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예소설가 특집

배명훈 裵明勳
1978년 부산 출생. 2005년 과학기술창작문예 단편부문에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연작소설 『타워』, 소설집 『안녕, 인공존재!』 등이 있음. mh_bae@hotmail.com
예술과 중력가속도
※주의: 식사시간을 피해서 읽을 것
은경씨는 얼굴이 작고 몸매가 날씬하며 자세가 꼿꼿한데다 피부까지 뽀얘서 단연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나는 황급히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누구? 이 여자?”
그러자 엄마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왜? 마음에 드나?”
“사진발이겠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싸이드 미러를 흘깃거리는 모습이, 쑥스러운 마음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내 결심은 확고했다. 나는 2년 동안이나 만난 여자가 있었다. 엄마는 소진씨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별로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엄마가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고 내가 나이가 적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저런 미인을 물어오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엄마는 딱 세번만 자기가 소개해주는 사람을 만나보고 그래도 생각이 안 변하면 소진씨와 결혼해도 좋다고 말했다.
“결혼해도 좋고 말고가 어디 있는데? 엄마가 허락하든지 말든지 나는 무조건 결혼한다니까.”
엄마는 내가 그렇게 말하든 말든 가능한 모든 인맥을 총동원해서 괜찮은 여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엄마들 취향이라는 게 다 뻔했기 때문에 나는 그다지 걱정이 안됐다. 첫번째 여자는 반듯한 집안의 착하고 귀여운 아가씨였고 두번째 여자는 지적이고 쾌활한 의사선생님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나와 어울리기보다는 자기들끼리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들이었다. 둘 다 엄마의 며느리 이상형에 너무나 잘 맞아떨어졌다는 의미다. 하지만 세번째 여자, 은경씨는 달랐다. 그렇게도 소진씨가 싫었을까, 엄마는 급기야 자기 이상형까지 포기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전략은 나쁘지 않았다.
“뭐 하는 여자라고?”
“아버지가 우주항공 무슨 박사라는데, 달에서 살다가 대학 들어가면서 이민 왔다 하던데.”
“대학 들어가면서가 아니라 달기지 폐쇄되면서 왔겠지.”
“아닌데. 대학 들어가면서 왔다던데.”
“그거나 그거나.”
“아닌데.”
엄마는 끝까지 우겼다. 엄마가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려면 본인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마지못해 약속을 정했다. 실물을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진실이 궁금해서였다. 은경씨 본인이 이야기하는 진실은 이랬다.
“대학이요? 취직이 안되니까 대학을 가기는 가야겠더라고요.”
“왜 취직이 안돼요?”
“달에서 배운 걸 하나도 못 써먹게 돼서요.”
“왜요? 달에서 뭘 하셨는데?”
“예술을 좀 했거든요.”
“아. 예술.”
은경씨는 실물이 더 매력적이었다. 표정이 풍부하고 표현이 살아 있었다. 예술을 좀 하셨다니, 나는 저런 거만한 소리가 전혀 부담스럽게 들리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 아마 긴 목선 때문일 것이다. 다시 은경씨에게 물었다.
“예술계 쪽은 잘 모르지만, 무슨 텃세 같은 게 있었나 보죠? 달에서 활동하신 분들은 아무래도 이쪽에는 기반이 없으니까.”
“네? 텃세?”
은경씨는 그게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런 게 아니고, 종목이 좀 그랬어요. 지구에서 하기는 좀 어려운 걸 했거든요. 텃세에 부딪힐 정도까지 가보지도 못했어요.”
은경씨가 웃는 모습을 보고, 나는 상황을 섣부르게 짐작하고 엉뚱한 말을 해버린 게 아니라 오히려 아주 적절하고 필요한 말을 끄집어내서 분위기를 한층 좋게 만드는 데 성공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래요? 달에서만 할 수 있는 게 있어요? 어떤 걸 하셨는데요?”
은경씨는 전쟁통에 잃어버린 자식 이름이라도 떠올리듯 힘없이 대답했다.
“무용이요. 현대무용.”
“아. 무용.”
“네, 무용. 근데 달에서 하던 무용은요, 지구에서는 절대 할 수 없어요. 중력 때문에 거기 무용이랑 여기 무용은 아주 달라요. 그래서요……”
“아, 중력. 그렇겠네요. 지금은 그럼?”
“지금도 무용수예요. 서울에 유학 와서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배웠어요. 그렇긴 한데.”
그렇기는 한데, 아마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력이 여섯배나 큰 별로 이사 온다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몸무게가 여섯배로 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똑바로 서 있기도 힘들 텐데 춤을 추다니. 모르긴 해도 재활치료에 가까운 훈련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게 고생해서 무대에 선다 해도 다시 얻은 무대가 생각만큼 만족스럽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번째 만난 날, 은경씨는 옆에서 누가 보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보도블럭을 팔짝팔짝 뛰어다니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는 아무리 연습해도 점프가 이 정도밖에 안돼서……”
그 점프는 내가 본 것 중 가장 우아하고 시원한 점프였다. 그런데도 점프가 부족하다니. 달에서는 도대체 어디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왔단 말인가. 나는 길고 가는 팔다리를 휘저으며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은경씨 옆을 걷는 내 모습이 어쩐지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 소진씨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 차분하게 서로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갖는 게 좋을 것 같아.”
사실 나에게 그런 시간 따윈 전혀 필요 없었다. 더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나는 이미 은경씨에게 푹 빠져 있었다. 하지만 소진씨는 정말로 우리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차분하게 생각해본 것 같았다. 일주일쯤 뒤에 긴 말 없이 헤어지자는 소리가 나온 걸 보면 소진씨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면밀하게 분석해서 결국 정답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 게 분명했다. 아무튼 현명한 여자였다.
은경씨와는 관계 진전이 빨랐다. ‘엄마가 시켜준 소개팅’의 유일한 장점은 교제중인 남녀가 자신들이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것인지 아닌지 따지고 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저쪽에서 그만 만나자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이상, 일은 엄마가 시켜주는 소개팅의 플롯대로 착착 진행되기 마련이었다. 서로의 의중을 떠보는 심리게임을 할 필요가 없어지자 서로의 진실한 내면도 더 빨리 드러났다.
은경씨의 내면은 예술혼으로 가득한 세계였다. 솔직히 나는 그 섬세한 영혼을 감당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왜 예술가들은 자기 내면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소중히 간직하지 않고 저 밑바닥에다 아무렇게나 흘려놓은 것일까. 은경씨가 ‘인간 정신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건져올리기 위해’ 한번씩 고뇌와 쓸쓸함 그리고 절망으로 가득 찬 내면의 바닥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올 때마다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운 피조물이 단지 밑바닥으로 내려가기 위해 저렇게 어마어마한 양의 술을 저 조그만 입으로 들이붓는단 말인가.
엄마는 당신의 소중한 외아들에게 직접 소개한 그 우아한 피조물의 내면세계가 코스모스보다는 카오스에 가깝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엄마는 은경씨를 마음에 쏙 들어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가 미친 줄 알았다. 우는 여자가 지껄이는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귀기울여 듣다니. 게다가 그 말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려고 애쓰기까지 하다니. 그건 사랑이 분명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은경씨에 대한 나의 사랑이 단지 그녀의 우아한 외모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 때문에 죄책감이 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게 뭐 어때서. 하지만 어느 한심한 영혼이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내면을 도통 갈피도 못 잡고 헤매는 꼴을 목격하고도 전혀 짜증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내 사랑은 은경씨의 외모에서만 비롯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면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결국 내면도 외면도 아닌 희한한 곳에서 왔다는 이야기인데, 그게 어딘지는 알 수가 없었다. 친구들은,
“그냥 너 변태야.”
하고 말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변태가 뭐 어때서!”
하고 짧게 대꾸했다. 은경씨가 화요일이나 수요일부터 시작된 깊고 깊은 내면의 고독에서 벗어나 며칠 만에 처음으로 얼굴에 옅은 미소를 보이던 순간. 그 순간의 희열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 사랑의 본질을 설명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냥 미친 걸로 해두는 편이 나았다.
은경씨가 멀쩡해지면 우리는 자주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은경씨에게는 당연히 달에서 온 친구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장창석이라는 무용수가 유난히 신경쓰였다. 달예술가협회 임원이라는데, 잘은 몰라도 달에서 살던 시절에 은경씨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몸을 섞었을지도 모른다.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 그의 팔다리 길이와 시원시원한 손동작이 눈에 거슬렸지만 더 파고들면 집착이 될까봐 그쯤에서 관심을 끊었다. 아무래도 좋게 헤어진 사이 같지는 않았다. 다행이었다.
동료들이 보기에 은