 빠져나와 신작로를 버려두고 지름길인 산길을 넘는 참인데, 천지사방에서 주황색 점박이 나리꽃이 호르르호르르 피어나고 있다. 점선이한테 빨리 밥을 갖다줘야 하는데 동선이한테도 빨리 명태 아가미 물렁뼈를 갖다줘야 하는데, 하면서도 영희는 집으로 가는 길을 놔두고 나리꽃 피어나는 언덕길을 허위허위 기어오르고 있다. 언덕에는 나리꽃뿐 아니라 원추리꽃, 엉겅퀴꽃, 개망초꽃, 여뀌꽃, 동자꽃, 꽃, 꽃, 꽃들이 한정없이 피어 있다. 밥 가지러 간 사이에 누가 꽃을 다 꺾어가버릴지도 모르니 우선 꽃부터 꺾어야겠다고 영희는 생각한다. 꽃다발을 만들어 동선이한테 갖다주면 참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다. 한참 정신없이 꽃을 꺾는데, 설렁설렁 바람이 불더니 굵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흰 저고리에 까만 중의(몸뻬)를 입은 낯선 할머니가 영희 뒤를 바짝 따라오면서, 어서 가자, 어서 가자, 닦아세운다. 비가 오니 집에 가자는 말일 것으로 여기고 종종거리며 앞장섰다. 그러나 뒤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어둠속의 흰 저고리와 검정 중의, 그리고 목소리가 왠지 서늘하다. 숨이 가쁘다. 금방이라도 뒤에서 쫓아오는 할머니에게 뒷덜미를 챌 것만 같다. 할머니가 제 뒷덜미를 채가려고 갑자기 나타난 것만 같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될 것 같다. 멀리서 노랗게 깜빡이는 불빛이 보인다. 집인가? 집이다. 엄마아, 부르는데 엄마가 컴컴한 뒤꼍에서 확에 뭔가를 득득 갈고 있다.
‘엄마 그것이 뭣이대?’
“우리 새끼 질러 좋아허는 오뇌죽 끼래줄라고 녹두 가는 거여.”
이번에도 엄마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린다. 녹두죽을 오뇌죽이라고 하는 엄마. 오뇌죽 소리만 들어도 벌써 고소한 녹두냄새에 코가 킁킁거려진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영희가 오뇌죽을 먹고 있는 참인데, 작은오빠가 아궁이 불빛 일렁이는 부엌문을 왈칵 열어젖힌다. 오빠가 서 있는 부엌문 밖은 캄캄하다. 오빠가 어서 부엌 안으로 들어와 바람 들어오는 부엌문을 닫고 따뜻한 부뚜막에 앉아 함께 오뇌죽을 먹으면 좋으련만, 그래서 이제야말로 오래전에 잊어버린 오빠 얼굴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건만, 오빠는 도통 들어올 생각을 안하는 것 같다. 할 수 없이 노글노글한 오뇌죽을 한 양재기 퍼담고 부엌문 밖으로 내가려는데, 부엌문 밖에는 오빠 말고도 얼굴이 자세히는 보이지 않고 형상만 보이는 사람들이 중긋중긋 서 있다. 양재기 말고 큰 양동이에다 오뇌죽을 퍼담아 내오고 부리나케 헛간으로 달려가 선반에 매달린 덕석을 떼어다가 주르르 마당에 깔자 서 있던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는다. 오빠는 어느새 사람들 속에 파묻혀서 간간히 뒷모습만 보여줄 뿐, 영희를 돌아보지 않는다. 오빠 옆에 아기를 안고 있는 조그만 아이는 틀림없이 동선이다. 점선이를 데리고 왔나보다. 덕석 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오뇌죽을 퍼먹는 참인데, 읍내에서 온 사진사가 사진을 찍는다.
“자자, 먹는 것을 잠시 멈추고 여기를 보세요. 박석택씨, 김용택씨, 김애순씨, 노분례씨, 김공님씨, 영산리 김기택씨 큰어머니 되시는 분, 영산리 김기택씨 큰어머니 되시는 분? 안 계십니까? 아 예, 그러면, 봉현리 박석춘씨 이모 되시는 분, 아 예, 그쪽으로 서시고요. 다음, 이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