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5806조광희 趙光熙

1967년 서울 출생. 민변 사무차장과 여러 영화사의 고문변호사로 일했고, 현재 영화제작사 ‘봄’ 대표이자 변호사로 활동중이다. hehasnoid@gmail.com

 
 
 

도시의 내장을 기어다니는 벌레1

 

 

시골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던 부모님은 나보다 세살 위인 형님을 낳고 나서 서울로 이사했다. 어머니가 나를 가지셨던 여름에 부모님은 모래내 하천 몇미터 옆에서 어렵게 사셨고, 물난리가 나서 집이 잠기자 근처로 잠시 몸을 피했다. 물이 빠진 다음 집으로 돌아와서 나를 낳으셨다는데 미역국을 드셨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자랄 적엔 그렇지 않았는데, 더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나는 용이 되지 못했고, 장차 될 가능성도 없다. 하지만 모래내를 개천이라고 할 수 있다면 내가 만난 사람 중에 나보다 더 개천 가까이에서 태어난 사람은 없었다. 주로 서울의 서쪽 지역에서 몇차례 이사하면서 소년시절을 보냈는데, 서울이라는 도시를 사랑한 적은 없었다. 그 시절에 누가 그럴 수 있었겠는가. 지저분한 거리, 무질서한 건물들, 매연, 만원버스 따위를 사랑할 수는 없었다. 소년시절 마음이 답답하거나 무언가를 생각하고 싶을 때 좁고 분주한 집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한가지는 몇시간이고 무작정 걷는 것이었다. 몇번이고 상암동에서 수색을 거쳐 증산동 근처까지 걸어갔다 왔다. 초저녁마다 집에서 난지도 부근의 논이 있는 마을까지 걸어갔다 오는 것이 일과인 적도 있었는데, 반딧불이들이 신비롭게 흘러다니는 모습은 그나마 내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또 한가지는 근처 매봉산에 오르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작은 야산에 불과하지만 어린 마음에는 산이 너무 깊어 무섭다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매봉산은 도시아이인 내가 시골아이처럼 지낼 수 있던 유일한 장소였다. 마음을 달래는 다른 한가지 방법은 상암동이 종점이던 5번 버스를 타고 반대편 종점인 정릉까지 다녀오는 것이었다. 그 버스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보았는지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버스가 도심을 지날 때 보았던 높다란 빌딩의 오렌지색 불빛들,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아가씨의 다리가 내 몸에 지나치게 닿아 있을 때의 당황스러움이 생생할 뿐. 그 소년이 두어시간 동안 하릴없이 버스에 앉아 있었을 때 얼마나 쓸쓸했을까는 충분히 짐작된다. 나는 그렇게 어른이 되었고 전형적인 도시남자가 되었다. 그사이에 아버지는 도시빈민에서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 부르주아가 되면서 고향에서 칭송이 자자하던 그는 번창하기만 하던 사업이 부도 위기에 몰리자 재산을 정리하고 은퇴했다. 그후로는 아침마다 자전거를 타고 그 무렵 살던 아파트 단지를 돌았다.

 

눈을 뜬다. 아침이다. 침대에서 기어내려와 비틀거리며 거실에 나가보면 아내는 없다. 다음달에 있을 전시 준비에 바쁜 아내가 잠이 덜 깬 내게 “저 가요”라고 말했던 희미한 기억이 있다. 나는 강아지 모모에게 아침밥을 주고, 신문을 훑어본

  1.  ‘우주의 내장을 기어다니는 벌레’라는 글귀가 머릿속을 맴도는데 어디서 보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순수한 내 표현은 아닌 것 같다. 지인에게 물으니 자기도 어디선가 본 것 같다고 한다. 그 글귀를 변형해서 제목으로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